사회 비판2011. 12. 10. 08:40
 지난 번 필자가 작성한 SNS, 희망의 전주곡이 되기 위한 조건 을 보고, 몇몇 분들이 이미 생활이 된 SNS를 무슨 학문 분석하듯이 하느냐라는 반응을 보이셔서 좀더 구체적인 우리네 생활과 관련하여 SNS를 다루어 보려고 합니다. 필자는 전부터 SNS와 비교할 소재로 전기를 생각해 왔고, 오늘은 전기와 SNS를 비교해서 왜 이미 생활이 된 SNS를 필자와 같은 시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는지를 밝힐 것인데, 우선 그 전에 먼저 살펴 볼 일단의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날씨가 전기세를 인상시켰다?
 요즘 한국 사회는 여러가지로 어려운 여건에 놓여 있습니다. 대내외적인 경제 악재로 인해 수출도 줄고 물가도 뛰어 서민들 삶은 더욱 고단해지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공공요금도 자연히 인상되고 있는 중인데요. 필자는 인상되는 공공요금 중에서도...특히, 전기세가 또다시 인상된다고 하는 뉴스에 주목해 보려고 합니다. 지난 9월15일 유례없는 대규모 정전 사태로 인해 산업계 각 분야에 피해가 있었고, 그로 인한 배상 문제와 적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전이 전기세 인상이라는 카드로써 이 상황을 메꾸려 한다고 사람들의 불만이 꽤 많아 보인다는 일단의 뉴스 말입니다... 

 우리네 생활에 없어서는 안되는 에너지원인 전기에 대한 세금이 또 오른다니 좋아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인데요...필자는 바로 여기에서 조금 불편한 사실을 하나 발견하였고 대규모 정전과 관련하여, 요즘 사회적 화두가 되고 있는 SNS의 표현의 자유 논란에 대한 견해를 다시 한번 펼치고자 합니다.

 지금 지구촌에서 가장 큰 문제들 중의 하나는 바로 지구온난화입니다. 그리고, 이 문제의 주범으로 자주 거론되는 것이 서방 선진국과 개도국들이 벌인 환경 파괴와 온실가스라고 과학자들은 말하고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전지구적인 거시적 화두에 대해 한번씩은 들어 보았을 것입니다. 실제로, 한국의 날씨도 지난 20여년 사이에 크게 변하였다는 것을 사람들도 모두 느낄만큼 이상 고온과 한파가 자주 오고 있으며, 여름과 겨울의 두 계절만 존재하는 듯한 기분이 들만큼 날씨 패턴도 크게 변하였음을 여러분들도 잘 알고 있으며 이는 새삼스러운 사실이 아닙니다만...

 여기에서 정말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여름철 아침 뉴스를 보면 전기 수요가 사상 최고치를 연일 경신하고 있다라는 보도를 여러분도 자주 접하였을 것입니다. 여름철에는 기온이 조금씩 계속 상승하니 사람들이 냉방기를 더 많이 가동해서 그렇지 않느냐고 단순하게 생각하면 별 문제가 아닌 듯 하지만, 사실 이 안에는 묘한 군중심리의 일단이 숨어 있다라는 것이 필자가 오늘 말하고자 하는 글의 핵심입니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흐를 지경인 여름 날씨에...우리네 어렵고 힘들었던 과거와는 달리 현대 기술의 발달로 인한 냉방기 보급의 저변화로 각 가정 , 사무실, 건물들에 대부분 비치된 냉방기들은 정말 고마운 존재가 아닐 수 없고, 자연히 더운 날씨가 되면 이 기기들을 이용하게 되는 것이 우리네 생활 패턴인데요...

  여기서 한번 잘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여름이 되어 날씨가 몹시 덥다고 느껴집니다. 실제로 뉴스에서도 오늘 기온은 최고 30도를 훌쩍 넘길 것이라는 보도가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그 말만 들어도 필자를 비롯한 여러분들 대부분은 왠지 오늘은 정말 더울 것 같은 기분이나 감정이 팍팍 밀려 옵니다. 가족들과 집에서 있는 사람도, 회사를 출근해 사무실에 있는 사람들도, 혹은 학교나 그 외의 다른 장소에 있는 분들도 서로간에 오늘의 날씨에 대한 얘기를 주고 받으며, 오늘은 정말 덥다라는 점에 모두가 수긍합니다. 그리고, 정말 한낮에 더위가 느껴지자 모두가 일제히 냉방기를 틀어 댑니다. 그리고, 다음 날 또 다시 뉴스에서는 어제 전기 수요량이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라는 뉴스가 보도되고 여러분들은 어제의 날씨가 정말 더웠다고 생각하게 되는데요. 그런데, 뉴스에서 또다시 오늘은 더 더울 것 같다라는 보도를 합니다. 다시, 우리들은 가정이나 사무실 학교 등에 나가 서로서로 인사를 나누며, 오늘은 날씨가 더 덥다라고 인사를 주고 받으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정말 한낮의 날씨가 덥다고 판단되자 또 일제히 냉방기를 가동하고, 그 다음날 뉴스엔 어김없이 전기 수요량이 또 사상최고치를 경신하였다라는 식의 뉴스가 보도되는 것을 여러분도 경험을 했고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필자는 여러분들에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왜, 여러분들은 지난 여름에 전기 수요가 사상 최고치를 연일 경신하였다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네 몸이 너무나 정확하고 기계적이라서 온도에 따라 정확한 실내외 온도를 잡아내서 그렇다라고 보십니까?  아니면, 뉴스나 사람들과의 대화 속에서 받게 된 주관적 기분이나 감정이 알게 모르게 작용했다라고 보십니까? 만약에 정말 이성적으로 사고를 하는 사람들만 모였다면, 당연히 지난 여름철의 날씨가 지구온난화로 인한 이상 고온 현상의 일단이며, 이런 때일수록 모두가 전기 수요를 자제하고 온도를 일정 수준으로 낮추어야 한다라고 판단하고 대처하겠지만, 필자가 지난 번 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여름철 냉방기 사용은 그냥 생활의 한 패턴이기에 별다른 주의나 의식을 하지 않았으며, 또한 여기에 이 정도 기온에 각 개인이나 집단은 반드시 얼마의 전기를 사용하고 시간은 이만큼을 꼭 지켜야 한다라는 규정은 없기 때문입니다. 자연히 이것은 모든
사람들의 자율의지에 맡겨진 부분이기에, 혼자만의 결정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다른 이들이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따라 상황이 크게 달라진다는 말입니다. 요컨데, 뉴스를 통해서 연일 날씨가 덥다라는 뉴스를 접했고, 회사나 학교, 각 가정에서 가족, 이웃, 회사 동료, 학교 친구들간에 나누는 날씨에 관한 사소한 대화 속에서 이미 여러분은 오늘 날씨가 덥다라고 암묵적 판단을 내린 상태였다라는 말입니다. 그렇기에, 전기라는 에너지가 무한정인 에너지원이 아니며 사상 최고치의 전기 수요량을 갈아치웠다라는 뉴스가 의미하는 바를 크게 인지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얘기를 전기세 인상이라는 부분에 집중해 봅시다.

 지난 9월 15일은 기록적인 늦더위가 있었던 날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연히 가정이나 사무실등에 비치된 냉방기구를 일제히 틀었고, 결국 유례없는 정전 사태가 촉발되었는데요... 여러분은 과연 이것이 세간에서 흔히 말하는 한전의 전기 수요 예측 실패의 결과 탓이라고만 생각하십니까? 위에서 이미 설명하였듯이 필자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이 사건을 가만히 돌이켜보면 이미 9월 15일의 기록적인 늦더위 전에도 지구온난화로 인해 이상 고온 현상이나 폭우 혹은 한파에 대한 뉴스를 자주 접하고, 실생활에서 그것을 피부로 느끼며 필자를 비롯한 여러분들은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9월 15일에 대규모 정전이 일어났을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필자는 여기에서도 예측불가능한 상황에 처한 집단 군중들의 심리를 보게 됩니다. 때는 누가 봐도 9월의 하순, 필자를 비롯한 여러분들은 무덥고 짜증나는 지난 여름 날씨와는 달리 가을의 정취를 한창 만끽할 때라는 무언의 공감대와 인식을 바탕으로, 청명하고 쾌청한 가을 날씨를 마음 속으로 연상하며 하루를 시작하였습니다. 실제 뉴스라든가 다른 방송 프로그램에서도 가을의 푸른 하늘과 정취를 느낄만한 장면이 자주 보여집니다. 그런데, 그 날따라 유독 날씨가 평소의(?) 가을답지 않게 너무 더웠던 것입니다. 자연히, 여러분들은 각 가정이나 사무실, 빌딩등에 비치된 냉방기구를 일제히 틀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여름철, 평상시 우리들이 늘상 해 왔던 생활 속 모습이었지만, 몇 가지 유의할 점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이제 여름은 다 끝났다라는 일종의 심리적 안도나 인식과 함께, 평소답지 않은 가을 날씨에 대해서 사람들이 평소 여름철 날씨를 대하듯이 냉방기를 일제히 가동했다라는 점입니다. 지금 시점에서는 결과적으로 때아닌 늦가을 날씨에 대한 안일한 대처였다라고 사람들의 비난을 받고 있지만, 아마 당시의 한전도 평상시의 가을 날씨에 그래왔던 것처럼 기기를 점검하거나 일정을 짜고 그 날을 보내고 있었을 것입니니다. 하지만, 평상시 여름에 느끼는 더위와 늦가을의 때아닌 늦더위에 대한 사람들의 심리는 분명히 다른 것입니다. 거기에 사람들마다 더위를 느끼는 정도나 강도는 지극히 주관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매우 덥다라고 해서 냉방기를 최대로 가동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또 다른 어떤 이는 이 정도의 더위는 별 문제가 아니라고 느껴서 냉방기를 최소로 가동하거나 아예 사용하지 않았던 이들도 있었을 것인데요... 

 필자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부분은, 이런 식의 때아닌 이상 고온과 그로 인한 더위에 대한 주관적인 각 사람들의 대처 심리를 예측하고 측정할 방법은 사실상 없다라는 점입니다. 다만, 각 가정에 보급된 냉난방기의 수요와 전기 소모량을 대입해서 평균치와 통계치를 내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라는 아이러니한 사실을 여러분들은 혼쾌히 인정하십니까?

  여기에,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가전 냉난방기의 가격도 많이 저렴해지고, 그만큼 해당 기기들의 보급률이 늘다보니 각 가정이나 사무실의 전기 수요량을 예측하기는 더욱 쉽지 않게 되었습니다. 물론, 한전측에서도 때는 가을이라는 기존의 인식 아래서 발전기 몇 기를 중단한 상태였다고 뉴스에서 보도가 되었다지만 그 사실은 시민들 누구나 알고 있는 상황도 아니었으며, 설령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았다 하더라도 전체 가구의 전기 수요량이 이 정도이니까 나는 오늘은 이만큼의 전기만 써야겠다라는 생각을 가지고서 냉난방기를 틀어대는 사람은 위에 여름철 날씨에 대한 우리네 대처에서 보았듯이 그리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기는 현대문명의 근간을 이루는 에너지이자 이미 우리네 생활의 일부이기 때문이지요. 거기에, 날씨라는 요소도 우리네 생활의 아주 중요한 일부입니다. 분명히 이상기온이라는 문제는 그 전부터 있어 왔지만 사람들 대부분이 그 문제의 심각성이나 예외성, 혹은 예측 불가능성, 불확정성보다는 과거부터 늘상 해 오던 습관대로 대응을 했고 이는 결코 나쁜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여기엔 물론 한전도 포함됩니다)가 평상시처럼 행동함으로써 예기치 않게 발생한 대규모 정전 사태와 그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전기세 인상이라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왔고, 그로 인해 그 전까지 우리들이 해 오던 전기에 대한 습관을 주머니 사정을 한번 더 고려하며 사용하게 된 불편한 현실이 남았다라는 점입니다. 

대규모 정전 사태와 SNS 표현의 자유의 상관성
 이제, SNS 표현의 자유에 대한 얘기를  한번 해 보겠습니다. SNS도 전기만큼은 아니지만 이제 우리들에게 아주 친숙한 생활의 한 형태로 자리를 잡아 가고 있습니다. 잠자리에서 일어나 잠이 들 때까지 스마트 폰이나 컴퓨터를 통해 이른바 소셜 네트워킹을 하지 않으면 원시인 취급을 받을 지경에 이르렀으니까 말입니다. 

 현대인들이 사용하는 스마트 폰을 비롯한 가전기기 에너지원의 대부분이 전기인 것처럼 SNS를 움직이는 것은 다름아닌 정보입니다. 그리고, 그 정보에는 온갖 유무형의 법칙과 개인적인 정보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SNS를 통해서 유의미하거나 그렇지 않은 사소한 정보들까지도 스스럼없이 서로 교환하면서 소통과 나눔을 얘기하고, 이는 결코 나쁜 일이 아니며 SNS의 가장 큰 장점이자 미래성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SNS를 통해서 너무 많은 정보...다시 말해서 정확한 사건의 경위나 개인적 입장이 확인되지 않은 루머라든가, 예측이 쉽지 않은 국가적인 중대사같이 정보의 량이 너무 많은 정보들...비유를 하자면 이것은 마치 예측하지 못했던 이상 고온이나 한파같은 날씨와 같은 류의 정보가 유입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가령, 요즘 한창 말많은 A양 동영상 파문 뉴스가 SNS를 통해 전파되었습니다. 필자를 비롯한 여러분들은 여기에 어떻게 반응할까요? 평상시 SNS에서 여러분들이 해 오던 방식처럼...도대체, 그 A양이 누구일까라는 일종의 호기심과 함께, 문제의 해당 동영상을 보게 된다면 얘기는 대규모 정전 사태와 비슷해지는 것입니다.
 
 미스코리아 출신이라는 A양의 지극히 사적인 관계와 그녀의 은밀한 모습에 대한 얘기와 법적 대응과 같은 소식이나 동영상들을 뉴스나 SNS를 통해 보게 되면서, 또 다시 자연스럽게 뉴스나 SNS를 통해 그녀에 대한 기사를 찾아 보거나, 지극히 친한 지인들 사이엔 일종의 가쉽거리로써 얘기를 주고 받을만한 화제가 될 것입니다. 실제로, 9월 5일 A양에 대한 기사나 동영상 조회가 가히 폭발적이었다라고 하는 뉴스가 그 사실을 정확히 반증합니다. 문제는 바로 이런 와중에서 그녀에 대한 이미지는 극도로 나빠질 것이고, 이미 그것은 A양 당사자에게는 사회적인 매장이나 다름 없는 일이라는 점입니다.

 전기를 과도하게 사용하면 전기의 흐름이 끊어지고 결국 정전이 오는 것처럼 SNS를 통해 지나치게 많은 정보가 넘쳐서 일종의 과부화된 정보들 혹은 유통되지 말아야 할 정보들...이를테면 전기에서처럼 필자나 여러분과 같은 평범한 개인이 나라 전체의 전기 총량과 각 개인의 전기량을 모두 예측하거나 측정하고 실시간대별로 최적의 크기만큼 전기를 사용할 수 없었던 것처럼...하루하루의 바쁜 일과와 시간의 부족에 허덕이는 평범한 개개인이 외부의 주장이나 의견을 배제한 체...주체적으로 관련 정보를 정확히 예측할 수 없는 국가적인 중대사나 특정 개인의 사생활에 관한 정보같은 것들이 A양 사건처럼 표현의 자유라는 미명아래 무방비로 급속히 퍼질 경우에...자칫하면 그 사안에 대해 의견을 달리 하는 사람이라든가 집단과의 사회적 관계는 사실상 갈등을 유발하거나 단절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SNS의 가장 큰 장점이라는 소통과 나눔이라는 네트워크의 장점을 크게 훼손하게 된다라는 말입니다.

 때아닌 가을철
더위에 사람들이 전기를 얼마를 써야 하고 얼마의 시간만큼만 사용해야 하는지를 획일적으로 정할 수 없었으며, 그 수요량을 미처 예측할 수 없었듯이...SNS에서 유통되는 어마어마한 량의 정보를 얼마만큼 나누고 그것이 어느 정도의 파장을 일으킬지, 그것을 나누는 당사자들조차도 감히 예측하거나 감당할 수 없고 온전하게 책임을 질 수도 없다라는 것이 지금의 아이러니한 현실입니다. 

 필자는 지난 번 글에서 SNS를 통한 정보를 나누는 행위는 나쁘지 않으나 집단 속에 혹은 특정 상황에 대한 개인의 심리나 행동이 평소와는 확연히 다를 수 있으며, 이 부분에 대한 교육, 언론, 학계의 근본적인 고찰과 합의, 국가적 차원의 장기적 비전을 포함한 정책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감히 주장하였습니다. 이에 대해서 몇몇 분들이 SNS는 이미 생활인데 무슨 케케먹은 얘기를 하느냐고 비판하시겠지만,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전기도 사실 아주 어릴 때부터 여러 경로를 통해서 그 사용법을 익히고 안전 수칙을 지키면서 쓰고 있으며,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감전사나 화재, 합선으로 인한 각종 정전 사고로 개인이나 집단의 재산을 손실하는 사례도 발생합니다. 그래도 그나마 전기는 안전 수칙을 따르지 않으면 위에서 언급한 사례들과 같은 물리적인 사고나 재앙이 반드시 따르겠지만, SNS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정보를 다루고 그로 인한 피해도 물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라는 이유 때문에, 사람들의 경각심을 일으킬 소지가 상대적으로 너무 적으며 그렇기에 더욱 조심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이 SNS를 통해 정보를 나누는 것은 이제는 생활 양식의 한 부분이 되어 가고 있다지만, 이것이 때로는 어떤 이에게 견딜 수 없는 정신적 인격적 고통을 안겨 주고, 그럼으로써 해당 당사자와 사람들 간에 혹은 당사자와 이해나 의견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간에 갈등과 단절을 부를 수 있고 더 나아가서...때로는 극단적인 선택과 함께 국가적 사회적 손실을 줄 수 있다라는 점을 여러분은 제대로 인식하십니까? 날씨가 너무 더워지거나 추워지니까 냉난방기를 가동하자라는 우리네 평범한 생활 양식이나 A양의 사례에서처럼 그녀가 누구냐라는 호기심으로 인한 극히 사소한 정보 교류와 해당 정보의 확대재상산이...결국은 대규모 정전 사태나 특정 개인의 인격을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는 결과를 낳았다라고 말하면 지나친 비약일까요?

 각 가정이나 사무실 혹은 각 건물, 시설들에 배치된 냉난방기를 어느 정도 틀어야만 그 사람이 심리적으로 100% 만족할지에 대한 확실한 답이 있다고 보십니까? 그저 평균치를 내고 과도한 전기 사용에 대한 일종의 지침이나 전기세 인상과 같은 제한적 조치를 취할 수 밖에 없듯이, SNS를 통해서 교류되는 각종 정보에 대한 개인의 판단도 여론 수렴이나 자정 능력이라는 미명아래 그저 평균치를 내거나 통계를 내고 거기에 따르거나 반응 혹은 거부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보이는 모습의 전부입니다.

 각 개인이 선택한 일상의 습관들이 모이고 모여서 대규모 정전 사태라는 초유의 사태를 초래하듯이, SNS를 통해서 교류되는 정보의 과다로 인해서 결국 특정 개인이나 집단이 사회적으로 공격을 받거나 매장 혹은 격리된다라면, 이것은 SNS가 자랑하는 소통과 나눔의 파괴이자 네트워크의 붕괴가 아닐까요?

 전기가 눈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원이지만 우리네 삶을 풍요롭게 하며, 없어서는 안될 필수적인 것이라면 SNS를 통한 정보 교류와 소통도 현대 사회에 없어서는 안되는 필수적인 것이며, 해당 정보의 량을 전부 눈으로 확인하거나 가늠할 수 없다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한다면 어느 정도의 지침과 규칙은 분명히 있어야 할 것입니다.

 내가 나의 집에서 혹은 사무실에 있는 전기 기구를 무심코 사용하는 생활의 패턴들의 조합, 여기에 좀더 합리적이고 경제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있다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의 일반적인 주장처럼 거기에 합당한 전기세를 내고 자신의 경제적 여력의 범위만큼 전기를 쓰겠다라고 생각하면서...그런데 사실은 그런 합리적인 경제적 판단과 생각을 하는 이들이 상당수였고, 그래서 모두가 일제히 전기를 쓰게 되고, 여기에 지난번 때늦은 늦가을 더위같은 변수가 겹치게 되면 예기치 않은 대규모 정전 사태가 올 수도 있듯이, SNS를 통한 측정할 수 없는 량의 정보 홍수 속에서 우리가 무심코 저지르는 정보의 교류와 소통이라는 미명아래...다시 말해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 아래 개인의 사적 정보가 지나치게 노출된다면, 자신의 정보가 노출된 해당 당사자에게는 사회적 관계의 파괴를 안겨 줄 것이고, 우리들이 무심코 SNS를 통해 구현하는 정보의 교류나 나눔이라는 생활 속 행위 자체가 결국 사회적 관계를 파괴하거나 개개인간의 신뢰를 무너뜨릴 수도 있는 위험성이 있다라는 사실도 깊이 인식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사용하는 전기에 대한 기본적 상식을 아주 어릴 때부터 여러 경로를 통해 알게 모르게 배우고, 전기로 인한 물리적 사고나 재앙을 예방하듯이, SNS를 통한 정보에 대한 개인의 반응이나 집단 속에 처해서 특정 상황을 바라보는 개인의 행동의 차이를 깊이 인식하고, 차분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정보를 주체적으로 분석하고 받아들이는 인식과 행동 습관들도, 전기에서의 안전 수칙과 같이 일종의 지침이나 규범 혹은 법률과 교육이 수반되어야 한다라고 필자는 주장하는 바인데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P.S: 오늘의 글이 오해의 소지를 부를 수 있는 부분이 있기에 필자는 몇 가지 부연 설명을 하고자 합니다. 오늘의 글이 한전의 전기세 인상 방안을 옹호하려거나 공격하려고 쓴 글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또한 일반 대중들의 당시 상황 대처를 질책하거나 훈계하겠다라고 쓰여진 글은 더더욱 아닙니다.

 다만, 필자가 주목한 부분은 SNS를 통해서 유통되는 것은 우리가 눈으로 보거나 물리적으로 측정할 수 없는 정보라는 사실이며, 이것이 주는 장점만 생각하고 그 이면에 발생할 수 있는 위험성을 간과하거나 외면하면 작게는 특정 개인의 인격을 말살하거나 혹은 특정 집단이나 그룹이 사회적으로 고립되어서 결국엔 SNS가 지향하는 소통과 나눔, 다양성 그리고 집단지성이라든가 자정 능력이라는 화두를 무색하게 하는 사례가 계속해서 생길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습니다. 

 전기는 현대 사회에서 필수적인 에너지원이지만 우리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 전기 에너지를 사용하는가에 따라서 빛으로 혹은 열이나 영상, 통신등의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납니다. 하지만, 전기를 잘못 다루거나 안전 수칙을 무시하면 개인 혹은 집단의 생명이나 재산을 손실할 수 있는 물리적 사고를 불러 올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안전 교육이나 해당 분야에 대한 각종 법률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네 몸에도 일정량의 전자기적 에너지가 흐르고 있고, 이것 때문에 스마트 폰의 액정 화면을 터치해서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검색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전기 에너지는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우리 주변을 둘러싼 강력한 물리적 힘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SNS를 통한 정보와 함께 그것을 나누고 교류하는 행위는 현대인들에겐 이제 필수적인 것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SNS를 통한 정보를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올바른 사회적 공론이나 여론 수렴, 방향성이 제시되지만, 그렇지 않은 정보...이를테면 개인의 사생활이나 특정 개인에 대한 악의적인 공격성의 내용들 혹은 대부분의 평범한 개개인이 모두 확인할 수 없을 정도의 규모의 정보나 경로를 가진 국가적 중대사에 관한 확인되지 않은 루머 혹은 괴담들이 유통된다면, 전기에서처럼 눈으로 직접 확인되는 물리적인 사고는 아니겠지만 유무형으로 사회적 국가적 손실을 측정할 수 없을만큼 키울 수도 있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이 부분은 다음 글에서 분명히 언급하겠지만, 지금 벌어지는 한미FTA에 대한 불필요한 사회 정치적 갈등이나 극한 논쟁도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전기의 속도는 빛의 속도와 똑같고 그 형태나 쓰임새가 다양하듯이, SNS를 통한 정보의 교류나 확산속도와 그에 대한 파장도 비유적으로 보자면 가히 빛의 속도에 맞먹는 것이며, 공교롭게도 SNS를 구현하는 물리적인 에너지원이 전기라고 필자는 생각하였기에, 오늘 글의 소재로써 전기를 언급하고 대규모 정전 사태를 언급한 것이지 누군가를 특별히 지적해서 옹호하거나 공격할 의도로 쓴 글이 아님을 밝혀 둡니다.  

 필자가 다음 글을 작성하기 전까지 필자의 생각이나 논조를 예단하지 마시길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사진 출처: 구글 이미지

 
Posted by 네 오 NEO
사회 비판2011. 12. 5. 06:50

 요즘 미국, 유럽은 물론이고 한국 사회에서도 가장 많이 회자되는 단어들 중에 하나가 바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일명 SNS라는 것은 이제 삼척동자도 다 아는 기정 사실(?)이며 , 시대적 명제인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10여년 전부터 월드 와이드 웹으로 대중화된 인터넷을 통한 기초적 형태의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와 정보 교류는 있었지만, 스마트 폰을 통해서 구현된 SNS가 주는 정보 습득의 속도와 정도는 가히 전례가 없는 것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이에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열광하며 정치, 사회, 경제, 안보, 교육과 같은 거시적인 이슈뿐만이 아니라 개개인의 일상과 그에 얽힌 여러 사연들을 타인과 공유하며, 그것을 통해 친밀감과 유대감을 나누고 이를 진정한(?) 나눔과 소통이라 명명하는 형국인데요...

 
 
 과연 SNS는 이미 구시대적(?)으로 보여지는 종래의 대의 민주주의를 비롯한 정치, 경제, 사회 전반의 문제를 시민들이 자발적, 주체적으로 나서서 제기하고 해결책을 제안하는 이상적인 통로이자 도구가 될 수 있을까요?...

 
 오늘 필자가 하고 싶은 얘기의 주제는 바로 SNS는 진정 이 시대의 희망이 될 수 있을 것인가인데, 우선 얘기를 본격적으로 진행하기 전에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고 이런 부분들과 연관시켜, 필자를 비롯한 우리 모두가 SNS를 통한 정보나 이야기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고 다루어야 하는지를 고민하고, 더 나아가서는 진정 SNS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희망이 되기 위한 비전을 한번 제시해 보고자 합니다.


집단 속에 속한 개인의 행동은 그가 혼자일 경우와는 상황이 많이 다르다?

 1964년 3월 13일 금요일 케서린 제노비스란 여성이 원스턴 보즐리라는 남성에게 무려 13차례나 칼에 전신을 난자당하여 살해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사실은 그녀가 그렇게 무참하게 살해되어가는 모습을 지켜 본 목격자가 자그만치 38명이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그녀의 불행을 경찰에 신고한 이가 한 명도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뉴욕타임즈를 비롯한 언론에서는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38명의 목격자들이 보여준 무심함과 침묵에 대해서 당시의 법이 어떤 형식의 처벌도 규정할 수 없다면, 관련 법들을 개정해서라도 그들을 처벌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만약 이것조차도 되지 않는다면 뉴욕 타임스 1면에 이들의 이름과 주소를 공개해야 한다라는 극단적인 견해까지 나왔었습니다.

 
 이 시점에서 필자가 여러분에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과연 그 당시 38명의 목격자들은 정말로 우연히도(?) 다른 이들보다 더 냉정하고 매몰찬 인성을 가진 이들로만 뭉쳐 있어서 그런 끔찍한 살인사건이 그대로 방조되고 벌어진 것일까요? 당시 목격자들의 증언은 다른 이가 있으니 나 하나쯤은 괜찮지 않을까라는 심정으로 그냥 바라본 것이었다는데, 여러분은 이게 과연 사리에 맞고 온당한 얘기로 들리십니까?

 
 위의 사례가 우리나라가 아닌 외국의 사례라서 실감이 잘 안 나신다구요? 그럼 또 다른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2002년 온 국민에게 감동과 환희를 안겨주었던 월드컵 4강이 있었던 바로 그 날... 서해에서 북한과의 교전에서 우리들의 아들이자 남편 그리고 아버지이기도 했었던 일단의 장병들과 장교들이 소중한 생명을 잃어버린 사건이 있었습니다. 평상시였다면 엄청난 사회적 파장과 정치, 외교, 안보적으로 나라 전체를 뒤흔들만한 일대 사건이었지만, 당시 한일월드컵의 분위기에 휩쓸려 아주 미미하게 언론에서 다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월드컵이 끝난 이후에도 전사자들에 대한 처우 문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유가족들에게 씻을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다시 한 번 안겨준 형국이었는데요...
 
  왜 당시 우리나라의 대다수 국민들은 이 사건을 나중에 알고서도 평상시와는 너무나도 달리 시큰둥하거나 사뭇 무책임한 모습으로만 반응을 하게 되었을까요?

 
 이런 상황에 대해서 달리와 라티네라는 사회 심리학자들은 책임감 분산(Diffusion Responsibility)이라는 용어를 정의하면서 어떤 사건이나 인물에 대해 목격하거나 관여한 사람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책임감이 분산되기에, 특정 인물이나 사건에 관해 보여준 무관심이나 방관에 대한 책임을 그 누구도 지지 않으려 하며, 애써 모른 척하거나 회피하려고 한다라는 매우 불편한 사회적 명제를 제시하였습니다. 이는 우리네 사회에서 흔히 얘기하듯이 다른 이들과 함께 하면 그만큼 세상이 밝아지며 훈훈해진다는 사회성이라는 명제가 어떤 특정한 경우나 시기 혹은 인물이 처한 상황에 대해서는 그저 허울 좋은 명분이 되거나 혹은 우리 모두에게 상황을 오판하게 하여 불필요한 사회적 논쟁과 더불어 애꿎은 희생양을 만들어내는 식의 그릇된 방법으로 이끌어 갈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까? 

 

평범한 개인이 펼치는 표현에 대한 자유보다 특정 개인의 표현의 자유가 훨씬 더 크다?

 필자는 이 글을 작성하기 며칠 전에 이 나라의 법과 질서를 수호하신다는 사법부의 모 부장판사님께서 한미FTA에 대한 비판적인 성격의 글을 올리고, 그에 100여명의 판사들이 동조를 하면서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그동안 한미FTA의 ISD조항에 대한 논쟁은 분분했지만 법 체계를 다루는 전문가이신 부장판사님이 주장하는 내용은 필자와 같은 일반인이 주장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무게와 파장을 지니며, 이는 소위 말하는 세상살이의 인지상정일 것입니다. 따라서, 이에 대한 공정성과 부당성에 대한 논쟁은 일반인인 필자의 영역이 아니며, 이 글에서 논하고픈 문제의 본질이 아니라고 생각되어 따로 언급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필자가 이 사건을 보며 매우 불쾌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정말 흥미롭다고 느꼈던 부분은 평소 사법부에 대한 야당의 비판이나 국민적 불신들이 이번에는 전혀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사법부를 두둔하고 옹호하며, 개인적 표현의 자유라고 찬양 일색(?)의 발언들만 넘치더라는 점입니다.

 
 하지만, 그런 의견을 제시한 모 부장판사님은 사법부 전체의 의견을 수렴하고 충분히 사안을 검토한 뒤 자신의 주장을 개진한 것입니까? 아니면 SNS라는 새로운 경로를 통해 자신의 평소 개인적 신념이나 사회적 가치관을 여과없이 피력한 것입니까? 야당을 비롯한 많은 국민들이 모 부장판사님의 개인적 의견이며 이에 대한 재제는 시대착오적이라고 주장할지 모르겠으나, 다른 한편으로 대다수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사법부라는 전체 기구의 주장이라고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이 불편한 아이러니를 어떻게 해석해야만 할까요?

 
 그리고 이런 사회 심리적 현상은 비단 이런 특수한 경우에만 보여지는 것만도 아닙니다. 우리가 어느 식당에 들어가 특정 종업원이 보여준 질이 낮은 서비스로 인해 감정을 상하고 그 식당에 대한 이미지 자체가 나빠지는 경우, 그리고 그 반대의 경우는 또 얼마나 흔합니까?

 
 여기서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사람은 결코 개별 상황이나 특정 인물이 펼치는 주장을 순수한 이성과 합리성, 객관성을 가지고서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며, 다분히 자신들이 기존에 가진 주관이나 감정들에 의거해서 재해석한다라는 점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특정 인물에 대한 사회 집단의 지나친 관심이나 반감은 잘못된 해석을 낳는다?

 
 필자는 모 부장판사님의 사건이 있기 얼마 전에 한미FTA 강행처리(?)에 얽힌 다소 유치한 뉴스를 하나 접하게 되었습니다. 민주당의 김진애 국회의원께서 한나라당의 박근혜 의원을 겨냥하여 올린 글이라는데, 한미FTA 처리를 둘러싼 여야의 극한대치 속에 박근혜 의원께서 국회 내 화장실에서 태연하게 화장을 고치더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짤막한 뉴스로 인해, 박근혜 의원은 안티팬들뿐만 아니라 많은 일반인들에게도 나라의 중대사를 앞에 두고서, 화장이나 하는 아무 신념도 생각도 없는 정치인으로, 한순간에 이미지에 일종의 낙인(?)이 찍히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여기서의 본질적인 문제는 박근혜 의원의 당시 심사를 본인 이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는데도, 반대 야당의 여성 의원이 올린 유치한 글 하나에 자신의 이미지가 심히 훼손당했다라는 점이 아닌가라는 점입니다.
 
 필자는 남자이지만 기분이 안 좋거나 컨디션이 조금 떨어진다라고 느껴질 때면, 화장실에서 수시로 면도를 하곤 합니다. 그럴 때면, 주변 사람들은 흔히들 오늘 데이트가 있느냐 혹은 무슨 좋은 일이 있느냐라는 반응을 보이곤 하였습니다. 필자가 보이는 면도에 관한 독특한 행동이나 습관을 그들은 자신들의 평소 습관과 잣대로 판단하기 때문이지요...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박근혜 의원이 당시 그런 중대사를 앞두고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화장을 고친 것인지, 아니면 어떤 특정한 상황이나 인물을 대해야 하기에 예의상 화장을 고친 것인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지만,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여성의 화장 패턴이나 정치인에 대한 부정적 기억과 감정이 결부되어서 민주당 김진애 의원이 올린 유치찬란한 폭로성 기사는 강력한 휘발성을 갖게 되었으며, 평소 박근혜 의원에게 반감을 가졌던 사람이라면 더더욱 자신의 생각이 옳았다라고 느낄 것이며, 박근혜 의원에게 반감을 갖지 않았던 무당파적 사람들도 별다른 생각 없이 그녀에 대한 반감을 품게 되며, 이 감정적 정서적 기억은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과연 민주당 김진애 의원의 그 유치찬란한 폭로성 기사는 박근혜라는 정치인을 100%로 진실되게 그리고 보여주는 적절한 뉴스였을까요?


결론

 필자는 이제 불편한 군중 혹은 집단 심리에 대한 이야기의 결말을 지어 보려 합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만은 정말 신중하고 합리적으로 모든 결정을 내리고 있다고 믿지만, 불행하게도 진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1964년의 뉴욕, 그리고 2002년 대한민국 사회에서 벌어진 집단적 무관심과 무책임함은 그 집단에 속한 개개인의 도덕적 결함도 책임감의 부재도 인성의 문제도 결코 아닙니다. 그저 해당 집단이 처한 특정한 상황과 그 속에 속한 개인의 감정이 빚어낸 비극이었습니다.

  모 부장 판사님의 한미FTA논란에서 자주 회자되는 개인의 표현에 대한 자유에 대해서도, 사람들이 저마다 주장하는 표현의 무게와 파장에는 커다란 차이가 존재합니다. 그래서 필자는 표현의 차이가 확연히 다른 인물이 주장하는 내용은 개인의 주장이라고 보기에는 어렵다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이런 경우에, 개인의 표현에 대한 자유보다 우리가 더 고려하고 신중히 저울질할 부분은 그 특정 개인의 사회적 지위나 영향력, 그리고 그것을 대하는 사람들의 일반적 잣대나 이중 심리를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라는 얘기입니다. 또한 특정 인물이나 집단, 혹은 상황에 대한 평소의 반감은 아주 짤막하고 왜곡된 정보에 의해서도 더욱 증폭되며, 설령 사후에 그런 이미지에 대한 해명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라는 점을 지적하였습니다. 최근 방송에 복귀한 주병진 씨를 한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필자나 여러분과 같은 이 사회의 평범한 구성원들이 가지는 일반적 윤리나 도덕적 잣대에 의해서 한순간에 이미지에 타격을 입은 뒤 본인은 얼마나 억울하고 힘들었겠습니까...

 
 따라서, 필자는 이런 주장을 하고 싶습니다. SNS는 분명 유례가 없는 정보 혁명의 도구이자 소통의 경로이지만 , 지금처럼 집단에 속한 개인의 심리나 감정에 의해서 정보가 왜곡되거나 비틀릴 수도 있다라는 인식이 의식 속에 깊이 배어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강력한 선동의 무기가 될 수도 있고, 자신들에게 반대하는 특정 인사나 집단을 악의적으로 공격하는 도구로 전락할 가능성이 너무나도 크기에, 정보를 바라보는 우리네 인식을 바꿔 줄 근본적인 교육 체계 개편이 필요하다라고 주장하는 바입니다.

 
 이미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인간은 그렇게 합리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않으며, 감정과 상황에 쉽게 굴복하거나 휩쓸리는 나약한 존재임을 현대의 많은 학자들이 연구한 학문적 연구와 성과를 통해 우리는 어렴풋이나마 이미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현대 심리학이나 기호학, 산업 혹은 인지 심리학,사회 심리학, 행동 경제학, 정보 사회학과 같은 과목들을 아주 어릴 때부터 기초 과정부터 심화 과정까지 나누어서, 학년이 올라갈수록 더욱 심화된 학습을 하고 정보를 바라보고 바람직스럽게 유통하는 방법을 가르쳐야만 하며, 그러려면 현행 교육 체제의 전면적 조정과 개편이 반드시 필요할 것입니다.

 물론 필자를 포함한 여러분 모두도 매사에 정보를 모두 분석하고 그것의 파장과 합리성, 객관성을 최대한 감정을 배제한 채 상세하고 면밀하게 다루는 단계에 있지도 않으며, 우리네 사회적 분위기도 전혀 성숙되지 않았다라고 감히 주장하는 바이며, 이에 대해서도 언론...그것이 주류 언론이 되었든 비주류 언론(?)인 SNS가 되었든간에, 관련 정보를 취재하고 정말로 많은 이들이 공감하며 자신의 정보 습득 경로를 되짚어 보고, 평소 주관이나 감정을 반성하고 돌아볼 수 있는 진짜 양질의 콘텐츠나 프로그램을 다함께 고민하고 기획하며 만들어 가시길 바라는 바입니다.

 
 그리고, 이런 부분들이 하나하나 현실화되고 대다수 국민들이 진정 정보를 주체적으로 해석하면서 사회 전반을 바라보는 시각을 가지기 전까지는...지금처럼 개인의 정보가 무단으로 노출되고, 특정 집단이나 개인이 그것을 악용하는 사례가 끊임없이 보도되는 시점이나 상황이라면 최소한의 규칙이나 규범, 규제는 반드시 필요하다라고 보여집니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민주주의와 산업 혁명을 이끌었던 시민 계급은 개인의 사적 영역, 프라이버시를 확립함으로써 자신들의 정체성을 발견하고 그 시대를 선도할 수 있었으며, 지금도 대다수 민주주의 국가의 헌법에는 개인의 자유와 사생활 보장이라는 조항이 포함되어서 종래까지는 그 가치에 근본적인 변화가 오거나 큰 문제가 일어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이 정보의 속도와 량이 역사상 유례를 찾아 볼 수 없고, 개인의 사생활이나 정보의 보호가 결코 완전하게 이루어질 수 없는 불완전하고 과도기에 해당되는 시대적 상황이라면...또한 SNS와 관련된 분야와 산업의 폭발적인 증가와 함께, 관련 법안들이 서로 상충되거나 사각지대가 생기고 있는 현실 속에서라면...우리는 이제 개인의 인격과 관련된 사적 영역, 프라이버시에 대한 개념도 다시 잡아가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필자가 주장하는 이런 모습들이 현실화된다면, 분명히 시민들이 주축이 되는 완전한 직접 민주주의를 SNS라는 경로를 통해서 구현할 날이 분명히 올 것이라고 생각되며, 그런 사회적 흐름을 이끌어가는 진짜 스마티즌들이 이끌어가는 선진 대한민국을 필자가 살아있을 때 보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사진출처: 구글 이미지

Posted by 네 오 NEO
사회 비판2009. 9. 27. 05:33
  요즈음 다음 뷰를 간간히 살펴보면, 소위 미국에 대한 막연한 환상과 동경을 질타하거나 비판하는 글들이 상당히 자주 눈에 띕니다. 개인적으로는 과연 이게 다음 뷰의 전반적인 흐름이 바뀐 탓인지, 아니면 일시적인 현상인지는 아직은 확실하게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일반 독자들에게는 상당한 충격과 신선함으로 다가오고 있는 듯 합니다. 그리고, 이런 식의 색다른 비판과 또다른 관점의 포스트가 나오는 것은 소위 의견의 다양성 측면에서는 그리 나쁠 것이 없다라고 필자도 생각은 합니다.

  하지만, 관련 포스트들을 살펴보면서 필자가 갖게 되는 일차적인 생각은, 미국에 대한 비판을 하려면 좀더 객관성이 담보되거나 해당 분야에 대한 보다 심층적인 얘기들이 병행되었으면 하는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자꾸만 생겨나는데, 

 
필자가 왜 이런 생각과 말을 하느냐면, 그런 포스트를 읽고 난 독자들의 반응이 대부분 단순한 이분법적 논리를 따라간다는 정황적 사실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미국 편의점(?!미국은 한국의 편의점과는 규모라든가 물건 판매의 성
격이 사뭇 다르고, 박사학위까지 받은 전문적인 약사들이 근무하고 있다라는 점에서 일반적인 편의점이라는 표현은 분명히 어폐가 있다라고 생각됩니다!) 에서 치과 용품을 파는데 한국의 치과 의사가 보기에도 충격을 받았다는 일련의 얘기를 보고 나면,

  곧바로 터져 나오는 독자들의 반응이라는 것들
이 대부분 미국의 민영 의료 보험의 폐해가 이렇게 문제라는 둥 혹은 이런 미국식 의료 민영화를 추진하려는 MB정부를 맹렬히 비판하고 성토하거나, 그도 아니면 미국의 실상(?!)을 알고 보니까 한국의 의료 보험은 그래도 양반이니 감사해야 하며, 어떻게든 의료 민영화는 막아야겠다라는 다짐 아닌 다짐(?!)들이 쏟아져 나오는 식인데... 

  이건 얼핏 보기엔 대단히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시민의 모습이라고 보이겠지만, 문제의 이면을 좀더 자세히
알아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라는 사실을 한번쯤 제대로 논해보고자 합니다.

※참고할만한 자료
미국의 약사와 약학 대학

 그러니까, 오늘의 주제는 미국의 의료 보험의 제반 문제를 개혁하려는 오바마 행정부의 시도가 왜 어려운지를, 그리고 이를 통해서 한국의 MB정부가 시도하려는 의료 민영화 문제를 좀더 심층적으로 바라보려고 합니다.   

      미국 의료 보험의 역사적 특수성과 오바마의 의료 개혁이 순탄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는 이유
  MB정부의 의료 민영화 시도를 비판하는 이들의 포스트를 조목조목 살펴보면, 대부분 미국의 민영 의료 보험 체계를 들어 그 폐해와 문제점을 지적하고 우려하는 내용들이 주류입니다.

 사실 이런 모습들은 해방 이후부터 지금까지의 한국 사회가 모든 부분에서 압축 고도 성장을 하였기에, 역사적 선례나 기준들이 마땅치 않은 경우가 대단히 많았으며, 그러다보니 많은 경우에 있어서, 미국이나 유럽 혹은 일본같은 선진국의 정책 사례나 실패
를 모델로 삼거나, 혹은 비교 분석을 꾀하게 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현상이라는 점은 필자도 십분 인
정하는 바입니다.


  하지만, 비교 분석을 하고 모델로 삼으려고 하는 과정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장단점만을 피상적으로 살펴보거나 혹은 그것을 그대로 한국 사회에 적용시키려다가 더욱더 문제가 꼬이고정을 어렵게 만드는 사례들이 종종 있는데, 의료 보험 민영화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이나 논의의 과정에서도 결코 예외가 아니라고 보여진다는 점입니다... 
 
  필자가 개인적으로 관찰하고 판단하기에, 미국 의료 보험의 폐해를 비판하는 많은 이들이 크게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는데, 왜 미국은 여타 유럽의 선진국과는 달리 민영 의료 보험 체계가 미국 사회내 주류를 이루게 되었을까요?...

  의료 문제는 국민들의 건강권과 복지 문제에서는 결코
빠질 수 없는 중요 사안으로써, 유럽의 대다수 선진국들은 전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의료 보험 체계를 가지고 있으며, 그 방식이 민영이든 혹은 공영이든간에, 그것을 국가가 일정 부분 개입을 해서 관리 통제하는 것에 반해, 이른바 세계 최강이라는 미국은 정부의 관리나 규제를 받지 않는 민간 의료 보험 회사들이 주축이 되었을까라는 역사적 의문을 얘기하는 것으로써, 오늘의 포스팅의 본론으로 슬슬 넘어 가야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익히 아시는 바와 같이, 미국은 건국 초기부터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크게 강조하면서 세워진 나라입니다. 그리고, 그 어느 나라보다도 자유주의적(!!!) 민주주의가 크게 발전한 나라입니다. 그러다보니, 아주 자연스럽게도 의료 보험 분야에서 국가가 직접 나서기보다는 의사와 환자간에 직접적인 계약이나 이해 관계로써 문제를 풀어가는 역사적 배경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의사는 의료 서비스의 공급자이며 환자는 그 서비스를 사려는 소비자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진정한 자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체제의 국가라면, 정부가 직접 나서서 의료 문제를 관리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의사들과 환자들간에 직접적인 소통이 원론적으로는 정답이라고 얘기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그런 원론적인 부분들이 현실에 그대로 반영된 모델이 바로 미국 사회였던 겁니다.

  물론 미국도 과거 대공황을 거치면서 메디케어나 메디케이드같은 국가가 관리하는 의료 보험이 생겼지만, 기본적으로 그것들은 극빈자나 노약자들에 한해서만 적용되는 보험이였고, 당시에는 인구의 구성비라든가 산업계 전반의 동향이나 국가의 성장 잠재력 측면에서 이들이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았었기에, 그리고 당시 사회 구성체간의 이해 관계가 여러모로 맞아 떨어지면서, 여타의 유럽 선진국들과는 전혀 다른 민영 의료 보험 체제의 길을 걸어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대단히 이례적이고 독특하며, 소위 자유 민주주의의 원칙인 국민들 각자의 의사와 사회 각 계층간의 합의라는 원론을 극한의 경지에까지 구현하려다가, 본의 아니게도(?!) 크게 말썽이나 뒷탈이 생긴 대표적이고 매우 희귀한 케이스가 바로 미국의 민영 의료 보험 체계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오바마가 이런 미국의 민영 의료 보험 체계에 일대 변화를 주려고 해도, 일단 1920년대의 대공황 당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사회가 복잡 다단해졌고, 사회내 소수 민족의 구성비가 크게 늘었으며 자본주의 체제가 극도로 심화되었다라는 여러 구조적 측면들이 일차적 어려움으로 작용하게 되면서, 미국 대통령인 오바마 자신이 직접 TV에 출연해 수차례 의료 보험 개혁의 당위성을 설파하고, 여러 민족과 계층으로 나누어진 미국 국민들을 일일히 설득하기에도 매우 벅찬 실정이 된 것니다.

   게다가 미국은인의 능력과 노력 자유등을 크게 강조하다 보니, 애시당초 정부의 개입을 그리 반기지 않는 전통적인 분위기가 사회내에 깊숙히 잠재되어 있다가 신자유주의가 크게 득세하면서, 사람들 사이에 이런 인식이 더욱 굳어진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당장에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민간 의료 보험을 국가가 대신하려면 천문학적인 예산이 필요한 법인데, 가뜩이나 경제 사정도 최악인 형국이므로 정부가 예산을 확보할 방법도 마땅치 않은 것은 불을 보듯 뻔하겠지요...


  당연히 국민들에게서 세금을 더 걷어 국가적 예산이 확충되어야 어떻게든 이 문제를 해결할텐데, 세상 모든 자본주의 체제의 국민들이 세금을 올린다면 좋아할 나라는 그 어디에도 없다라는 것이, 오바마 의료 개혁의 최대 딜레마인 셈이지요... 

  특히나, 미국 의료 보험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빈민층의 대다수는 소수 이민족들이기에, 더욱더 미국 부유층과 중산층에게 세금을 부과하는데 있어서, 숱한 어려움과 반대가 생길 수 밖에 없게 되는 본질적 구조적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무슨 말이냐면, 미국은 건국 초기부터 개인의 노력과 능력을 유난히 강조하였기에, 매우
자연스럽게도
가난은 자신이 노력하지 않고 나태하며 게을러서 그렇게 되었다라는 논리가 먹히게 되는 사회 구조를 가졌었고, 그것이 1980년대 초부터 신자유주의 사조와 결합해서 민간 의료 보험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스스로 노력하지 않는 이들에 대한 당연한 댓가로써, 또한 중산층과 부유층에게는 본인이 열심히 일한만큼 제대로 된료 혜택이나 서비스를 선택하거받을 권리가 있으며, 이것이 매우 합당하고 당연하다라는 기존의 사회 인식으로 깊숙히 굳어졌다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미국인들의 이런 일반적인 사회 인식들부터 바꾸거나
허물지 못하면, 오바마의 의료 개혁은 한낱 공염불에 불과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므로, 의료를 하나의 거대 산업으로 키운 미국의 초국적 제약 회사나 보험 회사들이 자신들의 생존권 차원에서 막강한 로비와 자금력을 앞세워서, 이런 미국민들의 기존 인식을 자극하거나 강화하는 일련의 모습들이 더더욱 이 문제를 꼬이게 만드는 매우 주요한 변수일지는 몰라도, 미국 의료 보험의 근본적 원인이나 문제의 본질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 필자가 강조하고픈 미국 의료 개혁의 핵심 포인트입니다.

  다시 말해서, 제약회사나 보험회사들의 완강한 저항이나 정치적 로비가 있다라고 해도, 미국민들이 열렬히 원한다면 문제는 해결의 실마리가 어떻게든 보일텐데, 지금 미국의 상황은 그게 아닌 것 같다라는 말입니다.


  어쨌거나, 미국의 민영 의료 보험은 비록 지금 시점에서 엄청난 문제와 한계를 드러내고 있으며, 이른바 소수 민족으로 대변되는 인종 구성 비율의 변화라든가 사회내 각 계층간의 구성 변화로 인해, 어떤 식으로든 개혁이나 변화가 불가피한 시점이 점차 도래하고 있지만, 처음부터 미국 정부가 직접 나서서 관리하고 통제한 모델이 아니라 국민들이 스스로 선택한 측면이 상당히 강하며,
 
  또한, 지금 이 시각 미국의 대통령인 오바마가 의료
개혁을 하겠다고 하면서 벌이는 일련의 모습을 살펴 보아도, 우선 미국 국민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설득하고 민영 의료 보험의 폐해와 실상을 제대로 알리는 홍보 차원에 집중하고 있다라는 사실을 유념하면서, 이제 한국의 의료 보험을 간략하게 살펴 보겠
습니다.


         한국 의료 보험의 역사적 특수성과 MB정부가 추진하려는 의료 민영화의 불편한 진실
 
미국이 자유 민주주의적 원칙과 가치에 입각하여 여타의 선진국과는 전혀 다른 민영 의료 보험의 길을 걸었다면, 한국의 의료 보험은 박정희 군사 독재 정권의 강압과 힘의 논리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만들어진 기형적(?!) 체계입니다.

  여러분들도 익히 아시다시피, 한국의 역대 군사 정권들은 쿠테타를 통해서 정권을 획득하였으며 그만큼 정통성이 취약하다 보니, 그것을 만회하고자 경제나 민생 분야에서 일련의 포퓰리즘적 정책들을 몇몇 도입하였었는데, 그것의 일환으로 탄생한 것이 바로 오늘날과 같은 의료 보험의 근간이었던 셈입니다.

  따라서 한국의 의료 보험...다시 말해서 건강 보험은 유럽의 선진국들에 비해서 GDP 대비 지출율은 현저히 떨어지고 의료 수가도 상대적으로 저렴하다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한국의 의료 보험은 일반 국민들이 세금등을 덜내는 저비용 방식을 쓰면서 양질의 의료 서비스를 받는 고효율을 지향하는 비정상적인 체제이며, 과거 30년간 이 체제는 비약적인 압축 성장을 거듭하면서, 서민들의 건강과 의료 수준에 크게 이바지한 측면이 분명히 있기는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마치 한국이 과거 고도 경제 성장을 한 것과도 매우 흡사한 모습입니다.

  문제는 한국의 고도 성장의 이면에 숱한 농민들과 노동자들의 피와 땀 그리고 희생이 있었듯이, 당시 한국 사회의 경제 구조나 체계에 그닥 맞지 않는 비정상적인 사회주의적 의료 보험이라는 체계를 확립하면서도, 누군가가 희생을 강요받게 되었는데 그 희생자가 과연 누구인가라는 점에 대한 논의나 고려는 이상하게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라는 점입니다.

  또한, 과거 산업화 시절에 한국의 개발 독재와 성장 우선주의 정책이 만들어낸 고도 경제 성장의 시대가 소위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로 인해 사회가 복잡다단해지고, 산업의 체계가 근본적으로 재편되면서 궁극적인 한계를 맞고 있는 것처럼, 당시에 만들어진 의료 보험의 기본 체계도 이제 한계를 맞고 있는 실정인데, 그 문제점들을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한국 건강 보험의 대표적 특징중 하나인 당연지정제를 놓고 생각해 봅시다.
  원칙적으로는 한국도 미국처럼 의사들과 환자들간의 직접적인 소통이나 커뮤니케이션 혹은 사회 구성체간의 합의를 통해서 의료 보험 체계를 만들어야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불행인지 혹은 다행인지는 몰라도, 과거 군사독재 정권 당시에는 이러한 민주주의적 원칙들은 전혀 지켜지지가 않았으며, 당시 경제 사정이나 여러 여건들을 고려하여 매우 일방적으로 일반 서민들에게 인기를 얻을만한 내용으로써 전반적인 의료 보험 체계가 결정이 되다 보니, 의사들의 권리나 의견은 철저하게 무시 혹은 묵살되었던 겁니다.


  하지만, 사실 말이 나와서 하는 얘기인데, 의사라는 직업이 과연 어떤 것입니까? 의대를 들어가서 본과를 졸업하고 인턴과 레지던트 수련까지 모두 마친다면 적어도 평균 11년 이상의 고된 학업과 수련을 거치지 않으면 안되는 대표적인 전문 직업이 아닙니까? 따라서, 자신이 노력한만큼 돈을 벌고 잘 살 수 있는 진정한 자유 민주적이고 자본주의 체제를 가진 국가라고 한다면, 모든 병원과 의사들이 행한 의료 행위에 대한 댓가나 수당이 동일하고, 그것을 지키도록 국가가 강제한다라는 것은 분명히 불합리하고 자유 민주주의적 원칙에도 크게 어긋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아주 능력있고 시설이 좋은 병원이나 의사나, 막말로 능력도 그저 그렇고 시설도 별로인 병원이나 의사가 환자들에게서 받는 진료비나 시술비는 똑같고, 그것을 차별화할 길이 원천적으로 막혀 있다라는 얘기가 되는데, 

  최근들어 더욱 논란이 가열중인 교육 평준화에 따른 교육의 질적 저하 논란에서
처럼, 자연히 어느 시점이나 순간에서부터는 정상적인 경로로는 첨단 의료 기술을 한층 연구하거나 발전시키며, 병원의 시설을 최
첨단화하거나 고급화시키려고 누가 노력을 하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런 비합리적이고 모순을 가진 의료 체제에서도 소위 규모의 경제 효과로써, 자신들이 원하는 규모의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유일한 그룹은 몇몇 재벌들이나 유명 대학들 혹은 아주 특출한 소수의 의사들뿐이지 않겠습니까?


  자연히 대다수 일반 병원이나 의사들은 낮은 의료 수가를 메꾸기 위해 특진이나 비급여와 같은 편법을 종종 쓰거나 성형외과와 같은 건강 보험 적용이 안되는 분야들에만 의사 지망생이 대거 몰리거나, 혹은 처방전에다가 불필요한 고가의 약품을 추가 기입하는 방법등의 불법이 시간이 흐를수록 기승을 부리거나 더욱 난무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일반 외래 환자들의 진료 시간을 줄여서 조금이라도 의료 수가를 더 받으려고 하다보니, 의사들은 의사들대로 격무와 만성적인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환자들은 환자들대로 양질의 의료 서비스를 제공받기는 힘들어지는 측면이 필연적으로 생기면서, 자연히 대학 병원이나 종합 병원을 가면 족히 1~2시간은 기다려서, 겨우 5~10분간의 진료를 받는 일들이 비일비재해지는 것이 현실이 아닙니까...


  그리고 이런 모습들이 일종의 관행처럼 굳어지면서, 환자들은 환자들대로 병원이나 의사들을 점차 신뢰하지 않거나 자기 밥그릇만 챙긴다고 불만을 갖게 되었고, 의사들도 비합리적이고 불공평한 의료 보험 체계와 국가나 사회 언론의 비뚤어진 인식과 무관심 그리고 선정적인 언론 보도에 내심 크게 분노하고 불만을 토로하는 제로섬적인 구조나 상태가 바로 지금의 상황 아니던가요...

  게다가, 한국의 의료 보험 체계는 초창기에 지나치게 당시 경제 상황만을 고려해서 만든 근시안적이고 포퓰리즘적인 정책이다 보니 환자들에게 부담시키는 보험료를 너무 낮게 책정했었고, 그러다 보니 산업화가 이루어지고 경제가 크게 발전하고 국민들의 생활 패턴이나 소득 수준이 크게 늘어나면서 생긴 각종 질병들...이를테면 암이라든가 뇌질환같은 현대 문명성 질병에 대한 보장폭이 OECD선진국들만큼 넓지 못하며, 그런 부분들을 메꿀 민간 보험들이 매우 발달되어 있는 나라가 아니던가요...

  지금도 많은 분들이 의료 보험의 민영화에 무조건 반대한다지만, 실상 이미 한국 건강 보험의 질병에 대한 보장폭이 선진국의 그것에 비해서 낮으며, 그 간극을 민간 보험 회사들이 맡고 있는 실정에 대해서는 왜 모두가 침묵하는지 필자는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건강 보험이 60% 그리고 나머지 40%는 본인 부담이나 비급여로 나누어지면서, 사실상 국민들의 의료비 지출중에 약 40%는 민간 보험 회사들이 떠맡고 있다라는 사실을 왜 간과하느냐는 얘기입니다.                            

  솔직히 백혈병같은 질병에 걸리게 되면 도저히 현행 건강 보험만으로는 치료를 받을 수 없으며, 따라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민간 보험을 한 두개쯤 따로 가입하고 있는 것이, 한국 사회내 서민들의 일반적인 행태라는 것은 삼척동자들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만약, 이런 모습을 근본적으로 바꾸려고 한다면, 정부가 의료 보험료를 획기적으로 올리고 질병에 대한 보장폭도 높이면서 낮은 의료 수가에 대해 불만이 많은 의사와 병원들에게 보다 많은 급여를 지급해야만 하는데, 그 예산 확보라는 것이 생각이나 말처럼 그렇게 쉽겠습니까?...

  진보 세력이나 시민단체들은 툭하면 국가가 건강 보험에 대한 지원을 더 늘려야 한다라고 매우 무책임한 주장을 하는데, 일반 서민들 입장에서야 달콤하고 좋은 얘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게 말처럼 쉽겠느냐는 말입니다.
막말로 대다수 국민들이 의료 보험의 혜택의 범위는 보다 넓히기를 바라겠지만, 당장 유럽 선진국들 수준으로 의료 보험료의 파격적이고 획기적인 규모의 상승을 적극 찬성할까요?...  

  게다가,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고령화 사회와 저출산 사회가 되어가고 있는 중이며, 결국 이 말은 지금의 젊은 세대들의 가뜩이나 얇아진 유리 지갑을 좀더 털어서
계속 늘어만가는 노인층들을 전부 보필하고, 의료 재정 확충에도 기여해야 한다라는 말이 되는데, 이게 지금 한국 사회의 20~30대 젊은 세대들의 대체적 성향으로 볼 때, 이른바 세대간 갈등이나 사회 구성체간 갈등 혹은 극심한 혼란으로 비화하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감히 장담할 수 있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의료보험은 국민들의 건강권과 복지에 관한 부분이므로 결코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허접한 민주주의적 원론을 들이대며 강변하려는 분들은, 국민 연금 재정 확충과 고갈에 대한 20~30대 직장인들이나 젊은 세대들의 불만과 하소연을 잘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게다가, 현대 의학은 시시각각 발전하고 거기에 따른 첨단 장비나 수술 기법은 자연히 기존의 의료 보험 체계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재정적 부담을 지우거나 혹은 신종 전염볌이나 희귀 질병에 대한 백신이나 처방에 대해 신속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측면들이 계속해서 생기면서, 이른바 의료 보험의 혜택이 적용되지 않는 비급여의 영역이 계속해서 늘고 있는 실정이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최근의 신종 플루와 관련해서 거점 병원을 지정하였다고 하는데, 대단히 유감스럽지만 어떠한 법적 근거도 없이 한국 정부가 임의로 병원을 지정하였으며, 타미 플루의 사재기라든가 특진과 관련된 논란의 핵심은 바로 이런 획일적이고 의사들만의 희생을 강조하는 한국 의료 보험의 구조적인 문제에서 기반한 것이 아닙니까? 


  더군다나 문제는 여기에서만 그치지 않습니다. 이 부분은 의도적으로 침묵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몰라서 많은 분들이 외면하고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이미 노무현 참여정부 시절에 
한미FTA를 통해서, 한국의 일반 서민들에게 특히나 민감한 의약품에 대한 가격이 크게 오를 소지와 함께, 당연 지정제의 예외를 인정하는 경제자유특별구역이라든가, 비록 외국 투자자에 한해서이지만 영리법인의 병원을 허용하자라는 국내외적인 여건들이 복잡하게 겹쳐져서, 의료 보험 재정의 고갈과 구조적 위기에 대한 논의와 문제를 더욱 꼬이게 만들어 놓았는데,

  그저 미국의 의료 보험 체계를 피상적으로 살펴
보자니 문제가 아주 많고 거기에 비하면 한국은 그래도 괜찮으니까, 그냥 이대로 지금의 체제를 가지고 가야 한다라고 하는 식의 실속없는 대나 비판적 논조는 정말로 구태중의
구태가 아닌가라는 얘기입니다.

 노무현 참여정부 시절에 지정된 경제자유구역지구의 범위와 한미FTA로 인한 의료 분야의 예상되는 피해나 손실이 과연 어느 정도인지를 보고 싶은 분들은 아래의 더보기를 클릭하세요!



 결론: 의료 민영화 논쟁에서 찬성 혹은 반대를 하기에 앞서, 주변 조건과 현실에 모두가 솔직해지자
  결론적으로 말해서, 여러분들이 진정 한국의 의료 보험 체계를 지금처럼 유지하거나 더욱 발전시키고 미국적인 문제나 폐해는 막으려고 한다라면, 아무 대책없고 단순한 이분법에서 비롯된 무조건적인 의료 민영화 찬성이나 반대가 아니라, 사회 양극화와 경제적 불황이라는 국가 사회적 위기가 겹친 지금 이 시점에서, 과연 어떻게 하면 일반 국민들의 건강 보험료 부담은 최대한 억제하면서도, 의료 급여나 수가는 획기적으로 높여서 의사나 일선 병원들의 불만을 원천적으로 잠재우는 길을 모색한다거나 혹은 그런 방향의 논의가 여야 정치권과 시민 단체 그리고 언론에서 끊임없이 나오도록 사회 여론을 형성하거나 주도해야만이,

  지금이나 앞으로의 한국 사회내에서 의료 민영화 시도나 논의가 근본적으로
사라질텐데, 과연 지금 대다수 민주 진보 인사들이나 시민 단체 그리고 언론이나 다음 뷰의 시사 블로거와 네티즌들이 그런 생각이나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필자가 보기에는, 전혀 그렇지 못한 관계로 인해, 과거 노무현 참여정부 시절에도 의료 민영화 시도가 이미 있었던 것인데, 정말로 어처구니없게도(!!!) 그 당시에는 일부 진보 세력이나 시민단체들을 빼고는 그마저도 아예 문제 제기조차도 없었다가, 이제 한나라당과 MB이 집권하여서 의료 민영화가 시도되는 것처럼 사실을 크게 왜곡하거나 떠들며, 조중동식으로 말바꾸기를 시도하고 무조건적인 반대를 하기만 하면, 그래서 정권이 다시 바뀌기만 하면 이런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다라고 보십니까?...-_-;;;


  의료 보험은 단순한 의료와 자본의 흐름이나 기득권과 일차적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의 기본권인 건강권과 직접적 관계가 있는 것이기에, 소위 시장과 경제의 논리로만 접근해서는 결코 안되는, 매우 민감하고 중요한 부분이 될 수 밖에 없는 분야중에 하나입니다.

  흔히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라는 말처럼, 건강권은 헌법에 보장된 국민들의 행복 추구권의 바탕이자 기본권이기에, 의료 보험 체계에는 각 나라와 사회가 가진 특수성과 역사적 전통 혹은 연원 그리고 사회 구성체간의 이해 관계나 사회 정치 경제적 합의등이 매우 복잡하게 얽혀있기 마련이며, 따라서 미국 민영 의료 보험의 폐해나 단점을 한국 사회에 그대로 적용해서 피상적인 비교나 비판을 가하면, 상당히 오버스러운 모습이 되거나 여러모로 무리가 따른다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미 한국 사회는 소위 회자되는 사회주의적 의료 보험 체계로 지난 30여년간을 지내왔으며, 일반 국민들도 이러한 의료 체제에 대한 학습효과가 단단히 되어있는 상황인데, 한국 사회내 어떠한 정치 세력들이나 혹은 제반 계층이라도 이걸 하루 아침에 미국의 민영 의료 보험 시스템처럼 바꿀 수도 없고, 그렇게 할 수 있는 여지도 그리 많지 않다라는 것은 제주도 특별자치구의 영리법인 병원 논란 사례를 보아도 분명한 사실이라고 필자는 생각합니다.
 

  따라서, 매우 독특한 미국의 사례를 들며 지나치게 과장을 하고 일반 국민들에게 막연한 공포와 겁을 주어서 문제의 본질을 계속 외면하게 할 것이 아니라, 한국의 건강 보험과 민영 의료 보험 그리고 그것과 관련된 논의는 지금 중요한 갈림길에 놓여 있다라고, 사회 구성원 모두가 솔직하게 인정을 하고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필자는 판단하는 바입니다.

  즉, 미국식의 전면적인 민영 의료 보험 체계는 결단코 안되겠지만, 현실적으로 건강 보험이 담당하지 못하는 부분들을 민간 의료 보험에 맡기거나, 이미 노무현 참여정부 시절 경제자유구역 특별법등으로 예외 사례가 될 수 있다라는 논의나 우려가 촉발된 당연지정제같은 강제 조항들을 일정부분 완화하거나 보완하는 수준으로 나갈 것인지,

  아니면, 아예 민간 의료 보험은 생각조차도 하지 말고 일반 국민들에게서 세금을 보다 더 많이 징수해서, 국민 세금으로 확충된 국가 재정으로써 의료
분야를 전반적으로 커버할 것인지를 두고, 사회 구성체 모두가 정말 심사숙고하고 대대적인 여론이나 공론을 수렴해서 하루빨리 원만한 결정을 도출해야 한다라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만약에 국가가 실질적으로(!!!) 모든 것을 떠맡는 방식의 후자를 택하려면, 당장 의료 보험 공단의 재정 운용 상태에 대한 보다 투명한 감시 체계 확립과 함께, 건강 보험 재정을 방만하고 안이하게 운용한다라는 비판을 받는 소위 무능한 관련 공무원들에 대한 대대적인 감찰과 구조조정이나 인력감축 혹은 그 반대로 능력있고 참신한 신입 공무원들을 대폭 확충하는 재편 과정이 반드시 뒤따라야만 하고,

  이른바 탈세로 대변되는 자영업자나 고소득자에 대한 세무 조사도 다시 해서 조세 원칙의 형평성부터 철저하게 바로 세우면서, 또한 지역 보험 가입자와 직장 보험 가입자간의 불신이나 오해도 일정부분 해소하여야만 하고, 그럼으로써 일반 국민들에게 세수 확대에 따른 근본적인 불만이나 기존 인식들부터 바꾸거나 잠재워야만 하며, 상당수 민간
의료 기관들을 국가가 직접 사들여서 공공 의료 기관으로 만들어야만는데, 지금의 한국 사회내에서 과연 이런 일련의 근본적인 개혁들이 단시간내에, 진정한 사회적 합의에 의해서 실행이 정말로 가능할까요?... 


  이미 한국 의료 보험의 문제는 고령화 사회와 세계 최고 수준의 저출산, 그리고 국민적인 소득 향상에 따른 다양한 의료 수요와 한미FTA같은 전방위적인 무역 협정으로 약제비가 폭발적인 상승을 할 여지가 생기면서 한계선상에 이르렀고, 획기적인 구조적 변화를 요구하는 상황에 다다랐으며, 자연히 대다수 사회 구성원들에게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라고, 필자는 개인적으로 판단하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미국이 국민들의 합의와 의사에 따라 추진했던 민영 의료 보험으로 막심한 피해를 보는 현실보다는, 국민들의 의사나 합의는 철저히 무시하고 마치 중세시대의 전제국가들처럼, 무자비하고 폭압적인 독재자가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고 추진한 한국의 기형적인 의료 보험이, 지금 시점에서 더욱 효율적이고 서민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부분들은 역사적인 일대의 아이러니이자 흥미로운 연구 대상감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이전에 미국의 의료 보험 체계가 형성된 과정과 그것을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미국 대통령 오바마가 보여주는 일련의 모습등을 통해서, 과연 현실적인 관점과 상황속에서 민주주의적 가치와 원론이란 도대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이룩하기 위해서 한국 사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이른바 정치적 포지션에 따라 수시로 말바꾸기를 하는 친노세력과 일부 노무현 지지자나 조중동같은 가증스럽고 혐오스런 모습이 아닌, 소위 진정성을 가지고 사회 구성원 모두가 이 문제를 좀더 심층적으로 알아보고 깊이 고민하였으면 좋겠습니다만...

  
  ...만약 이런 고민이나 논의가 앞으로도 없다라고 한다면, 한국 사회는 이제 더 이상의 질적인 발전은 도저히 기대할 수 없으며, 그저 소모적인 무한 논쟁이나 사회 계층간의 불신과 갈등만 더욱 커질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측면에서 의료 민영화를 살펴보면, 노무현 참여정부 시절에도 이 문제의 본질과 실상을 제대로 일반 국민들에게 알리고 미국의 대통령 오바마처럼 국민들을 설득하고 이해를 구했던 것이 아니라, 한편으로는 건강 의료 보험 재정의 고갈과 시간 부족 그리고 경제 활성화등을 이유로 경제자유특별구역이나 한미FTA같은 예외적 케이스나 특별 조항 혹은 사항들을 계속 만들면서도,
 
  또다른 한편으로는, 그저 일반 국민들의 눈치나 여론 동향을 보면서 의료 민영화 카드를 만지작거리다가, 결국 시행하지 않는 식의
포퓰리즘적이고 기만적인 대국민 정책으로써 귀중한 시간을 허비한 것이, 지금 이 시각 의료 민영화 문제를 더욱 키우고 사회적 갈등과 혼란을 야기한 일차적 원인이며, 현 MB정부도 이 부분에서 노무현 참여정부와 똑같은 모습을 취하거나, 시간과 예산의 부족과 경제 활성화라는 전형적이고 틀에 박힌(?!) 명분을 또다시 이유로 들며, 더 한층 과격하게 나아가려고 한다라는 것이 한국 건강 보험 체계가 가진 불편한 모순이자 진실이라는 점과 함께, 대다수 일반 국민이나 시민 단체 그리고 언론도 이 문제를 장기적 관점이 아닌 자신들의 이해 관계가 얽힌 편향적인 사고와 시각 속에서만 바라보거나 풀려고 한다라는 점에서... 

  이른바 민주주의가 현실적으로는 얼마나 성취하기가 힘들며, 시간이 오래 걸리는 영원한 미완결의 체제인지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나 학습 효과가 거의 전
무하거나 부재한 현실이, 바로 지금 한국 사회의 태생적인 비극이자 불행의 씨앗이라는, 지극히 서글프고 답답해져만 가는 필자의 심정과 한국 사회에 대한 인식을, 이제는 여러분들도 다같이 공감하고 상황을 좀더 진지하고 치열하게 보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리면서, 필자는 오늘의 포스팅을 이만 마치렵니다..                                                                            

           

                                                                                          ※사진 출처: 구글 이미지

Posted by 네 오 NEO
사회 비판2009. 9. 22. 02:30
  여러분은 조기 유학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혹자의 주장처럼 실속은 없고 해만 끼치는 조기 유학이라고 생각해서 반대하시나요? 아니면 그래도 한국의 열악한 교육 사정이나 여건을 따져 볼 때, 조기 유학이 자녀에게 도움이 된다라고 보시나요? 미국으로의 조기 유학을 반대하든 혹은 찬성하든간에, 한국 사회의 조기 유학 열풍은 이미 사회적 핫 이슈이고, 한국 부모님들 특유의(?!) 교육열과 겹쳐져 기러기 아빠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 내며 여러 문제점들을 드러내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조기 유학이란 이슈가 사람들의 관심과 이목이 집중되는 소재여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다음 뷰에도 조기 유학을 반대하거나 우려하는 목소리들이 종종 올라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걱정이나 우려를 밝히는 방법이나 주장의 근거는 지극히 한국적인 시각에서 비롯되었거나 혹은 미국 현지실정을 잘 모르고 하는 얘기이거나, 그도 아니면 사실을 잘 알면서도 은근히 그것을 왜곡시키면서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는 경향이 있는데, 필자가 어제 우연히 본 포스팅도 이런 범주 중 하나에 속하는 것이라고 판단되었고, 또한 필자가 3년이란 결코 짧지 않은 시간동안 나름의 애정을 붙이고 있는 다음 뷰에 잘못된 정보가 유통되는 것은 조금이라도 막아보자라는 취지에서, 모처럼 맞은 휴일 여가시간을 쪼개가며 비판 혹은 반박 포스팅을 다시 한번 준비했습니다. 

 필자가 우연히 읽어보고 심각한 논리상 오류와 사실 왜곡의 문제점을 느낀 글은 조기 유학 보내지 말아야 할 7가지 이유 라는 제목의 포스팅인데요.

  오늘의 본격적인 얘기를 진행하기에 앞서, 우선 해당 포스팅의 내용을 간락하게 요약하자면, 미국은 한국의 소위 전인교육과는 달리 질서를 잘 지키고 사회 구조에 순응하는 시민을 양성하는 교육을 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서 교육의 질이 떨어지고 공립학교들의 수준은 미국 정부가 이미 포기(?!)를 해서 가히 절망적이며, 사립학교는 돈이 엄청나게 많이 드니까, 미국으로의 조기 유학일랑 아예 생각도 하지 말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미국의 교육 철학이나 방침이 히틀러에게서 비롯되어 영재 교육과 우민화 교육을 주로 병행 실시하고, 미국의 명문 대학의 대명사로 불리는 동부 아이비 리그 대학의 학생들이 공부를 하느라 인성이나 전인교육, 철학의 공유등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사실과 너무나 달라서 반박과 비판을 가하지 않을 수 없는 내용이므로, 지금부터 왜 해당 포스팅이 문제인지, 그리고 필자가 생각하는 조기 유학은 과연 어떤 것인지를 조목조목 밝혀 보고자 합니다.

                           미국의 교육 철학과 방침이 히틀러에게서 비롯되었다?
  필자가 바로 전 포스팅 (한국과 미국, 보다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국가는?) 에서도 분명히 언급하였지만, 해당 포스팅 작성자는 미국에 대한 감정이나 인식이 극단적이고 편향적인 것이 가장 큰 문제인데요. 그런 측면에서, 제일 먼저 필자가 문제삼고 싶은 부분은 미국이 히틀러의 교육 철학을 이어받아, 소위 천재는 철저하게 교육시키고 나머지는 멍청할수록 좋다라는 교육 방침을 가지고 있다라는 부분은 명백한 사실 왜곡임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미국은 건국 초기부터 모든 국민들의 인권과 자유를 고려하며 운영되었고, 그 결과 히틀러가 등장하기 훨씬 전인 19세기 후반 무렵부터 이미 영재 교육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었지만, 평등이란 민주주의적 기본 이념 때문에 계속해서 논쟁이 오가면서 본격적인 영재 교육 시행을 미루어 온 대표적인 선진국인데, 해당 포스팅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과거 영재 교육의 역사를 자세히 살펴보면, 근대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영재 교육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여 왔던 것은 분명한 사실입다. 특히 독재자들은 영재 교육에 더욱 많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예를 들어, 해당 포스팅에서도 이미 언급하였듯이, 히틀러는 심리 검사를 기초로 특수학교나 특수반을 운영하였습니다. 또한, 소련의 스탈린은 화학, 물리학, 생물학, 수학, 외국어, 언어학등을 강조하는 교육정책을 더욱 강화하였습니다.

  그에 반해, 미국은 평등 교육과 영재 교육의 대립이 항상 존재해 왔습니다. 바로 그래서, 세계2차 대전 이후에도 계속 평등 교육을 강조하였다가, 소련의 스프트니크 로켓 발사 이후 국가적인 위기 의식을 느끼면서 비로소 영재 교육을 크게 강조하게 되었으며, 1970년대엔 베트남 전쟁과 인권 운동의 노력으로 다시 평등 교육이 강조되었다가, 1990년대에는 이른바 개성과 창의력을 증진시키자라는 차원에서 영재 교육을 다시 강화하고 있는 실정이라는 것이, 보다 정확한 역사적 사실이나 현실 인식이라는 점을 우선 밝히고 싶습니다

  또한, 영재를 선발하는 기준이나 방법, 연령대도 매우 다양해서, 한국으로 치자면,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그 연령대의 범위나 학생 선발의 폭도 넓고, 영재에 대한 개념이나 정의도 제각각인데, 중학교 3학년을 졸업할 무렵에는 일괄적으로 지능검사를 실시해서, 학생들을 따로 선발한다라는 얘기는 특정 지역 특정 학교의 영재 교육중 극히 일부만을 말한 것이라는 사실도 분명히 밝혀둡니다.


  또한, 미국에는 그런 영재 교육 학교 이외에 공립학교와 사립학교가 있는데, 공립학교는 이미 정부에서도 포기하는(?!) 단계에 접어 들었고, 사립학교는 학비가 무려 1억원에 이르는 곳도 있으며, 그런 사립학교의 교칙과 일정이 너무나도 타이트해서 학생들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다며, 실제 사례로 빌 클린턴도 이런 사립학교(?!)를 다니면서 스트레스를 받아서, 마약과 마라화나에 심취했었다라고 주장하는 부분은 정말로 어처구니가 없는 부분입니다. 

  우선, 빌 클린턴은 과거 집안 살림이 그리 넉넉치 못해서 사립이 아닌 아칸소주의 공립학교를 다녔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마약에 한때 심취했던 이유는 불우하고 매우 복잡한 그의 가족사와 관계가 있는 것이지, 무슨 학교 일정과는 별다른 상관이 없었음을 분명히 밝혀 둡니다. 그리고, 미국의 명문 사립학교의 1년 학비가 수천만원(평균 3천만원~4천만원)이 든다라는 것은 필자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도대체 1년 학비만 1억원에 육박하는 명문 사립학교는 어디를 말하는 것인지 필자는 아직까지 파악을 못하였습니다...-_-;;;

  또한, 미국 정부가 공교육을 개선하기 위해 그동안 노력했던 일련의 프로그램이나 과정들은 모두 무시하고 사실을 왜곡하면 정말 곤란하지요. 미국은 이미 2002년부터 공교육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공립교육에 대한 개혁안을 발표하고 시행에 들어갔는데, 그 개혁안의 이름은 "어떤 아이도 뒤처지지 않게(No Child Left Behind)" 입니다.

  이 법안은 어느 학교든지 교육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학부모나 학생은 자신이 원하는 공립학교나 차터스쿨, 과외 학습등을 선택할 수 있게끔 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 법안의 구체적 시행과정에서 여러 문제점과 착오가 보여서 논란이 계속되고 있지만, 어쨌든간에 여기에서 제일 중요한 사실은 미국 연방 정부가 공교육을 포기하였다고 보여지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미국 공립학교가 예체능 수업이 없고, 명문인 아이비 리그 
                        대학의 학생들은 인성과 철학을 공유할
시간조차도 없다고?
 

  해당 포스팅은 위에서 필자가 언급한 사항 이외에도 사실을 왜곡하는 부분이 정말 많은데요. 가령, 미국 공립학교가 한국 공교육에서는 흔하디 흔한(?!) 미술, 음악, 체육같은 수업을 전혀 가르치지 않고 있으며, 따라서 미국 학생들의 문화적 소양의 정도가 한국의 중학교 수준에 불과하다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는데, 이것도 심각한 사실 왜곡입니다. 

  미국은 건국 초기부터 지방 자치가 매우 발달된 나라입니다. 따라서, 각 주나 지역마다 적용되는 법규나 조항이 사뭇 다른데, 이런 풍토는 교육 예산 배정이나 과정 자체에서도 결코 예외가 아닙니다. 그래서, 미국의 공립학교는 주정부(평균 46%)와 지역구(평균 47%)에서 추징된 주민들의 세금으로 주로 운영되는 겁니다. 물론 연방정부가 예산을 지원하기는 하지만 그 비율은 고작 7% 정도에 머무르고 있는 실정입니다.

  
 
다시 말해서, 미국의 공립학교는 미국 민주주의의 근간인 지방 자치의 원칙에 입각하여 지역의 주민들이 얼마나 잘 사느냐에 따라 학교의 수준과 여건이 결정
되기 마련인 것입니다. 자연히, 사립학교에 자기 자식들을 보낼만큼의 형편은 못되지만, 그래도 경제적 여유가 왠만큼 있다라는 미국 중산층 부모님들은 좋은 공립학교가 있다는 지역으로 이사를 가고 싶어하며, 그 덕분에 그런 지역들은 부동산 가격이 상대적으로 높다라고 필자는 지난번 포스팅에서도 이미 언급을 하였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에서 경제적 여유나 살림살이가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는 지역의 공립고등학교는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이 시행되고 있습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그 프로그램 (Elective course) 속에는 한국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다채로운 예체능 교육뿐만이 아니라, 보다 심도깊은 작문이나 문학 서적에 대한 토론 프로그램이라든가 혹은 대학 수준의 일반 교양도 미리 배울 수 있는 프로그램(Advanced course)을 신청할 수 있다라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혹시 아시나요?


  그리고, 바로 이런 공립학교와 사립학교의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과 인프라가 존재하기에,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가졌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미국 아이비 리그가, 역시나 최고로 우수하다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학생들을 선발하는 잣대나 기준이, SAT(한국으로 치면 수능 성적)나 학업 성적(한국의 내신 등급)에만 그치지 않을 수 있었던 든든한 배경이 되는 것입니다. 

   세계 최고라는 미국의 아이비 리그 대학에 입학하고자 지원서를 내는 고교 졸업생의 수는 매년 아이비 리그 대학 입학 정원의 10~15배를 훌쩍 능가하며, 그 중 85% 이상의 지원자는 SAT나 고교 내신 등급이 최상층에 속하기에, 학업 성적만으로는 도저히 그들 모두를 선발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아이비 리그 대학들은 학생의 학업 성적 이외에 봉사 활동이나 대외 특별 활동, 에세이, 자기 소견이나 비전, 심층 인터뷰 그리고 해당 학생이 머무는 지역 사회의 각 분야에서 열심히 자기 직무를 수행한다라고 평가받는 명사들의 추천서를 요구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바로 그래서, 아이비 리그 대학에 입학하려면 개인적 마인드가 이기적이든 혹은 네가지가 없든말든 한국처럼 공부만(!!!) 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인성이나 창의력 그리고 주어진 상황 속에서 최선의 길을 강구하거나 찾아가는 긍정적 마인드를 쌓으려고 혼신의 노력을 다하여야만 하는데, 해당 대학 학생들이 인성을 고려할 시간조차 없다라니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요?...-_-;;;

  또한, 아이비 리그 대학에 입학하면 통상 1~2학년에서는 전공을 정하지 않고 본인이 원하는 교양이나 인문학 수업을 신청해서 다양한 학문과 철학적 소양을 접하거나 쌓게 하고, 특히 1학년 신입생들은 무조건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학생들간의 유대와 공동체 의식 강화, 그리고 질서나 규율 준수에 대한 마인드를 익힘으로써, 대학 졸업후 사회에 진출해 각 분야의 리더가 되었을 때 그 누구보다도 솔선수범해서 사람들을 이끌고, 자기 자신을 다스릴 품성과 인격을 배양하는데 궁극적인 대학 교육의 지향점을 두고 있는데, 해당 포스팅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필자는 당최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한국의 허접하고 망국적인 학벌 연고주의를 비호하려고 미국의 아이비 리그 대학을 졸업하면 바로 귀족이 된다라는 주장을 펴는 것도 상당한 어폐가 있습니다. 미국에도 상류층이 있고 그런 계층에 속한 이들이 아이비 리그에 많이 입학을 하니까 현대판 귀족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한국 사회에서처럼 서울대학 졸업장이 소위 연줄과 출세의 보증수표라고 인식되거나 말할 수 없는 열린 사회가 바로 미국입니다.

  왜 한국 사회에서 이른바 서울대 무용론이 고개를 들었으며, 논란이 그토록 분분했었는지를 잘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만약에 공직이나 기타 사회 각 분야의 리더를 한국 사회처럼 속칭 SKY가 능력보다는 연줄과 학벌을 우선시하여 싹쓸이를 하거나 독점하였다면, 다민족과 다원화된 시스템과 체제를 가진 미국의 대학이나 사회 구조는 그 뿌리에서부터 이미 산산조각이 나거나 철저하게 붕괴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미국의 내막을 잘 모르는 듯(?!) 보여지는 해당 포스팅 작성자는, 그래도 미국으로 조기 유학을 보내려면, 아이비 리그나 TOP10 순위에 오른 대학으로만 석박사 유학(석박사 유학이 조기 유학입니까?)을 보내라고 아주 당당하게 조언하던데,


  이것도 생각하면 할수록 웃기는 것이, 미국엔 아이비 리그 이외에도 각 분야에서 뛰어난 학업 성취나 연구 성과를 보이는 종합 대학이나 커뮤니티 컬리지들이 대단히 많고, 순위권에 들어있지 않거나 한국 사회의 일반인들에게는 그리 잘 알려지지 않은 이런 부류의 대학들을 통해서 배출된 인재들에게도 충분히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넉넉히 부여하는 소위 열린 사회라는 부분을 완전히 간과하고 있다라는 점입니다...


  ...이런 미국의 사회적 분위기나 모습들은 한국의 지방대나 전문대 출신자들이 망국적인 학벌과 연고 파벌주의에 절망하고, 자기 스스로를 자학하는 암담한 처지와는 차원이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겠어요..!

                             조기 유학, 무조건적인 반대를 말하면 안되는 이유
1.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해당 포스팅을 살펴보면, 조기 유학 반대의 첫 번째 사유로써 한국의 전인교육의 우수성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건 도저히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고 납득이 되지 않는 주장입니다.

  한국 학생들의 부모님들이 가진 교육열과 전인교육은 세계 최고 수준인데, 교육 행정 당국이 무능하고 고교 평준화 정책 때문에 질적 저하를 맞고 있다라고 주장하는 부분은, 달리 말하자면, 불평등과 차별을 일정부분 인정해야 한국 교육이 질적으로 발전한다라는 얘기가 되는데, 그럼 학생들 각자의 전인교육은 어떻게 되는 것이며, 자기 스스로 심각한 논리적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격이 아닙니까?

  우리네 어르신들 말씀중에 빛 좋은 개살구라는 속담이 있는데, 솔직히 말이 좋아서 전인교육이라고 부르지 한국의 중고교 교육 체계는 획일화된 대학 입시 체제에, 그 목표나 촛점이 모두 맞추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다보니, 수능 성적과 내신 등급에 학생이나 일선 교사 그리고 학부모 모두가 그야말로 목숨을 걸게 되었고,

  해당 포스팅이 금과옥조처럼 강조하는 전인교육은 그저 구호나 말뿐이며, 모든 교과목이 내신 등급을 위한 시험 점수로 환산되면서, 대부분의 한국 학생들이 단편적인 지식들은 정말로 많은데, 그것을 유기적으로 연결하거나 색다른 발상이나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학습 여건이 전혀 안된다는 것이, 한국 교육의 진짜 핵심적 문제가 아닙니까...


  그에 반해 미국은, 일선 고등학교들이 한국처럼 극단적이고 획일적인 입시 체제에 모두가 목을 메고 있는 것도 아니며, 명문 대학들도 입학전형으로 수능 성적이나 내신 등급만 보는 것도 아니기에, 다양한 체험과 심도있는 토론을 전개하고 각자의 개성과 발상을 최대한 키우려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영재 교육이란 것도 강조하게 된 것이지, 한국처럼 명문대학 입학이라는 획일적인 지상목표를 위해, 자세히 따져보면 영재 아닌 영재들이 영재 교육을 받거나 시키려는 것이 아님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문화적 수준을 순위로 매긴다는 자체부터가 지극히 서구적인 마인드인데, 동양 철학과 한국적인 마인드와 정을 그렇게 강조하시는 양반이, 갑자기 문화적 소양이라든가 상식 수준을 순위로 매긴 외국의 데이터를 들이대며 한국 교육의 우수성(?!)을 유난스럽게 강조하는 모습에 대해서, 필자는 그 의도나 이유가 아무리 정당하다고 해도 이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왕 말이 나와서 하는 얘기인데 문화란 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문화란 바로 총체적인 삶의 양식이 아닙니까? 따라서, 각 나라나 민족마다 제각각의 문화가 있기 마련이며, 그런 문화적 척도를 가늠하려면 사람들이 그것을 얼마나 향유하고 즐기는지를 살펴 봐야지, 무슨 학업 성적마냥 순위를 매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막말로, 대부분의 미국 학생들이 제 아무리 멍청하고 학습량이 한국에 비해 턱없이 모자란다고 해도, 자신들이 속한 국가의 역사나 주요 풍습들은 왠만큼 인지하고, 또한 그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며 즐깁니다.

  그 반면에, 한국 학생들은 한국의 전통 문화라든가 세시 풍속들에 대해서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습니까? 일선 중고교에서 자랑스러운 우리 선조들의 얼과 넋에 대해 도대체 얼마나 많이 가르치며, 학생들이 자신의 선조들을 얼마나 존경하고 자랑스러워하며, 선조들이 남긴 아름다운 전통 예절과 미풍 양속
을 얼마나 제대로 알고 그것을 지킵니까? 정말 허접하고 단편적으로 다른 나라의 화가 이름과 음악가 이름이나 세계 지리를 조금 더 많이 아는 것이 문화적 수준의 척도입니까? 정말로 그런가요?...


  필자가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한국 학생의 문화적 척도를 재는 방법은 자신이 속한 성씨의 내력이나 족보를 한번 읊어보라고 하면 제격이라고 생각하는데 말입니다. 


2. 사교육에 들어갈 돈으로 유학을 시킨다라는 단편적이고 이분법적인 세간의 발상에는 필자도 분명히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자녀가 열렬히 원하고 그것을 부모님이 어떻게든 뒷받침할 경제적 능력이 된다라면, 필자는 미국으로의 조기 유학을 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누가 뭐라고 해도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는 양질의 교육을 받은
인재가 국가적 경쟁력을 키우는 주축이자 동량이며, 개인적으로도 흔히 말하는 성공의 지름길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필자가 미국으로의 조기 유학을 결국 각자의 선택이라고 생각하거나 감히 말하게 되는 이유는, 한국의 대다수 일선 고등학교들의 획일적이고 평준화된 교육으로는, 세계적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보유한 미국의 명문 대학으로 진학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미국의 명문 대학들은 학업 성적만으로 학생들을 선발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부모님이 확실한 비전과 교육 플랜을 가지고 계시고, 또한 자식들도 그것을 강력하게 원한다면, 그래서 자기 자식들을 미국 명문 대학에 보내려고 한다면, 미리 사전 준비를 충실하게 해야만 합니다.


  미국의 공립학교 중 제대로 된 학교가 있는 지역은 비교적 경제 사정이 좋은 사람들이 사는 곳이기에, 부동산 가격이 타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으며, 사립학교는 매일 등하교를 하는 데이 스쿨(Day School)과 기숙사가 딸려서 아예 학교에서 생활을 하는 보딩 스쿨(Boarding School)로 나누어지는데, 

  기숙사가 딸린 보딩 스쿨에 비해 비용이 상당히 저렴한 데이 스쿨을 다닌다면, 미국 현지에 친척이나 부모님중 한분(주로 어머님)이 옆에서 학생을 돌보고 공부나 기타 특수 활동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기숙사가 딸린 보딩 스쿨을 들어 갔다고 해도 학교와 가까운 장소에 부모님이 계신 것이 현지의 정보를 수시로 입수하거나, 학생이나 부모님이 목표로 하는 명문 대학에 사전 답사를 한다던가 혹은 사립학교내 전담 교사와의 커뮤니케이션이 보다 용이하기 때문이며, 또한 해당 학생에게도 부모님이 가까이에 계시다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정서적으로 큰 안정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학생 자신이 열렬히 원하고 부모가 그런 자식의 열정을 뒷받침할 능력이 된다면, 기러기 아빠든 조기 유학이든 시도하는 것이 결코 나쁘지만은 않다라고 필자는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입장인데...,


  다시 한번 말하지만, 한국의 대부분의 대학들은 해당 포스팅이 언급한 것처럼 경쟁력이 대단히 낮으며, 이런 망국적인 풍토는 고교 평준화 정책으로 인해 획일적인 기준으로 학생들을 선발하면서, 미국처럼 매년 순위가 학교의 연구 성과나 학생들의 학업 성취 정도에 따라 수시로 변동하는 것이 아닌, 이른바 학교 서열화만 더욱 공고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 아주 자연스럽게도, 대학교를 매우 나태하고 안이하게 운영하는 부분과 맞물려지면서, 근본적으로 개선이 될 가능성이 그다지 많거나 희망적이라고 보여지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3. 미국의 일반 주립대나 사립대로 입학하는 것은 비교적 쉽다라는 말도 어폐가 많습니다. 기본적으로 SAT뿐만 아니라 학생의 적성이나 비전등을 고려하고, 영어를 어느 정도 수준으로 구사하는지에 따라 입학 조건이나 사정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입니다.

   가령 UCLA의 경우만 해도, 한국에서 조기 유학을 온 학생이나 현지 교민의 자녀들이 바로 입학하기가 결코 쉽지 않은 형편이라서, 2년제로 운영되는 커뮤니티 컬리지에서 학업을 끝마친 뒤에, 3학년으로 편입하는 사례를 필자는 주변에서 흔히 보곤 하는데, 그런 현지 실정은 해당 포스팅 작성자는 전혀 모르고 있더군요...


4. 미국의 중고등 교육 학비는 한국과 별 차이가 없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의무 교육입니다. 

  
따라서, 미국인들은 자신이 내는 세금 속에 교육비가 이미 포함되어 있다라고 생각하며, 자연히 한국보다 공교육의 비용은 확실히 저렴하기에, 한국에서 사교육에 들이는 비용으로 차라리 미국에 조기 유학을 시켜 미국 현지에서 명문 대학까지 보내야겠다라는 사람들이 자꾸 생기는 것입니다.


  물론 미국의 공립학교도 지역에 따라 수준이 천차만별이니, 사전에 충분한 정보 습득으로 치밀한 계획을 수립하고 난 후에 조기 유학을 보내야겠지요.


5. 미국의 학교에서 인종 차별을 하고 왕따를 시킨다라는 말도 상당히 과장되었습니다. 미국은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암살된 이후부터 눈에 드러나는 인종 차별적인 요소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 왔습니다. 그 결과, 사회 전반적으로 인종 차별이 여전히 문제이고 논란이 뜨겁기는지만, 공공 장소에서, 특히 학교같은 곳에서의 왕따나 따돌림이 알려지면, 전담 교사와의 상담이나 즉각적인 교육 행정 당국의 시정 조치를 받게 되어 있는데,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것입니까? 


  학생의 성격이나 가치관이 소극적이거나 내성적이라서 평소에도 말을 잘 안하고 매사에 부정적이며, 그래서 미국 학생들과 스스럼없이 지내지 못하면, 어린 학생들의 특징답게 해당 학생을 소외시키고 말을 걸지 않게 되는 것은 세상 어디에서나 인지상정이 아니던가요?

  해당 포스팅의 작성자는 과거 미국에서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따돌림을 받는 학생들을 몇몇 본 모양인데, 그렇지 않고 적극적이고 주체적으로 미국애들에게 먼저 다가가서 친구가 되고 인기짱인 학생들도 아주 많답니다.


  그리고, 그렇게 긍정적이고 쾌활한 성격과 패기와 열정을 가진 젊은이나 학생들을 미국의 공교육 체계는 적극 지원하고 강력하게 원하지 않습니까? 당연히, 전인교육이라는 미명아래 수행되는 한국의 지루하고 타이트하기 이를데 없는 획일화된 수업에서는 별다른 빛을 보지 못하였었던, 진짜 개성만점의 학생들이 미국에 와서 학업 성적이 크게 오르는 경우도 자주 보게 되고, 이미 오래 전부터 교육열에 불타서 자기 자식들을 마치 한국의 대학입시체제를 준비하는 것처럼 키워왔던 1세대 교민들의 유난스러운(?!) 노력들이 있었기에, 미국 명문 대학에 진학하는 한국 학생의 비율이 갈수록 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결론: 조기 유학, 결국 각자의 선택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이유
1. 결론적으로 말해서, 필자는 누구처럼 미국으로 조기 유학을 보내지 말라고 감히 단언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미국의 대학들은 해당 포스팅에서도 말하듯이 한국의 대학들보다 경쟁력이 월등하며, 그런 미국의 명문 대학에 입학하려면 사전에 준비가 반드시 필요한데, 한국의 대다수 중고교에서는 그런 준비를 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미국의 공립이나 사립학교로 조기 유학을 보낼 수 밖에 없는 실정이기 때문입니다.

  단, 부모님들의 막연한 바램과 지나친 기대치로 인해 학생 본인이 전혀 원하지도 않고, 성격적으로나 정서적으로도 극히 내성적인 친구들인 경우에는, 가급적 미국으로의 조기 유학은 피하게 하는 것이 좋다라고 생각할 따름입니다.

2. 자녀의 우물안 개구리적 시각을 교정하기 위해 여행을 보낼 요량이라면, 차라리 계획을 좀더 확장해서 워킹 홀리데이를 시키거나 혹은 1~2년의 비교적 장기간에 해당하는 어학 연수를 보내시길 권하는 바입니다.

 
혹자는 한국에서도 열심히 노력하면 굳이 미국에 오지 않아도 남부럽지 않은 영어를 구사하거나 배운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극히 제한된 영역에서 영어를 배우고 익히는 것이기에, 그렇게 빨리 영어가 늘지도 않고 통상 공부를 하는 분위기처럼 느껴져서 지루하고 따분하기 이를데 없다라는 얘기가 자주 나오며, 중도에 영어를 포기하는 친구들이 상당하기 때문입니다. 비단, 미국이 아니더라도 필리핀같이 저렴한 물가를 가진 영어권 국가로 보내서 단 두달만이라도 어학 연수를 시키는 것은, 자녀의 영어 실력 향상이나 재미를 붙이는 측면에서, 여러모로 도움이 되면 되었지 결코 나쁘지 않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조기 어학 연수를 시킴으로써 미국 현지 분위기도 조금 알아 보거나 살펴보고, 학생 스스로가 나중에 미국 명문 대학으로의 진학을 결심하는, 아주 중요한 기준이나 계기가 될 수 있다라는 점을 생각하면 조기 유학을 무조건 반대하는 것도 상당히 문제가 있다고 판단합니다.

3. 미국과는 달리 한국은 민주주의적 가치를 너무 관념적으로 다루고, 그래서 자유나 평등이란 개념이나 사상이 진짜 대책없이 아무때나 발동을 하여서, 부자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전반적으로 그리 좋지 못하며, 지금의 사회 기득권층 또한 과거에 비리나 부정이 너무나도 많은 실정이다 보니, 양질의 교육을 위해 고교 평준화 정책을 무너뜨리고, 미국처럼 학비가 수천만원을 호가하는 사립학교나 이른바 특목고 체제를 정부가 도입하겠다고 관련 정책을 발표하면, 아마도 한바탕 큰 난리와 사회적 혼란이 생길 것이 자명합니다.

  또한, 공립학교를 미국식으로 운영해서 졸업생이나 대학 입학생을 5년동안 기준에 미달되게 배출하면, 해당 학교의 학생들 전원이 모두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간다거나, 혹은 학생들의 평균 성적이 좋지 않다고 판단되면 교장이나 교감이 바로 퇴출되고(Voucher), 대학에서도 학생들의 성적이 조금만 미달해도 학사경고를 주며, 그것이 1~2회 누적되면 바로 퇴교 조치를 시키거나 아예 졸업을 시키지 않는 무한 경쟁 체제로 가게 되면, 아마도 한국 사회에서는 더욱 사교육이 극성을 부리고 계층간 격차가 심화되면서, 사회 갈등과 혼란을 한층 더 키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학생들의 성적만을 위주로 경쟁을 시키고 이른바 자연도태를 꾀한다면, 지금같은 모순과 부조리를 가진 한국 사회에서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계층이 절대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이며,

  따라서, 사회 계층간 화합이나 사회적 대통합이 선행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한국의 교육은 그 앞날이나 장래가 실로 암울하다라고 필자는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측면에서, 보면 볼수록 참으로 흥미로운 것은, 해당 포스팅에서는 결론적으로 한국 공교육에 불평등과 차별의 요소를 도입하자고 주장하고 있는데, 과거에 평준화 정책을 고집하다가 교육의 질적 저하라는 모순과 화두에 봉착하여, 바로 그런 무한 경쟁 체제의 교육 정책을 시행하다가 피를 보는 나라가 바로 지금의 미국이며 공교육 체제라는 사실을 곰곰히 되짚어보면, 해당 포스팅이 아전인수와 극단적인 민족주의 국수주의의 결합이 낳은 매우 위험하고 선동적인 부류의 포스팅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는 점입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미국의 공립학교나 사립학교는 학생의 집안 사정에 따라서 너무나도 다른 교육과 프로그램이 운영되며, 그에 따라 결과도 천차만별인데, 그런 무한 경쟁 체제를 지금의 획일화되고 비효율적인 한국의 대학 입학 시스템과 사회내에 도입할 수나 있겠습니까? 

  그리고, 미국 공교육의 붕괴를 비판하고 한국의 전인교육(?!)을 극구 찬양하는 해당 포스팅이, 결론은 미국 교육이 지향하는 바를 따르겠다라는 얘기를 하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한국에서 지난 36년간을 머물며 파벌주의 학벌주의 연고주의, 그리고 집단주의에 완전히 질리고 지쳐서 미국행과 정착을 결심한 필자도, 막연한 환상과 동경만으로 미국 조기 유학을 결행하려는 부모님이나 학생들은 어떻게든 뜯어 말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평준화 교육과 대학 입시 체제는 필연적으로 서로 충돌하게 되어 있는 모순적 구조이며, 수능 성적이나 내신 등급같은 획일화된 잣대와 기준만으로 학생들을 선발하게 되면, 교육의 질적 저하라는 추세는 결코 피할 수 없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이런 비효율적이고 불합리한 평준화 교육 체제를, 해당 포스팅이 주장하듯이 불평등과 차별을 정당화하는 무한 경쟁 체제로 바꾸려고 시도한다면, 소위 계층간 위화감을 건드린다라는 국민적 여론의 거센 역풍을 받게 될 것이며, 정치적인 반대 세력들이 바로 민주주의적 원론인 평등을 전면에 내세우며, 사회적 갈등을 증폭시키고 정치적 공세를 취할 우려가 대단히 농후하지 않겠습니까?


  다시 말해서, 지금과 같은 평준화 정책과 입시 체제의 모순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무엇보다도 우선 학생 선발에 대한 기준부터 대학의 재량권에 모두 맡겨야만 하고, 일선 고등 학교도 특화 혹은 차별화시켜서 경쟁력을 강화해야만 하는데, 그런 조치들을 한국의 일반 국민들이나 민주 진보 성향을 가졌다고 자부하는 네티즌들이 순순히 용납을 할까요?...

  미국도 그렇지만, 특히 한국의 공교육 문제는 교육(영어 실력도 필수적으로 포함됩니다!)만의 문제가 아니며, 사회 제반 계층을 재정립하고 신분 이동을 가능케 만드는 거의 유일무이한 출구나 통로라는 점에서,

  우선, 사회적 대통합을 통해서 계층간에 불신과 위화감같은 망국적인 인식과 해묵은 감정부터 해소하고, 소위 부자와 빈자가 서로 화합하는 과정들을 병행하지 않는다면, 한국 공교육에서 희망을 보지 못하는 기러기 아빠들의 행렬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며, 무조건적인 조기 유학 반대나 찬성을 말하는 양쪽 모두의 주장은 그저 구호나 선동의 수준에 그치게 될 것이라는 말을 끝으로, 필자는 오늘의 포스팅을 이만 마치렵니다...

                                                                                                                  ※사진 출처: 구글 이미지
   
Posted by 네 오 NEO
시사 평론2009. 9. 15. 01:47
  요즈음 한국의 정치계에서는 정운찬 총리 내정자의 군 면제 여부와 논문 표절에 대해 말이 많은 모양이다. 또한, 문화 연예계에서는 2PM이라는 힙합 그룹의 맴버였던 박재범이란 재미교포 2세가 과거에 한국에 대해 비하(?!)를 했던 발언들을 가지고 크게 논란이 일더니만 결국 박재범은 미국으로 돌아 왔다.

  많은 사람들이 정운찬 총리 내정자의 군 면제나 논문 중복 게재와 관련해서 도덕성과 학자적 양심, 그리고 더 나아가서 한국 지식인 사회의 이중성을 비판하고 있으며, 2PM의 박재범에 대해서도 공인(?!)의 신분인 연예인으로써 신중하지 못한 발언을 한 것은 문제이며, 특히나 한국을 비하한 부분은 용납할 수 없다라는 입장을 보이는 분들이 여전히 많다. 그리고 박재범을 서둘러 미국으로 돌려보낸 JYP엔터테인먼트 CEO인 박진영에게도 너무 성급하고 안이한 결정이라는 둥 신뢰를 상실했다라는 둥 말들이 많은 모양새인데...

  오늘은 그래서 이런 부분들에 대한 조금은 다른 필자만의 경험과 견해를 몇 자 적어보려고 한다. 

왜 한국은 인사 청문회만 하면 문제가 생길까
  현정부 들어서 인사상의 결격 사유로 인해 중도 낙마한 인물들이 꽤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비단 현정부만이 아니라 노무현 참여정부 때에도 소위 코드 인사, 회전문 인사라는 말들은 정말로 많이 회자되었다. 지금 이 시각에도, 많은 이들이 현정부의 인사 난맥상을 두고 말들이 굉장히 많지만, 왜 한국은 인사청문회만 하면 멀쩡해보이던 인물들의 문제점이 속속 발견될까? 

  여러분들은 그 이유에 대해서 깊이 고민하거나 생각해보신 적이 있는가? 구체적으로 말해서 왜 정운찬 총리 내정자는 이제서야 자신이 가졌었던 여러 도덕상의 문제점들이 드러났을까? 지난 10년간의 민주화 정권 동안 끊임없는 러브콜을 받았었고 한때는 한나라당 후보에 대항할 대선 주자로까지 거론되었던 인물인데, 그간 한번도 정밀한 내사를 하지 않았다라는 말인가?  아니면, 10년간의 민주화 정권 기간동안에 이미 그의 개인적 치부(?!)를 알만큼 알고 있었는데도 감추고, 모두가 짐짓 모른 척 하다가 정운찬이 배신(?!)을 한 것 같자 이제서야 뒤늦게 폭로전에 들어간 것인가?

  개인적으로 판단하기엔, 10년이란 시간동안 숱한 러브콜을 보낸 이에 대한 정밀 검증이 전혀 없었다고 해도 문제이고, 이미 오래전에 알고 있었지만 자기 편이라는 생각에 침묵하고 있다가 변절을 하였다고 보이자 바로 치부를 드러내는 모습들도 가히 좋아 보이지 않지만,

  여기에서 필자가 하고 싶은 얘기는 차원이 조금 다르다...

내가 한국 사회를 떠나게 된 이유
  필자는 한국 사회에서는 학교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아주는 대학 중에 한 군데를 나왔다. 게다가, 중학교에 진학할 당시 교복 자율화가 실시되어 소위 말하는 교복 자율화 원년 세대가 되었으며, 필자가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여러 폐단이 드러나 다시 일선 중고등학교마다 교복으로 서서히 회귀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었지만, 어쨌거나 필자는 중고교 시절내내 교복을 입지 않고 학교 생활을 마쳤었다. 

  오늘의 포스팅을 작성하기 전에 한국의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지금은 교복값이 너무 비싸서 다시 교복 자율화로 가야 한다라는 목소리들이 나오고 있는 모양이지만, 필자가 중고등학교를 다닐 당시만 해도, 사복값이 훨씬 더 비싸서 옷차림만 보아도 그 학생이 사는 집안이 얼마나 사는 집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또한, 학교 급식이 없었던 관계로 인해 도시락 반찬만 살펴 보아도, 역시 집안 살림이 어느 정도인지를 확인할 수 있는 그런 시절이었다. 

  전에도 포스팅 속에서 간간히 언급했지만, 필자는 어린 시절 그리 넉넉치 못한 집안에서 자랐었기에, 학교에 가면, 늘 주변 친구들의 근사한 브랜드와 메이커가 찍힌 사복 옷차림이 내심 부러웠으며 도시락을 먹을 때에도 늘 꺼림칙한 마음이 있었는데, 고등학교를 들어가면서 그 정도는 더욱 심해졌다...
 

  그래도, 당시 필자는 굳게 믿었었다. 저 친구들이 대단한 것이 아니라 능력있는 부모님들 덕분에, 좀더 유리한 조건에서 게임을 시작한 것일뿐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필자는 언제 어디에 가더라도 최선을 다해 임하고 반드시 성공할 것이며, 그렇게 성공하더라도 그 친구들이나 그들의 부모님들보다는 훨씬 정직하고 똑바르게 살아갈 것이라고 굳게 다짐했었다.

  그 시절엔 필자도, 지금 이 시각, 인터넷에서 민주주의와 원칙을 얘기하며 현정부를 성토하는 10~20대 그리고 30대 초반의 젊은 친구들처럼, 아주 단순하고 이분법적으로 딱 부러지게 세상의 부조리와 가진 자들의 특권의식과 이중성에 대해 크게 분노했었으며, 이런 모순과 그릇된 현실 상황은 반드시 바꾸어야만 한다라고 믿었다.

  하지만, 군대를 가고 제대한 후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하는 와중에서 이상과 원칙대로만 되지 않고, 흑백논리나 이분법으로 딱 떨어지거나 확연히 구분되지 않는 극히 애매모호한(?!) 현실이 있음을 분명하게 깨달았다... 

  한국 사회는 군대에 대해서 참으로 말들이 많지만, 필자가 경험했던 군대는 한국 사회라는 공간에서의 생활 방식과 마인드를 익히는 기본이자 기초를 전수하는 곳,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었다...

  ...그러니까 이게 무슨 말이냐면, 사회에 진출해서 원칙과 소신 혹은 양심대로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요령과 눈치보기 그리고 강한 자에게 무조건 굴복하고 아첨하는 방법을 배우는 곳이었다라는 말이다. 실제로 군대는 상사가 정말로 부당한 명령을 해도 항명하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설령, 그것이 잘못된 지시나 명령임을 알아도 일단 상관의 지시는 수행해야만 하며,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임무를 완수해야 자신의 일신상에 별다른 해가 없기에, 자연스럽게 조직의 규율과 명령 체계에 따라 움직이는 기계처럼 변하게 되기 마련이었다. 


  군대를 다녀오신 분들은 잘 알겠지만, 군대에서는 소위 FM이나 AM라는 단어를 종종 사용한다. 여기에서 FM은 그야말로 원칙과 교본대로 움직이는 것이고, AM은 원칙은 분명히 있는데 그것을 지키지 않고 상황에 따라 요령있게 대응하거나, 변칙적인 모습으로 일신상의 안위를 도모하거나 어려운 상황을 모면하는 것을 지칭함은 여러분들도 잘 알고 계실 것이다...그리고, 군생활을 해보면 거의 대부분의 군인은 절대 FM대로 생활을 하지 않음을 금방 깨닫게 된다. 

  예를 들어, 군수 물품 현황을 조사한다라는 말이 나오면 옆 중대나 대대의 물건까지도 몰래 훔쳐다가 숫자나 규격을 맞추어야만 하고, 이런 식으로 과정이야 어찌되었든간에 결과만 나오면 만사OK인 곳이 바로 군대였다. 한마디로 요령과 눈치, 그리고 조직에서의 역할 분담에 익숙해지는 마인드를 익히는 정도가 군대에서 배운다는 것들의 대부분을 차지한다라는 것은 군대를 경험하신 분들은 대부분 동의하실 것인데, 문제는 군대 못지 않게 사회도 사람을 옥죄는 면이 있더라는 거다... 

  군대를 제대하고 대학을 졸업한 후,
필자가 취직했던 회사는 한국 사회에서 흔히 말하는 대기업이었다. 그러다보니 회사에 납품이나 계약을 하는 중소 하청업체들도 상당했고, 이른바 줄(?!)을 대려는 이들도 굉장히 많았다. 자연히 접대 문화란 것이 있었고, 그것을 은근히 바라는(?!) 동료 직원들도 꽤 많이 보았다. 필자는 기본 성정상으로나 어린 시절부터의 마인드가 그렇지 못해서인지 몰라도, 그런 접대 문화란 것에 심정적인 거부감이 있었고 그런 자리에는 별로 가고 싶지 않았지만, 사회 생활을 하다가 보면 그런 자리에 가지 않을 수 없는 일들이 종종 생겼다. 

  또한, 필자가 여러모로 따져보고 판단하기엔, 회사에 분명히 도움이 될만한 비판이나 제안을 하고 싶어도 직속 상사나 부처내 다른 동료들과 의견이 맞지 않으면, 일단 필자 일신상의 자리 보전을 위해서, 그리고 상사나 동료들과의 불협화음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스스로가 알아서 눈치껏(!!!) 요령껏(!!!) 뜻을 접어야 하는 경우가 너무 많았다. 또한, 설령 그런 제안이 받아들여져도 필자의 의견이 아닌 직속 상사나 더 높은 직급을 가진 임원의 제안(?!)으로 둔갑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회사가 운영하는 연구소를 둘러 보거나 외국에 출장을 다녀 보면서, 한국의 대학교 시설 전반이 매우 부실하고 지식인 사회를 대표한다는 기성 교수들도 미국이나 유럽의 대학 교수들만큼 학업이나 연구에 깊이 몰두하지 않으며 논문을 쓰지 않았다라는 불편한(?!) 진실을 직접 보거나 듣고 새삼 확인했다. 

  대학 학창 시절엔, 민주주의와 혁명, 체 게바라를 논하던 선배나 친구들이, 하나둘 연애를 하고 결혼을 생각하게 될 무렵에는 서로간의 집안이나 여건을 따지지 않을 수 없게 되고, 결혼 후 자식을 낳더니 조기 유학이네, 원어민 영어강사를 둔 유치원에 아이를 보낸다느니 마느니하는 얘기들을 주고 받는 것을 들으며, 더더욱 가슴 한켠이 답답함을 느껴야만 했다. 어디 집값이 얼마가 올랐냐느니 연봉이 얼마나 되느냐는 둥 하는 얘기들이 모임의 주요 화제가 되었으며, 만나는 사람의 직업이나 가정 환경, 배경등에 더 관심이 가는 분위기에 점차 휩쓸리는 내 자신을 발견하고 소리없이 절망하며 가슴이 아팠었다. 

  주변의 여건이나 학력의 정도가 아닌 진실로 그 사람의 인격과 품성 하나만을 보고 만나거나 사귀고 싶고, 그런 마인드를 가진 여자와 깊이 사랑하여 결혼하고 싶었으며, 그런 여자의 배를 통해 귀여운 자식을 낳아 무슨 조기 영어다 과외다 하는 것들은 다 물리치고, 오로지 인간다움과 바르게 사는 법만을 가르쳐 주고 싶어도, 이런 천하에 없는 바보 멍청이라는 소리나 현실을 전혀 모르는 이상주의자라는 말을 듣기가 십상이었다.

  정말로 생각할수록 답답한 것은, 필자가 내심 품고 있던 이런 말들을 아주 솔직하고 마음 편하게 털어놓을 수 있었던 사람은 가족들이나 매우 친한 친구 몇몇이 유일했다. 그리고, 필자를 정말 잘 아는 그들은 한결같이 필자의 생각에 십분 동감하면서도, 현실 속에서 정말 그렇게 살다가는 제 명에 죽지도 못하며 가족도 친구도 모두 잃게 될 것이라고 했고, 현실을 변혁시킬 힘과 의지를 이미 상실한 더러운 한국의 정치판에 대해서도 일체의 관심을 끊으라는 충고도 숱하게 들었었다. 

  한마디로, 필자처럼 평범하고 열심히 노력해서 살아야 하다라는 마인드를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원칙과 소신 양심 상식대로 살고 싶어도, 주변의 상황이나 여건상 그렇게 살 수 없게끔 만드는 일들이 속출하는 사회가 바로 한국 사회라는 말을 친구나 가족들은 진심으로(!!!) 필자 걱정을 하며 자주 들려 주었다라는 말이다. 그리고, 필자는 그들의 말을 가만히 들으며, 이건 마치 흙탕물 속에 티끌 한점없는 새하얀 면 소재의 옷을 입고 들어가면서 옷이 조금도 더러워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절망적인 생각이 들곤 했다.


  그러면서, 민주주의와 드높은 이상이라든가 순수한 원칙들은 구호나 투쟁, 시스템의 개선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사람들 각자의 의식 변화가 반드시(!!!) 수반되지 않으면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라는 것을 똑똑히 느꼈고 깨달았다.

   다시 말해서, 이른바 개혁이나 혁명이 번번히 실패하는 이유는 민주주의라는 이상이나 원칙의 하자보다는 기존에 사회를 지배하던 의식과 패러다임을 사람들이 좋아하고 추종하며, 그 이면에 자리잡은 지극히 소박하고 평범한 인간적 욕망들이 알게 모르게 그것들을 더욱더 공고하게 만들기 때문임을 분명히 깨달았다라는 말이다...
 

  바로 그래서, 필자는 한국 사회를 떠나 미국에 오기로 마음을 정했던 것이다. 도저히 지금의 한국 사회내에서는 내 자신 하나만 잘한다고 해서 아무런 흠집도 결격 사유도 없이 사회 생활을 영위할 수도 없고, 또한 필자와 같은 마인드로 가족들에게 풍족하고 넉넉한 물질적 정신적인 건사를 하면서,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인생의 최종 목표와 흔히 말하는 성공적인(?!) 사회적 위치에까지 오를 가능성이 너무 희박하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김병준과 정운찬, 한국 사회의 모순과 문제에 대한 해법은 없는 소모적인 도덕성 추구가 낳은 시대의 상징
  필자의 과거 개인사는 이쯤에서 그만 접고 이제 본격적인 얘기를 시작해야겠다. 정운찬 총리 내정자의 인사상 결격 사유가 무엇인가? 나이 제한으로 받은 군대 면제와 논문 이중 게재 문제가 가장 크다고 했던가? 거기에다가 무슨 부인의 위장 전입 문제까지 새로 거론되던데, 한번 생각들을 곰곰히 해 보시길 바란다.

  지금의 한국 사회내에서, 과거 70~80년대에 교수를 하였다는 이들 중에 미국이나 유럽 대학의 교수들처럼 논문을 원칙대로 철저하게 쓰고 연구와 학업에 미치도록 전념한 이가 과연 몇명이나 될까?...또한, 70~80년대에 미국 유학 등으로 나이를 넘겨 군대 면제를 받고도 한국에 돌아와 교수 직함을 받은 사례가 정운찬 한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얘기일까? 그리고 지금이야 세계화 시대이고 인터넷이나 정보망이 워낙에 발달해서, 누가 무슨 논문을 게재했으며,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금방 확인이 되며, 그것을 한국말로 번역, 해석할만한 인재들도 상당히 많아졌지만, 70~80년대...아니 90년대 초중반까지도 그렇지 못했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한국 사회 구성원들인 여러분들이 더 잘 알고 계실 거다.

  바로 그래서, 노무현 참여정부 시절에 소위 왕의 남자로 불렸었던 김병준이 교육부총리로 내정되었다가 논문 표절로 인해 낙마를 했었다. 문제는 김병준이 논문을 작성하던 시절의 한국 사회, 좀더 좁혀서 교수 사회에서는 그런 그릇된 관행(?!)이 매우 팽배했었다라는 말이다.

  하지만, 더욱 큰 문제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는 사뭇 다르게, 노무현 전 대통령은 과거 한국에서의 필자처럼, 그런 과거나 현실을 유난스럽게 인정하지 않았으며, 현실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던 일...바로 모순과 부조리로 점철된 한국 사회내에서 자신만은 한점 부끄럼이 없는 사람인 것처럼 살겠다고 밝히다 보니, 수구 기득권 세력인 한나라당으로부터 소위 도덕성이라는 부분에서 흠집을 내고 공격을 받는 일들이 잦아지기 시작했으며, 바로 이것이 한국 국회가 벌이는 인사 청문회의 성격과 방향을 지금처럼 굳힌 결정적 계기였다라고 필자는 판단한다.

  필자가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실망하고 강력하게 비판하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지만, 그 누구도 단지 5년만에 이미 잘못된 관행과 시스템으로 수십년간을 지나오면서 형성된 한국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힘과 비전은 없다라는 사실을, 집권 초반기부터 어느정도 인정하고 자신의 지지자들에게도 그 점을 깊이 숙지시키려고 노력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역학 관계와 이분법에 기초해서 한국 현대사를 바라보게 만들고 반드시 척결해야 할 적과 아군이라는 개념만을 심어준 것도 매우 큰 사유중에 하나이다.

  예를 들어, 대선 비자금 문제로 측근인 안희정이 대신 옥살이를 살았지만, 사실 감옥에 가야 할 이는 노무현 전 대통령 자신이었다. 혹자는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받은 천문학적 액수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강변하겠지만, 소위 노무현식 도덕성 수준으로 따지자면, 분명 엄한 처벌과 자기 책임이 따르는 일이었다. 그런데, 노무현은 자신이 대통령이 되었다라는 이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최측근인 안희정을 대신 감옥에 보냈었다...

  필자가 여기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대선 비자금을 굳이 거론한 이유는, 한마디로 이상과 현실이 일치하지 않을 때에는 부조리한 현실을 일단 인정하고, 이상에 좀더 가까운 해법...즉 정치 비자금이 없이 선거를 할 수 없었던 당시 현실은 인정하되, 추후로는 검은 돈이 없는 선거 풍토를 조성하는 방법을 모색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한국 사회의 현실이자 한계라는 말을 하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바로 이런 측면에서, 친일파가 정말 문제라고 하지만 이미 그들이 대한민국을 건국했으며, 그런 일들을 벌인 장본인들은 이 세상에 한명도 남아있지 않은 상황이라면, 역사적인 평가를 제대로 내리는 작업만도 엄청나게 버겁다라는 현실 인식으로 역사 바로 세우기를 추진해야 했는데, 이제와서 그것을 모두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너무 큰 기대감과 바람을 불어 넣었다가 실망감을 주었으며, 또한 세계 최강 미국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길이 현실적으로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한국도 이제는 완전한 자주 독립 국가의 위치를 확보할만큼 국가적 국민적 역량이 커졌다라고 주장하면서, 자칫 잘못되거나 감정적으로 흐를 수 있는 민족주의와 국가주의 코드를 자극하고 강화한 책임이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일정부분 있다라는 말이다.

  필자가 노무현 참여정부의 한미FTA를 그토록 반대하였던 이유도, 이미 시대의 대세가 된 세계화나 신자유주의를 대변하는 한미FTA 자체가 아니라, 신자유주의가 불러들인 사회적 양극화 심화나 막대한 피해가 예상되는 농어촌에 대한 아무런 준비나 대책, 그리고 국민적인 토론, 공감은 하나도 없이 그저 우리 국민은 위대하고 할 수 있다라는 70년대 새마을 운동식 얘기를 하며, 구시대의 유물인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를 강조하고 자극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이미지 정치가 정말로 싫었기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참여정부 시절, 누군가를 국가에서 크게 쓰고 싶어도 한국 지식인 사회의 오랜 관행과 구태에 물들지 않으면서도 경륜과 그 분야의 전문성을 두루 갖춘 인물을 구할 수 없다라는 불편한 진실도 혼쾌히 수긍하고 인정을 해야만 했는데, 그것을 하지 않고 짐짓 자신이 거느리거나 쓰려는 인물들은 모두 수구 보수 세력들보다는 그래도 도덕적으로 깨끗하며 흠이 없다라는 사실만을 강조하려다 보니, 정치적 반대 세력인 한나라당이 노무현 참여정부를 공격하는 방법도 말 그대로 도덕성이었고, 그것을 변호하는 방법이나 기준도 또한 도덕성이 되면서, 한국 사회 전반이 소모적인 당위성과 도덕성 추구로 날을 새우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소위 노무현식 도덕성 기준과 그것을 공격하기 위해 한나라당이 확립한...지금에 이르러서는 소위 도끼로 제 발등을 찍게 만든 격인 인사 시스템 기준을 모두 충족하고 국가를 효율적으로 이끌 국무총리 수준의 인재는, 감히 장담하건데 지금의 한국 사회내에는 없다라고 필자는 생각하며,

  바로 그래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임기말에 뜬금없이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제안한 것이라고 필자는 감히 판단한다. 도저히 노무현 전 대통령 자신의 주장이나 이상대로 되지 않는 현실을 정권 후반기에서야 어느정도 인정한 것이 대연정 제안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참여정부 집권 초반부터 자신은 역사적인 정통성을 확보하고 도덕적으로 깨끗하다면서, 한나라당과 수구 세력과의 차별성과 정통성을 크게 부각시키면서 지내오다가, 집권 후반기에 이르러 갑자기 그런 제안을 하면 진정성이나 의도는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크게 의심을 받을 수 밖에 없었고 여론의 역풍을 맞게 되는 것도 필연이었다는 부분이다. 또한, 한나라당이 노무현 참여정부의 실정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겠다고 정치적 꼼수를 부리면서 대연정을 일언지하에 거부했다고 해도, 한국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한 현실을 깊이 고민하며, 갈등과 분열을 통합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장기적 안목과 진정성을 담보한 대연정 제안이었다라면, 참정포럼에서 이른바 노스트라다무현(?!)의 모습을 과시하시며 한나라당을 적대시하고 조롱하면서, 그나마 남은 지지자들을 독려하거나 달랠 수 없었던 것이라고 필자는 판단한다.

  그리고, 이런 노무현식 도덕성 고수와 그걸 바탕으로 상대를 흠집내려는 행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지금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인데, 속된 말로 지금도 계속해서 이딴 식으로 소모적인 공방을 벌이며 날을 세울 요량이라면, 아예 이 참에, 스포츠나 연예계에서처럼 미국이나 유럽의 유명한 관료나 교수들을 아주 높은 연봉으로 초빙해서 총리나 장관을 시키기를 대대적으로 공론화하자라는 건의를 드리고 싶은 것이 필자의 솔직한 심정이다.

  여야 그리고 사회 구성원들 모두가 한국 사회의 과거와 현실에 대해 도무지 솔직하지 못하며, 제각각 당리당략과 잇속, 안이한 현실 인식 때문에, 불편한 사회적 진실들은 싸그리 외면한체 그럴싸한 구호와 명분으로써 상대 진영을 공격하고 원칙이나 원론를 제기하는 방식을 계속 시험할만큼, 한국의 지금 상황이나 여건이 국내외적으로 그렇게 여유롭고 한가한 줄 아는가?...


  다시 한번 물어보는데, 왜 김병준이나 정운찬은 논문 표절이나 논문 이중 게재를 했을까? 특별히 이들이 당시의 다른 교수들보다도 도덕성이나 개인적 자질이 더 낮아서였나? 왜 김병준은 위장 전입을 해서 그토록 말썽을 일으켰을까? 바로 자기 자식들만큼은 좀더 좋은 교육, 좋은 환경을 제공하는 외고에 보내려는 소박한(?!) 부모님의 마음에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지금 위장전입 의혹이 나오기 시작한 정운찬 총리 내정자의 경우도 결과는 아직 모르겠지만, 아마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은데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정말 솔직히 말해서, 돈이 없어서 혹은 능력이 없어서 못하는 것이지, 대다수 사회 구성원 모두가 여건만 된다면 속된 말로 위장전입이라도(!!!) 시켜서, 자기 자식들 공부만은 제대로 시키겠다라는 정도의 광적인(?!) 교육열로 무장된 사회가 바로 지금의 한국이 아니던가?...


  그리고, 그렇게 도덕성을 따지고 인사의 난맥상(특히, 이기준 교육 부총리 내정자에 대해서!)에 대해 말이 왔다갔다하셨던 노무현 전 대통령은 왜 자기 자식들은 미국으로 유학을 보냈을까? 그리고, 그 와중에서 누군가로부터 돈을 받아 집을 사주고 유학 비용을 대었다라는 의혹에 사로잡혔을까? 또한, 사람들은 왜 그런 의혹들에 귀를 쫑긋 세웠을까?

   다시 말하지만, 대선 후보 시절 반미좀 하면 어떠냐라고 사뭇 기개있게 설파했고, 자신은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는 미국이란 나라에 한번도 오지 않았었다라고 말하시던 선비같았던 분이 왜 자기 자식들은 미국에 유학을 보내셨을까? 그것도 친구 돈이든 아니면 뇌물성 돈이든간에, 왜 그런 일들이 사람들에게 의혹을 사고 그토록 말들이 많았을까?

  노무현 전 대통령이 그랬던 이유는, 바로 과거 고등학교 시절, 어린 필자가 그토록 부러워했었던 친구의 부모님들처럼, 누구나 자기 자식을 세계의 중심국가인 미국에 유학을 보내서 공부시키고 싶고, 일반 서민들은 감히 꿈도 꾸지 못할만큼의 결코 만만치 않은 유학비용 일체를 대주면서, 자식들 공부 잘 시켜서 한국 사회에서 남들 못지 않게(!!!) 떵떵거리고(!!!) 잘 살게 하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그리고, 바로 그런 의식과 사고가 일반 국민들과 한국 사회내에 광범위하게 팽배해 있는데, 자기 스스로가 그런 모습을 보임으로써 속된 말로 노무현도 별 수 없는 속물이나 위선자였나라는 생각들이나 인식을 한순간이나마 갖게끔 만들면서, 뭐가 그렇게 특별하고 도덕적으로(!!!) 세상에 둘도 없는 성인군자마냥 깨끗하다고 늘상 항변을 하였느냐는 얘기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필자도 한국 사회의 오랜 관행과 부조리는 정말로 싫어한다, 그리고, 도덕적인 문제가 있는 인물들의 기용은 어떻게든 피해야 한다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의 한국 사회와 지식인들의 면면을 생각해보면, 이런 원칙이나 바램은 한낱 꿈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라는 냉정하고 비관적인 판단을 하게 된다.

  그렇다고, 그런 관행이나 구태에 전혀 물들지 않은 참신한 인물들을 쓰기엔, 현실적으로 아직은 나이가 너무 어리거나 경륜이 모자라니 각 부처나 조직의 령이나 체계도 서지 않을 것이며, 그렇다고 학력이 높은 교수나 전문가 출신이 아닌 재야 인사나 일반인들 중에서 인재를 선별할 기준이나 구체적 방법이 전혀 없고, 능력은 검증이 되지 않아 모르겠지만 도덕성만은 매우 좋은 인물들로만 내각을 채우는 것도 그리 반기거나 신뢰하지 않을 것이 너무도 분명한 현 사회 분위기나 상황에서, 도덕성만을 따지고 자빠뜨리는 지금의 형국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만 할까?

  다시 말하지만, 분명히 과거에 잘못된 관행과 모순들은 점차 해결해야 한다라는 대원칙에는 필자도 100% 동감한다. 그리고, 도덕성이나 기본적인 공직자로써의 자질을 검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라는 점에도 역시 100% 동의한다. 하지만, 도덕성만을 따져서 촉망받는 인사들을 줄줄히 낙마시키는 것만이, 다른 나라가 아닌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과연 최선의 길인지는, 솔직히 말해서 매우 회의적이고 의심스럽다. 

  한국 사회의 근본적인 부조리나 과거의 그릇된 관행은 이미 존재하며, 그런 속에서 각자의 목표와 개인적 영달을 도모한 소위 도덕적인 흠집과 결격사유가 있는 지식인들이 차고 넘치는데도, 그걸 모두 부정하고 이런 식으로 정치 공세적인 인사 청문회를 진행하고 서로간에 앙금을 쌓는다면, 어떤 정치 세력이 다음 정권을 잡더라도 인사 난맥상은 여전할 것이라는 얘기이다!  

  노무현 참여정부 시절, 한나라당이 인사 청문회를 이용해 치졸한 정치 공세를 폈고, 코드인사라는 둥 회전문 인사라는 둥 해서 불필요한 잡음과 물의를 일으켰음은 알만한 이들은 다 아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제 민주당이나 진보 세력이 똑같은 방법을 쓰겠다고 벼르는 모습들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다라는 말이다!

  오히려 그러면 그럴수록, 시쳇말로 이 놈이나 저 놈이나 똑같다라는 정치 혐오증은 더욱 커지고, 필자와 같은 무당파는 계속 늘어날 것이며, 결국 기존에 기득권을 가진 특정 정치 세력이 계속해서 이길 것인데, 그렇게 상대를 공격할 참신한 방법이 없는가라는 답답하고 안타까운 심정에서 하는 얘기이다!!!

 
  2PM의 박재범 문제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필자는 절대로 동의하지 않지만, 연예인들이 무슨 사회를 대표하는 공인(?!)이랍시고 떡하니 허접한 명패 하나 걸어주고, 한국 사회가 그간 보였던 잘못된 관행과 구태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모두 지우려 하는지 도무지 이해를 못하겠다. 

  필자는 여기에서도 감히 제안하는데, 앞으로는 절대 미국이나 유럽 출신의 교포 자제들은 국내 연예계에 데뷔시키지도 말고 누구도 좋아하지 마시길 바란다. 또한, 해외파 연예인들을 그래도 쓰려면 그들의 과거 개인사를 샅샅히 조사하고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충성 서약이나 맹세도 반드시 시키기를 권한다. 마지막으로, 2PM의 박재범을 비난하는 분들은 한국에서 단 한발짝도 나가지 마시고 오직 국내에서만 한평생 머무르시길 부탁드린다. 왜냐하면, 그런 말을 하시는 분들이 홀로 미국이나 유럽에 가면, 과연 한국과는 너무 다른 그들의 이질적 문화에 금방 적응하고 전혀 불만이 없을까라는 의문 때문에 드리는 제안이다!

  박재범이란 친구가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 시민권을 가졌으니, 자신들이 모두 거쳤거나 가야만 하는 빌어먹을 군대도 면제받고, 미국이라는 중심국가에서 살고 있으니 한국같은 주변국가에 있는 자신들보다는 한결 기회도 많고 잘 먹고 살아갈 수 있는 여건이 있었던 것만으로도 내심 상당한 부러움과 함께 무의식적인 컴플렉스를 느꼈었는데,

  알고보니 과거에 그가 한국 사회에 대해서 비하하는 발언을 했다니, 가뜩이나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라는 이데올로기와 집단적인 감정 과잉에 물든 한국 사회라는 불난 집에 가스 밸브를 여는 것이나 마찬가지 상황이 되는 것은 안 봐도 비디오겠지...


  막말로 헛바람만 잔뜩 집어넣은 도덕성과 당위성이라는 패러다임에 기초해서, 일개 연예인들에게까지 사회를 선도할 공인으로써의 엄격한 자질과 도덕성을 운운하면 대다수 연예인들은 오래 살아남지 못하는 셈이니까...

  그래도 혹자는 사이버 공간은 이른바 열린 공간이라며, 박재범의 글에 분명 문제가 있었다고 지적하지만, 공사의 구분도 제대로 못하는 한국 사회가 인터넷의 공론장 기능은 원칙대로 간다라고 짐짓 억지를 부리고 현실을 철저하게 외면하는 꼴이 아닌가...


  개인주의적 마인드를 추구하는 필자가 보기엔, 박재범의 사적인 글을 멋대로 퍼다가 공개한 이를 강력히 비판하거나 엄중하게 제재를 가하고, 그런 행태를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라는 공론도 나와야 정상이 아닌가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런 측면에서 정말 부탁하는데, 그래도 그건 아니라며 누가 들어도 뻔한 원칙론과 당위론을 내세우며 박재범 비난의 정당성과 근거를 자꾸 대지 마시고, 모두가 자기 자신들에게 좀더 솔직해지시길 바란다!


  인터넷이라든가 무슨 웹 2.0 철학이 한국에서 처음 만들어졌나? 그거 전부 미국이나 유럽에서 나온 것들이 아닌가 말이다. 좀더 간단하게 말해서 원칙은 서구 유럽의 것인데, 그걸 과연 한국 사회가 그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현실에서 지키느냐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원론적으로 마이 스페이스나 페이스 북이 공적 영역이라고 주장하거나 생각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커뮤니티 사이트라고 말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필자가 아는 미국 친구들만 해도 서로간에 친분을 맺거나 개인적인 교분을 쌓기 위해, 마이 스페이스나 페이스 북에 가입하거나 이용을 하고, 거기엔 친구들끼리만 볼 수 있는 지극히 사적인 대화나 견해가 올라오며, 그런 내용들을 누군가가 몰래 퍼다가 공개적인 토론장이나 언론에 공개하겠다라는 마인드로 운영하지 않는 것이 미국이나 유럽인데, 그걸 이미 지키지 않는 한국 사회가 원칙만은 미국이나 유럽처럼 하겠다라고 말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도저히 도덕성과 능력을 겸비한 인물을 찾을 수 없는 한국 사회가 미국이나 유럽에 준하는 인사 기준으로써 사람을 뽑겠다라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말이며, 결국 도덕성과 당위성 추구를 서로간에 세력을 키우고 자신들의 이해 관계를 관철시키기 위한 목적으로써 쓰게 되면, 한낱 정치적인 공세나 마녀사냥을 위한 수단이나 빌미로 변질된다라는 얘기이다.


  또한, 블로그가 공론장이라는 주장을 하는 이들에게도 개인적으로 어이가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오프라인상에서 토론을 한다면, 과연 반대 의견을 표명한다고 하면서 비난 욕설이나 근거없는 인신 공격을 그렇게 당당히 할 수 있을까? 만약 그렇게 상대를 공격하는 이가 있다면, 사회자가 그런 몰지각한 이에게 발언권을 주겠는가? 만약 지금의 인터넷 게시판이나 블로그처럼 숫자나 세력에 의해서 오프라인상의 공개 토론이 진행되고, 어떤 발언이나 수단을 써서라도 상대를 제압하려는 이들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토론장이 아니라 조폭이나 양아치들의 싸움판이 아닐까!!!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처음부터 한국의 인터넷에서는 미국이나 유럽같은 공사의 구분이나 기본 원칙은 제대로 지켜진 적이 한번도 없었는데, 그런 부조리를 개선하자라는 구체적 대응들은 없이 왜 자꾸 존재하지도 않는 원칙과 당위성만을 강조하는지 도무지 이해를 못하겠다는 얘기이다. 이렇게 되면, 숫자가 많고 목소리가 큰 세력에 속하는 개인들만 블로그를 할 수 있고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다라는 말이 아닌가? 그리고, 거기에 반대하거나 비판을 가하는 소수의 사람들은 온갖 비난이나 욕설과 모욕도 감수해야 블로그를 할 수 있다라는 얘기인데...  

  그런 게 민주주의나 자유라고 주장한다면...민주주의나 자유라는 단어들...정말로 솔직하게 얘기해서 역겹고 더럽다!!!...


결론
  ...어쨌거나, 필자가 결론적으로 하고 싶은 말은 지금의 한국 사회는 도덕성을 빌미로 진영 흑백논리와 대중의 마녀사냥을 강화하고 부추기는 목소리를 더욱 키우는 조폭이나 판도라의 상자와 똑같다고 판단한다. 그리스 신화를 한토막 살펴보면, 판도라가 열었던 상자에서 세상의 온갖 고통, 재앙, 질병, 시름들이 쏟아졌으나, 마지막에 희망이라는 녀석이 나와서 그나마 인간이 세상을 살아갈만한 힘을 준다고 전하지만, 지금의 한국 사회라는 이름을 가진 판도라 상자에서는 온갖 고통과 부조리 모순들은 계속 튀어 나오면서도, 마지막 주자인 희망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 같아서 가슴 한켠이 답답해지며,

  이제는 모두가, 자기 자신들은 살아가면서 철두철미하게 지키지도 않는 그 어설프고 위선적인(!!!) 도덕성과 당위성으로, 과거나 현실과 관련하여 한국 사회의 오랜 관행이나 부조리를 일도양단식으로 재단하거나 혹은 단박에 뜯어 고치라고 하는 식의 감정적이고 아무 대책이 없는 집단주의적인 행태는 제발 자제하시고,

  또한, 2PM 박재범이 썼다는 글들이 정말 한국 비하인지, 아니면 한국 사회의 불편한 진실이나 현실을 아직 미성년자이고 철이 없었던 한 재미교포 2세가 상당히 과격하게 언급한 것인지를, 그리고 여러분 자신들은 그런 모순과 부조리로 점철된 한국 사회를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인정하며, 그것을 바꾸는데에 어느 정도로 일조하거나, 어떻게 하루하루의 귀중한 시간을 보내며 살고 있는지에 대한 자기 반성과 성찰들을 하셔서, 판도라 상자의 마지막 주자였던 희망을 불러 내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너무나도 길어진 오늘의 포스팅을 이만 마치련다... 

   
  
Posted by 네 오 NEO
시사 평론2009. 9. 6. 02:01
  요즈음 한국의 뉴스를 살펴보자니,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이 현정부로부터 국무총리 지명을 받은 모양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 말들이 굉장많은 모양새입니다. 특히 민주당이나 친노 세력 그리고 진보 진영을 막론하고 모두가 그를 가리켜서 배신자나 변절자 혹은 기회주의자라는 얘기를 하고 있는 중인데요...


  필자는 정운찬 총리 지명 소식을 들으며 조금 다른 생각을 하게 되어서 몇 자 적어 보려고 합니다.

 권위주의, 흑백 논리에 물든 한국 사회, 그리고 메시아 대망론
  한국은 과거 유교 문화와 군사 문화에 기반하여 권위주의가 너무나도 만연된 그런 사회였습니다. 따라서, 권위에 도전하거나 그것을 비판하고 부정하는 이들은 어떤 식으로든 제재를 당하거나 제거해야 할 주적(?!)으로 간주되어 철저하게 소외되곤 하였지요.

  그러다가, 지난 10년간의 민주화 정권을 거치면서 과거의 권위주의나 구태를 거부하는 움직임이 활발해졌습니다. 그래서, 사회내 많은 영역에서 탈권위적이고 민주적인 모습들이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던 것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기존의 권위주의에 익숙한 사람들의 심성이나 의식이 그렇게 쉽게 바뀌지는 않는 것인지, 새로운 형태의 권위주의를 만들어 가는 모습이 보여져서, 필자는 개인적으로 심히 안타깝다고 생각할 때가 많았는데요...  그러니까 이게 무슨 말이냐면, 구태의연한 기존의 관행이나 모습들에는 대다수 국민들이 염증을 느끼고 반발을 하면서도, 속된 말로 누군가가 좀 뜨거나 잘 나간다 싶으면 거기에 편승하는 모습은 여전하다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런 태도를 가지다 보니 현재의 정치판이 환멸스럽고 근본적인 개혁이 실현되어야 한다라는 대전제에는 대부분 동감하면서도, 정작 자신들 스스로가 뭔가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카리스마적 능력을 가진 인물이 출현하기를 기다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1997년 IMF 외환위기 시절, 당시 민주당 후보였던 김대중이 소위 친북좌파라는 엄청나게 부정적인 이미지를 안고서도 대통령에 당선된 이유도 카리스마적인 인물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고, 그 다음 대의 대통령이 된 노무현에게서도 절대적인 카리스마와 개혁 의지에 대한 진정성을 느꼈었기에, 사람들이 그토록 열광한 것이 아닌가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또다시 절대적인 카리스마(?!)와 능력(?!)으로써 한국 경제를 과거 박정희 시절처럼 부활(?!)시킬 것이라고 믿어서 현재의 대통령을 선택한 것인데, 문제는 이런 형태의 지도자가 상황을 주도하거나 개선하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라고 보인다는 점입니다...

코미디 프로그램의 새로운 트렌드인 리얼 버라이어티 형식이 대변하는 시대적 흐름
  이 시점에서 얘기의 방향을 잠시 돌려서, 최근 한국 사회에 인기높은 연예 오락 프로그램들의 형태를 잠시 짚거나 논하고자 합니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의 연예 오락 프로그램은 한 명의 카리스마적인 개그맨이나 코미디언 혹은 기타 분야의 연예인이 나서서 자신의 특출한 개인기와 입담으로 진행하는 형식이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인가 이런 모습들은 점점 사라지고, 대신에 소위 리얼 버라이어티 토크 쇼라는 이름아래, 패널들이 각자의 개성을 추구하면서도 큰 틀에서는 하나의 목표를 지향하는 연예 오락 프로그램이 대세가 되었으며, 해당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메인 MC는 단지 출연하는 이들의 개성과 매력을 최대한 끌어 내거나 프로그램의 분위기에 동화되도록 하는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의 여부로써, 그 능력과 가치를 평가받는 시기가 되었다고 필자는 판단합니다.


  이것은 마치 한국 정치판에서 카리스마적인 인물이 끌고 나가던...다시 말해서, 주도형 리더쉽의 과거 정치 행태에서 벗어나, 점차 사회 각 계층의 이해 관계를 조정하고 통합시켜, 전체적으로는 한층 질적인 사회 발전을 도모하는 조정형 혹은 수평형 리더쉽의 시대로 넘어가는 것과 그 흐름을 같이 한다고 보여집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재임시절 그토록 강조하던 수평적 네트워크의 정치가 아닌가라고 필자는 개인적으로 판단하는데요...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노무현이 그런 리더쉽을 지향함으로써 발생한 공과를 따지기에 앞서, 이런 사회적 시대적 흐름이 점차 강해지고 가속화되다 보니, 중도 개혁이나 실용주의 노선이라는 말이 상투적으로 나올 수 밖에 없는 현실에 보다 집중하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과거 권위적인 군사독재 정권을 지나고 민주화 정부가 들어선 지난 10여년간 여야나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실용과 중도 개혁을 얘기하지 않은 정치 집단이나 그룹이 있었습니까?

  문제는 입으로는 모두가 중도와 실용을 강조하였지만, 그것을 현실로 보여준 이들이 없어서 정치에 대한 실망과 환멸을 더욱 키웠으며, 그럼으로써 또다른 한편으로 여전히 사람들의 가슴 속에 권위주의에 대한 미련이 남아서 카리스마적인 인물이 나오기를 바라는 혼란스런 상황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 바로 지금의 한국 사회 혹은 한국 정치라고 필자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측면에서 현정부가 탄생한 배경에는, 중도 실용을 강조하던 노무현 참여정부에 대한 염증 환멸로 인해, 권위주의의 잔재인 소위 메시아 대망론을 열망하던 다수의 국민들이 자리잡고 있었고, 또한 현정부가 보이는 구태의연한 정치 행태에 대해서 반발하는 이유도, 다름아닌 권위주의에 대한 부정이라는 이 지독한 아이러니를 깊이 고민하고 성찰하지 않는다면, 앞으로의 한국 사회에는 더 이상의 질적인 개선이나 발전은 없다라고 필자는 감히 주장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역설적인 상황에서,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의 국무총리 내정 소식이 들려 옵니다. 또한, 민주 진보 진영에서는 한결같이 그를 향해 가시돋친 비판과 함께, 부정적인 전망들을 쏟아내고 있다는 소식들도 보입니다. 

  이역만리 미국 땅에서 머무는 일개 블로거인 필자가 보기에도, 지금 이 시각 민주 진보 진영이 그러는 이유야 너무나 눈에 뻔히 보이지만, 잠시 언급을 하고 가려고 하는데요...

  정운찬이 과연 어떤 인물인가요? 한국 내에서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았고 미국에 유학와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 한국에 돌아가 그가 지금껏 보인 모습은 비록 사람들마다 평가가 엇갈리겠지만, 대체적 시각으로는 중도 실용 노선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겁니다.

  그래서, 김대중
국민의 정부 시절에도 그에게 한은 총재 자리를 맡기려고 했었고, 노무현 참여정부 시절에도 경제 각료에 포함시키려고 노력하였으며, 민주 진영을 대표하는 대선 후보로까지 거론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그 당시만 해도 정운찬에 대해서 민주 진보 진영이 얼마나 환영 일색에 후한 평가를 했었는지, 당시 상황을 기억하시는 분들은 다 알고 있는 얘기이지 않습니까? 또한, 그동안 현정부의 경제 정책 기조를 비판하였었고, 대운하에 대해서도 반대 입장을 표명하였기에, 지금에 이르러서 정운찬 총리라는 타이틀이 민주 진보 진영에게는 너무 낯설고 일종의 변절이나 배신에 가깝게 느껴지겠지요...

  솔직히 말해서, 필자도 개인적으로 정운찬의 최근 행보에 대해 지식인의 역할과 개인적 욕망간의 괴리가 어떤 것인지를 똑똑히 지켜보며 실망과 회의를 느끼는 입장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운찬을 맹비난하거나 인간 이하로 재단하고 평가하는 대응이나 반응은 정말 아니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일반 국민들이 보기엔 그동안 현정부를 강하게 비판하였던 명망이 있고, 민주 진보 진영에 가까워 보이던 인사가 현정부의 총리가 된다라는 것은, 그만큼 지금의 정부가 중도 실용 노선을 추구한다라는 강력한 신호로 보일 것이며,

  또한, 과거의 권위적인 리더쉽이 아닌 수평적 조정적 의미의 리더쉽을 추구한다라는 표면적 이미지를 
국민들에게 강력하게 심어줌으로써, 그간 쌓였던 여러 불만들...그리고 그로 인해 무의식적으로라도 형성된 반발심을 크게 누그러뜨릴 여지가 차고 넘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예상치 못한 돌발적(?!) 상황이 일어났다면, 즉각적인 비난과 냉소적 반응을 보이기보다는 일단 사세를 관망하고 조용히 지켜보는 것이, 전략적으로나 전술적으로도 더 효과가 있지 않을까라고 개인적으로 판단합니다. 

  한번 생각들을 해 보시길 바랍니다. 여러분들은 얼마전 한나라당이 통과시킨 미디어 법에 대해서 사람들이 반발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판단합니까? 진정 미디어 법이 부르게 될 폐해나 영향력 때문에 그랬다고 보시나요? 정말 그렇다면, 지금쯤은 벌써 작년의 촛불 집회를 능가할만한 국민적 관심과 저항이 뒤따라야만 하는데, 왜 이토록 조용할까요? 민주당은 왜 전면적인 장외 투쟁 노선을 접고 무조건적인 원내 복귀를 하게 되었을까요? 

  여기에는 여러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겠지만, 필자가 판단하기엔 국민들이 과거 권위주의 정부 시절에 보였던 날치기 통과에 대한 반발심과 염증이 크게 작용한 것이었지, 실질적인 의미에서의 자기 반성 혹은 성찰과 비전 때문에 미디어 법 통과에 반발하는 것이 아니라는 강력한 증거라고 보여집니다.

  오히려, 미디어 법을 빌미로 장외투쟁을 벌이는 민주당에게 민심이 그토록 싸늘한 이유도 정작 민생 법안과 국민들의 생활과 직결된 은행법에는 철저하게 무심하면서, 유독 미디어 법에 대해서만 민주주의와 국민들의 이름을 들먹이며 올인하려는 모습이, 마치 자신들의 밥그릇 챙기기(?!)로 비쳤기 때문이 아닌지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반성할 필요가 있다고 보여지며,

  그런 측면에서, 필자가 개인적으로 아무리 생각하고 따져 보아도, 이번 정운찬 총리 내정 소식에 대한 민주 진보 진영의 반응이라는 측면으로 보나 정치 역학 구도 면에서나, 모두다 좋은 점수를 매길 수 없다고 판단합니다. 

결론: 코미디 프로그램만 못한 민주 진보 진영의 구태를 청산해야 비전과 희망이 보인다
  노무현 김대중 두 전직 대통령의 잇따른 서거 소식으로, 특정 인물이 민주 진보 진영을 주도하는 시대나 상황은 이제 막을 내린 상태에서, 지금 민주당이나 친노 세력과 일부 노무현 지지자들이 그러하듯이, 이미 고인이 된 두 전직 대통령을 아무런 단점이나 과오가 없는 거의 신격화 수준으로 미화해서 절대적 권위를 부여하고,

  그것
을 바탕으로 정치를 하려는 구태는 이미 탈권위주의를 지향하는 일반 국민들에게는 그다지 반갑거나 신선한 소식도 아니며, 또한 그런 퇴행적 모습을 보이는 와중에서 주도권 다툼과 기득권에 골몰하며 서로간에 분열과 반목을 자초하고 있으니까 자연히 민심이 등을 돌리게 되고, 이 포스팅을 작성하는 필자처럼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무당파가 계속 늘어나는 것은 필연이겠지요...


  따라서, 이 총체적 난국을 극복하고 돌파하려면, 이미 고인이 된 두 전직 대통령에게 카리스마적인 이미지나 절대적 권위를 부여하는 작업에 몰두할 것이 아니라, 우선 과거 김대중 국민의 정부나 노무현 참여정부 시절의 잘못된 정책이나 부분들에 대해서는 서로가 혼쾌히 인정하며, 처절한 자기 반성과 세밀한 점검을 통해서 보다 현실적이고 실현 가능한 비전과 대안을 마련하고, 그럼으로써 지금 남아 있거나 살아있는 자들끼리의 분권형 혹은 조정형 리더쉽을 추구하는 참신한(!!!) 모습들을 대다수 국민들에게 똑똑하게 보여 주어야만 하는데,

  과연 지금의 민주 진보 진영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그토록 비판하는 현정부와 수구 세력들은 구체적인 내부 실상이나 사정은 어떻든간에, 일단 표면적으로는(!!!) 갈등 반목하는 모습들을 최대한 자제하며, 무늬만이라도(!!!) 중도 통합적인 모습을 보여 주려고, 정운찬이라는 깜짝 쇼와 회심의 카드(?!)를 국민들의 눈 앞에 내놓을 때까지, 도대체 무엇을 하였느냐는 말이며,

  이는 한국에서 지금 한창 인기있는 코미디 프로그램의 형태인 리얼 버라이어티 형식보다도 못한 구태 중의 구태이며, 이런 모습들을 가지고서는 진정한 개혁과 민주주의 구현도 요원하다라고 필자는 판단하면서, 오늘의 포스팅을 이만 마칩니다...

                                                                                           ※사진 출처: 구글 이미지
Posted by 네 오 NEO
시사 평론2009. 9. 4. 04:24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지도 벌써 3개월이 훌쩍 지났습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한국 민주주의의 큰 어른이셨던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도 서거하셨지요. 수구 보수 세력들은 지난 민주화 정권 10년을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했었으니, 아마도 마음속으로는 쾌재(?!)를 부르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반면에, 민주당이나 친노세력들은 김대중 국민의 정부와 노무현 참여정부의 유지를 받들고 계승하는 일은 자신들의 몫이라고 주도권 다툼을 벌이고 있는 참으로 한심한 형국인데요...

  이런 와중에, 소위 노무현 참여정부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라는 이름으로 과거 참여정부의 정책들을 다시 뜯어보는 작업이 한창인데, 그 정도가 너무 지나쳐서 노무현 참여정부 시절, 최대의 실정이라고 평가받는 부동산 폭등 문제까지 잘했다라고 말하는 일단의 무리들과 관련 포스팅이 보여서, 오늘은 왜 노무현 참여정부의 부동산 실정을 미화하면 안되는지의 이유를 조목조목 짚어 보려고 합니다.

 우선, 본격적인 이야기에 들어가기에 앞서, 필자가 보았던 노무현 참여정부의 부동산 실정을 미화한 IMF보고서를 통해 본 DJ, 노무현 정부의 정책 평가 라는 포스팅의 핵심 논지를 일단 요약하고 시작하겠습니다.  

 해당 포스팅은 말하길, IMF의 경제 관련 관리들이 지난 6월말부터 7월초까지 한국에 방문해서 한국의 경제 고위 관료들과 회동을 했고, 그렇게 해서 작성된 일련의 보고서가 있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니 노무현 참여정부 시절의 부동산 폭등은 너무 과장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한국의 주택 가격 변동 비율이 아시아권의 다른 나라들보다 낮았다고 하고, 이른바 주택 구매 여력 지수(Housing Affordability Index)와  함께, 뜬금없이 기업 이윤율과 기업 부도 가능성이라는 얘기까지 거론하면서 노무현 참여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잘되었었다라고 주장하고 있는데요...

 이건 정말로 말도 안되는 얘기이지만, 한번 가정삼아서 위 포스팅에서 주장하는 사항들이 모두 맞다라고 치면 곧바로 엄청난 문제가 생깁니다...

1) 이명박 정부의 부동산 정책에 대한 비판의 근거가 모두 사라진다
  이명박 정부가 종부세와 담보대출 규제를 완화하며 왜 각종 부동산 규제를 모두 풀고, 대다수 국민들이 막연하게나마 우려하고 반대한다는 4대강 사업을 계속 추진하려고 할까요? 여러분들은 왜 현정부가 이토록 건설 토목 분야에 집중하는지 그 이유를 깊이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지금은 여러분들도 익히 아시다시피, 작년에 미국발 금융위기로 시작된 경제 위기는 이미 전세계적인 국면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자연히 부동산 가격은 미국발 서브 프라임 모기지론의 부실이 드러난 2007년도부터 서서히 하락 국면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정부가 개입하지 않으면 한국도 부동산 가격은 계속해서 떨어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지요. 그런데, 해당 포스팅의 주장대로라면, 이미 한국은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부동산이 한창 오를 때 오르지 않았었고 그만큼 부동산 가격이 크게 하락할 여지조차 없으며, 부동산 시장은 매우 안정되어 있었다라는 말이 되니 지금 이 시점에서 가격이 더 떨어지면 그건 정말 안되는 것이죠.

  자연히 현정부가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강구해서 부동산 시장의 가격을 현재의 수준으로 유지하거나 다시 반등을 시키려고 하는 일련의 정책과 노력들은 경제를 살리고 자산을 보호하려는 측면에서 보자면 아주 좋은 것이 되어 버립니다.

 그 반면에, 이미 오래전부터 진보나 보수를 막론하고 이미 결론이 난 얘기이지만, 필자의 진단대로 노무현 참여정부의 부동산 실정때문에 부동산 가격이 마지막 한계선상까지 올랐었고, 그 달콤한 과실을 전부 대한민국의 소위 1% 계층이 독차지했으며, 서민들은 폭등한 주택 가격 때문에 살림이 더욱 궁핍해졌고 내집 마련의 꿈은 더욱 멀어졌다라고 노무현 참여정부 당시의 상황을 조명하면, 현정부의 뻘짓과 의도가 바로 드러나지요.

  아주 간단하게 말해서, 이명박 정부는 노무현 참여정부 기간동안에 폭등한 주택 가격을 그대로 유지해서 특정계층 사람들의 자산만을 지켜 주려고 온갖 수단을 다 강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전세계적으로 주택 가격이 아무리 하락하더라도 한국만큼은 예외여야만(?!)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또한 한국은 부동산이 자산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높고 실질적인 물적 토대의 핵심이기에, 경기 하강 국면을 지연 혹은 만회하고 부양시키는 수단으로 쓰고 있는 것인데,

  노무현이 부동산 정책을 잘했다고 말하고 이른바 부동산 버블이 없었다고 생떼와 억지를 써 버리면, 현정부의 부동산 관련 정책이 얼마나 반서민적이고 위선적인지를 가늠하고 비판할 주요한 잣대와 근거가 모두 사라지는 것을 왜 모를까요?...-_-;;;


 노무현 참여정부와 현정부가 시기적으로 완전히 분리되고 정책상으로도 단절된 정부라면 그런 엄한 말을 할 여력이라도 있겠지만, 참여정부와 현정부의 부동산 정책이나 가격 문제는 서로 긴밀하게 연관이 되어 있는데, 이걸 싸그리 무시하고 아니라고 말하면, 자연스럽게 이명박 정부의 인위적인 부동산 부양 정책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나 진정 서민들을 위한 부동산 정책과 대안 제시도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2) 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이 압승한 배경에 대한 납득할만한 설명도 할 수 없게 된다
   2008년...그러니까 작년에 있었던 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이 압승을 했고 거대 여당이 되었지요. 특히나 수도권에서의 약진이 매우 두드러져서 김근태, 정동영, 노회찬같은 간판급 스타 의원들부터 소위 386세대를 대표한다는 소장파 의원들까지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나갔습니다. 

  통상 정부가 새로 출범하면 국민들은 집권 세력이 강력하게 정책을 수행하도록 여당을 지지하는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18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에는 그 정도가 너무 심했지요. 당시 선거 결과를 보고 혹자는 17대 대선에서의 압승으로 증명된 반노무현 정서가 아직도 남아서 그랬다라는 얘기도 있었지만, 필자가 판단하기엔 바로 뉴타운 공약에 대한 기대감이 한나라당에 표를 몰아 준 결정적 계기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뉴타운 공약은 말 그대로 노무현 참여정부 시절 부동산 폭등으로 재미를 본 강남과는 달리, 강남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큰 이득이나 재미를 보지 못한 강북권의 시민들의 부에 대한 욕망을 자극하고 표심을 온통 뒤흔들었던 헛된 공약이었던 것이죠.
 
  만약에, 노무현 참여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잘되었었고, 그래서 강남권의 거주자들이 커다란 물질적 이득을 보지 못했으며, 그로 인해 강북권의 거주자들이 상대적인 소외감이나 박탈감을 느끼지 않았었다면, 뉴타운 공약은 그토록 맹위를 떨치지 못했을 것입니다.

  당시 한나라당의 출마자들은 저마다 서울시장 오세훈과 이미 약속이 되었다며 뉴타운 공약을 설파했고, 사람들은 한나라당의 성향과 이명박 대통령의 대운하 정책등을 모두 고려해서 추호의 의심도 없이 뉴타운 공약을 믿었던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선거 이후 오세훈 시장이 뉴타운 공약을 약속한 바 없다라고 밝히자 정몽준 의원같은 이들은 대국민 사기를 쳤다라는 비판과 법적 소송까지 당했던 것이 아닙니까?


  다시 말하지만, 왜 뉴타운 공약이 그렇게 강북권 시민들에게 잘 먹혔을까요? 바로 노무현 참여정부 시절에 강남권의 집값이 강북권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너무 많이 올라서 하루 아침에 부자가 되는 것을 모두가 똑똑히 지켜 보았고, 노무현 참여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아무 효력도 없고 이미 실패했으며, 부동산 불패 신화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믿었기에, 그토록 표를 몰아 준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노무현 참여정부가 부동산 정책을 잘해서 부동산 시장이 안정되어 있었다라고 주장한다면, 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의 수도권 압승을 설명할 여력조차 아예 없어지는 것입니다.


3) 노무현이 부동산 정책을 잘해서 부동산 시장이 안정되었다면, 왜 추병직 건설 교통부 장관 경질과 부동산 정책관련 경제 라인은 모두 교체되고, 노무현 전 대통령 자신은 부동산에 대해 사과를 했을까

  여러분은 추병직이라는 이름을 기억하십니까? 추병직은 노무현 참여정부 시절, 건설교통부 장관의 이름입니다. 그는 신도시 개발 계획 정보를 사전에 언론에 유출함으로써, 노무현 참여정부 당시 한창 폭등하던 부동산 시장 국면에 기름을 부었다라는 국민적 비판에 휩싸였었고 결국엔 경질되었지요.

  그리고, 노무현 전 대통령 자신도 부동산만큼은 정말 잘못되었다라고 밝혔었는데, 왜 자꾸 노무현 참여정부의 부동산이 잘되었다라는 망언이 나와야 하는지 필자는 그 이유를 당최 모르겠습니다.   



4) 노무현을 미화하려고 국민들을 모두 바보로 만들 셈인가
  노무현 참여정부 시절, 부동산 폭등이 없었다고 하면 엄연한 과거 사실을 부정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국민들이 자신들이 터하는 부동산같은 기본적인 재산에 대한 개념도 하나 없고 현실 감각이 제로이며, 그저 조중동과 한나라당의 선동에 놀아나서 있지도 않은 부동산 폭등을 가지고 노무현 참여정부를 과하게 비판했다라는 말이 되는데, 이거 정말 넌센스가 아닐까 싶습니다.

  한국에서 부동산은 소위 불패 신화를 가진 가장 확실한 재테크(?!) 수단으로써 지난 수십년간 군림해 왔습니다. 한국 사회내 어디에서든지 사람들이 모이면, 어디 부동산을 사서 얼마가 올랐고 얼마를 벌었다라는 얘기를 한번이라도 하거나 듣지 않은 이들은 거의 없을 지경입니다. 따라서, 부동산이 폭등하는지 아닌지에 대한 여부 정도는 일반 사람들도 금방 알아 챕니다.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다른 정치 사회 문제도 아니고 바로 자신의 돈 문제와 직결되는데, 사람들이 부동산에 관심이 없을 것 같습니까?

  작년 미국산 쇠고기 문제를 잘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안전하지 않은 쇠고기라는 말이 나오니까 얼마나 많은 이들이 광우병에 관한 정보를 찾고 정부의 졸속 협상에 대한 근거와 조중동의 말바꾸기를 조목조목 밝혀 냈습니까? 막말로 고작 쇠고기 하나에서도 이러는데 하물며 부동산은 어떨까요?

  과연 국민들이 현실감각이 도통 없어서 조중동과 한나라당의 선동에 마냥 놀아 났을까요...? ^^  정말 아전인수도 어느 정도껏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


5) IMF가 작성한 보고서가 과연 한국의 실정을 제대로 반영한 객관적인(?!) 자료라고 할 수 있을까
  여러분은 IMF라는 단어를 들으면 무슨 생각이 떠오르십니까? 필자는 IMF라고 하면 한국의 외환위기가 떠오르고, 다른 국가들에 비해서 너무 가혹한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추진하도록 강요한 빌어먹을 국제기구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미셸 캉드쉬 IMF총재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모습. ⓒ구글 이미지

  그리고, IMF의 요구대로 신자유주의 정책과 작은 정부를 지향하고 노동의 유연화만을 강조하다 보니, 사회적 양극화라는 말이 생겨났고 비정규직들의 문제가 발생하였으며, 소위 88만원 세대라는 말까지 나왔는데 이런 조치를 취하도록 압력을 넣은 IMF라는 기구의 보고서가 객관적인 시각의 보고서라구요?...^^

   IMF는 김대중 국민의 정부가 자신들의 요구를 충실히 따라서 세계에서 가장 빨리 부채를 상환한 것을 두고 신자유주의 모델의 우수성을 강조하는 부류의 국제기구입니다. 

   그들은 지금도 미국식 신자유주의 질서의 전도사로써, 국가 재정 상태가 불안한 개발 도상국들에게 구제 금융이란 명목아래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끊임없이 강요하고 있다는 것은 알만한 이들은 다 아는 사실이지요.


  그리고, 그런 IMF의 조치 때문에 지금도 사회적 양극화가 계속되고 있으며, 노무현 참여정부 또한 그런 기조의 영향을 크게 받아서 시장주의적 정책을 추진한 것인데, 그런 기구에서 내놓은 자료로 지난 10년의 민주화 정권을 비호하게 되면, 결국 신자유주의 모델이 옳았다라는 얘기밖에 남는 것이 없지 않겠습니까? 

  왜 현재의 이명박 정부내 경제 고위 관료들이 IMF 관료들과 함께 한 회동에서 지난 민주화 정부 10년을 좋게 평가했을까요? 그 진정한 의도(?!)가 과연 무엇일까요?...   


  잘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 



  결론적으로, 노무현 참여정부의 부동산은 취지나 방향은 분명히 옳았지만, 정책 수행상의 아마추어리즘으로 인해서 타이밍을 놓쳤고 시장의 신뢰를 완전히 상실하면서 전국적인 부동산 투기붐이 재연된 것이며, 또한 수구 세력들에게 강력한 공격의 빌미를 제공한 격이며,

  이미 한계선상이라고 여겼었던 부동산의 가격 상승폭에 놀라고 지친 중산층과 서민들이 노무현 참여정부에게 완전히 등을 돌리면서, 그토록 큰 표차로 대선에서 완패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것을 아니라고 부정하는 일부 한심한 노무현 지지자들이 소위 선무당이 사람잡는다라는 옛말을 현실 속에서 여실히 보여 줌으로써, 정작 노무현 전 대통령의 좋은 정책에 대한 객관적 평가의 여지마저도 다 말아먹고 있음을 이제는 제발 깨닫기를 바라면서, 오늘의 포스팅을 이만 마칩니다...


 
P.S: 총론이 이 정도이면 세부 각론은 더 이상 볼 것도 없지만, 해당 블로거가 부동산이나 경제에 대해서 잘 모르면서, 정말로 어처구니없고 황당하기까지 한 억지를 계속 부리고, 그로 인해 경제나 부동산에 대해서 관심이 덜하신 분들이 잘못된 정보에 현혹되지 마시라는 차원에서 약간의 반박을 시도해 보겠습니다. 이 부분은 관심이 있는 분들만 확인하셔도 무방합니다...^^

 
1) 해당 포스팅(IMF보고서를 통해 본 DJ, 노무현 정부의 정책 평가 )에 접속하셔서 첫 도표를 보시면, 그 내용이 주택 가격 변동에 대한 사항임을 아실 겁니다. 문제는 그 도표에서처럼 단순하게 수치상으로만 비교해 보면, 지난 2000~2007년까지의 한국 부동산 가격은 다른 아시아권 국가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낮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역시 핵심은 다른 아시아 국가들이 한국만큼 부동산에 거품이 끼어 있어서 주택 가격이 오를 여지가 없는데도 올랐느냐라는 점입니다. 



  아래 도표는 필자가 새사연과 경실련 그리고 아이투자닷컴에 올려진 자료들을 기반으로 직접 만든 것입니다.

  여러분이 보시기에 어떻습니까? 미국이나 일본에 비해서 한국은 GDP대비 부동산 시가의 비율이 너무 높지요?... 또한, 한국의 부동산 총액이 미국의 1/3, 일본의 1/2 정도의 수준인데 땅의 크기를 고려한다면 미국과 일본에 비해 한국의 부동산 가격이 매우 높게 형성되어 있다는 것을 금방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게 말로만 듣던 부동산 버블(거품)의 실체인데요.

  만약 해당 포스팅의 주장이 모두 사실이라고 한다면, 다른 아시아권 국가들도 한국 정도의 경제규모와 부동산 거품을 가진 상태에서 주택 가격이 해당 포스팅의 도표에서처럼 또다시 큰 폭으로 상승했음을 모두 밝혀야만(!!!), 비로소 그런 주장과 논리가 공론화되고 언젠가는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겠지요...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해당 포스팅에서처럼 한국 사회내에서 이미 지난 수십년간 꾸준히 불어났던 부동산 버블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2000년대 초반, 그러니까 지난 몇 년간의 부동산 가격 상승폭만 단순 비교하는 것은 마치 툭하면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들의 모임이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폭력적이었던 아버지가 자식에게 매를 좀 덜 대겠다라고 결심하고, 그렇게 하다보니, 그 기간동안에는 자식들이 매를 맞는 횟수가 다른 폭력 아버지들보다는 좀 낮게 나오자, 그걸 가지고 이것 보라면서 자신은 폭력을 휘두르는 면에서 있어서 다른 아버지들보다는 상대적으로 훨씬 덜하니까, 자식들에게 이젠 너무 원망만 하지 말라고 하는 격이나 마찬가지인 셈이죠...

  그러나, 문제는 매를 적게 대든 많이 대든 자식의 입장에서는 폭력 아버지에게 시달리는 것은 여전한 것처럼, 지난 수십년간 한국 사회에서 부동산 가격이 소득에 대비해 너무 빠르게 올라서, 시간이 가면 갈수록 주택을 마련하기가 힘들어지는 서민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부동산 가격이 또다시 오른다는 것만으로도 절대 좋은 소리가 나갈 수 없는 것인데,

  노무현 참여정부 시절동안 전국 평균 35%, 서울은 43%, 신도시는 무려 56%가 올랐다고 하면 입에서 욕이 안 나올 수가 없는 것이죠...그리고 이런 국면이 괜찮았다고 말하는 것은 서민들의 입장이 아니라 과거 노무현 참여정부의 부동산 정책 관계자나 이른바 큰손이라고 불리는 부동산 투기꾼들의 시각이겠지요...

※ 참고사항

 


2) 주택 구매 여력 지수(Housing Affordability Index)에 대한 무지
 
해당 포스팅에서 두번째로 언급한 부분은 소위 주택 구매 여력 지수(Housing Affordability Index 일명: HAI)라는 것인데요. 이 부분에서 모 블로거는 1990년 이후로 주택 구매 여력 지수가 100 이하에서 머물고, 따라서 주택을 구입할 여력이 그만큼 늘었으며 수월해졌다라고 주장하던데, 이건 부동산과 경제에 관한한 완벽한 무지의 소산에서 비롯된 주장이란 점을 분명히 말해 드리고 싶습니다.

  노무현 참여정부 시절과 지금의 현정부처럼 가계소득보다 주택담보대출 이자 및 원리금 상환 부담이 더 빠르게 늘면 주택 구입 능력은 크게 악화되기 마련입니다. 바로 이런 경우에 주택 구매 여력 지수를 살펴보게 되는데요. 만약 이 지수가 100 이하일 경우에는 가계의 주택 구입 여력이 소득에 비해서 과중하다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해당 포스팅의 도표대로라면(?!) 이미 지난 노태우 정부 시절의 부동산 폭등이 있었던 1990년도부터 한국은 주택을 구입하기 위해 서민들이 져야만 할 부담이 크게 늘었다라고 봐야 하는 것이죠. 그 도표를 자세히 보시면, 노무현 참여정부 기간동안에 주택 구매 여력 지수가 다소 상승한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당시의 풍부한 유동성 과잉과 저금리 기조, 그리고 그로 인해 은행권이나 제 2금융권에서 담보대출등을 통해 자금을 융통하기가 그나마 수월하고, 부동산 시장이 과열되어 부동산 매매가 활발한 시기였음을 의미하는 것이지, 주택을 구입할 실질적 여력이 늘었던 것이 결코 아닌데, 해당 블로거는 정말 이상한 해석을 하고 있더군요...^^

※주택 구매 여력 지수를 구하는 방법
  주택 구매 여력 지수는 평균가구소득/상환요구소득X100 (기준치 100)으로 산출합니다. 여기에서 상환요구소득은 평균주택가격과 주택가격 대비 대출금액 비율, 월소득 대비 월상환 가능 금액 비율(기본적으로 25%로 설정), 원리금균등분할상환계수 등으로 구합니다...^^


※주택 구매 여력 지수란 과연 무엇인지 간단하게 참고할만한 자료
http://www.prmbank.com/2009/01/housing-affordability-at-record-high.html

  마지막으로 기업 이윤율과 부도 가능성에 대한 부분은 역시 유동성 과잉과 세계적인 경제 호황 국면, 그리고 외환 보유고 확충과 환율의 안정에서 기반한 것임은 한때 경제 대통령이라고 불렸었던 미네르바가 이미 잘 설명하였으니까 더 길게 언급을 하지 않겠습니다.

 
Posted by 네 오 NEO
사회 비판2009. 8. 25. 02:16
 요즈음 한국의 인터넷을 살펴보니, 미수다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베라라는 독일 여성이 자신의 고국인 독일에서 펴낸 "서울의 잠 못 이루는 밤(Schlaflos in Seoul)"이라는 책의 내용중 일부가 한국을 폄훼했다라는 얘기가 흘러나오면서, 사회적으로 논란이 사뭇 뜨거워 보입니다. 

  한쪽에서는 그녀가 대부분 맞는 말을 했다라고 얘기하고, 다른 편에서는 그녀가 미수다라는 프로그램에서 보였던 평소 이미지와는 다른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다라고 분개하는 중인데요...


  솔직히 필자는 그녀가 쓴 책을 직접 보지 못해서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에 대한 도덕적인 판단 여부는 최종적으로 내리지 않으려고 합니다. 다만, 베라라는 독일 여성이 펴낸 책에서 한국을 폄훼했다라고 지적받는 몇몇 구절과 표현들을 둘러싸고... 

  이중적(?!) 행태를 보인 베라도 정말 문제이지만, 그보다 우선 미수다라는 프로그램이 책임을 지라는 둥 천박한 언론의 탓이라는 둥 하는 블로거들의 의견이 마구 쏟아져 나오고, 그리고 그것에 대한 한국 네티즌들의 분분한 반응에 대해서 문득 느껴지는 바가 있어서 몇 자 적어보려고 합니다.


미수다 베라 논란은 결국 한국 사회내 시민의식의 성숙도 문제이다
  사람이 나이를 먹고, 그래서 점차 어른이 된다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일까요? 필자는 개인적으로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된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이 한 일들과 여러 말들...다시 말해 자신의 언행에 대해 무한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이 된다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어른이라면 자신에 대한 외부의 평가나 비판보다는, 우선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던지는 마음 속 비판에 좀더 치중하고 냉정해져야 하며, 그럼으로써 잘못된 부분들에 대한 자기 반성과 처절한 점검을 통해 두번다시 똑같은 습관 혹은 행동이나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진짜 어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의 어른들이 많은 사회일수록 정말로 민주주의적이고 성숙한 공론과 의식이 굳게 자리잡은 사회가 된다라고 판단하는데요...

  이런 필자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한국 사회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독일 여성 베라가 언급했다는 지나친(?!) 한국 폄훼 발언이나, 그 반대로 좀더 원문에 가깝게 번역했다라는 내용의 우열과 사실 여부를 가리기에 앞서, 그녀가 던진 대부분의 지적이나 비판은 한국 사회에서 공공연히 벌어지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술한 것이 아닙니까?...

  여기에서 필자도 과거 한국에서 아르바이트로 번역을 조금 해 본 경험이 있었는데, 원문과 한국어에서 풍기는 뉘앙스 자체가 판이하거나 문화적 차이가 느껴지는 부분에 있어서의 해석은 번역가 자신의 주관적인 단어나 어휘의 선택이 될 수 밖에 없다라고 판단하며, 다만 얼마만큼 원문에 가까운 번역을 했느냐라는 문제로 귀결되는데... 


  만약 베라가 독일에서 펴낸 책에서 언급한 내용 자체가 모두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은 상당한 문제가 되고 추후에 진위 여부를 가린 뒤에라도 내용상에 시정을 강력하게 요구할 수 있겠지만, 엄연한 사실을 바탕으로 쓴 책의 표현 방식을 일일히 문제삼는다는 것은 그만큼 한국 사회내 구성원들이 유아기적 단계의 시민의식을 가지고 있다라는 것을 강력하게 반증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이런 측면에서, 개인적으로 필자가 항상 의문스럽게 생각하는 것중에 하나는, 왜 한국 사회는 외국이나 외국인 개개인의 평가나 비판에 대해 그렇게 목을 메느냐는 겁니다. 

  필자가 미국에서 살면서 가장 확실하게 깨달은 것은 유럽이나 미국에서 한국이라는 국가는 아예 관심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서방의 주요 언론이나 방송에서 한국을 비중있게 다루는 일은 극히 예외에 속합니다. 그리고 어쩌다가 한국 소식을 다루더라도 그것은 대부분 북한 핵 미사일과 관계되어서 언급되거나 국회에서의 극한 몸싸움같은 매우 수치스럽고 부정적인 모습으로써만 소개되는 경우가 대부분일 정도로 이들에게 한국은 그저 그런 주변국가중에 하나일뿐인데, 무슨 사회적 국가적 이미지를 그렇게 관리한다고 이 난리 부르스를 추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이는 마치 별로 관심을 받지 못하는 어떤 이가 혼자서 극심한 나르시즘에 빠져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대단하고 똑똑하다라고 믿고 살았는데, 어느날 누군가가 그런 자신에게 너 별로 대단하지도 똑똑하지도 않은데,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라고 문제점들을 아주 솔직담백하게 지적하니까, 거의 패닉 상태에 가까운 거부반응을 보이는 것이나 매한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외국의 누군가가 한국에 대해서 좋게 말했다고 하면, 그 외국인의 신분이나 사실 여부를 가리지 않고 일단 반색을 하고 내심 좋아하며, 그 반대로 한국과 한국인들을 조금 거칠게(?!) 비판했다라는 소식이 들리면, 해당 외국인에게 온갖 욕과 비난이 무성한 지금의 한국 사회가 과연 성숙한 민주 시민들이 넘치는 그런 사회라고 여러분들은 생각합니까?...

  막말로 툭 까놓고 얘기해서, 베라라는 독일 여성이 독일을 대표해서 온 대사나 정부의 주요 사절단인가요? 아님 독일 사회에서 굉장한 영향력을 가진 문인이나 언론계 인물인가요? 그것도 아님 다른 분야에서라도 이름이 널리 알려진 유명 인사인가요?

  지금까지 필자가 파악하기로는 베라라는 여성은 그저 평범한 독일 여성이고, 한국에서 꽤 오랜 시간 생활하면서 겪은 얘기들을 독일인의 시각에서 기술했던 것뿐인듯 한데, 이것조차도 용납이 안되고 일종의 사회적 국가적 평가라고 받아들이는 한국 사회의 조급증과 사회 구성원들의 지나친 과민함과 여론등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나를 좋게만 봐 달라는 세살배기 어린애들의 투정이나 서구 유럽에 대한 지독컴플렉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보여집니다.

베라의 이중성을 탓하는 한국 사회의 이중성이야말로 벌거벗은 임금님의 모습이 아닐까
  여기까지 필자의 포스팅을 본 혹자는 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릅니다. 베라가 미수다라는 프로그램에서는 한국을 칭찬하고 좋은 말만 하더니만, 뒤로는 독일어로 된 책을 통해 한국을 비하하고 시쳇말로 깠다라고 내심 분개하면서, 그녀가 지적한 사안들의 사실 관계 여부를 일단 떠나 이중인격에 대해 실망하고 배신감과 분노를 느낀다라고 말하는 이들도 계실지 모릅니다. 

  하지만 필자는 이 부분에서도 생각이 조금 다릅니다. 인터넷의 미수다 베라 논란이 사뭇 시끄러워서, 개인적 호기심에 미수다라는 프로그램을 몇 편 살펴 본 필자의 개인적 소감으로는, 미수다라는 프로그램에 출현한 외국 여성들이 그래도 상당히 온건하고 매우 식적으로(?!) 한국 사회의 문제를 짚었다라고 느꼈습니다.

  정말로 솔직하고 혹독하게 한국 사회의 문제점을 비판 혹은 지적하고 싶어도 지금같은 비정상적인 사회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아는 외국인이라고 한다면, 자신의 얼굴과 실명이 공공연히 드러나는 지상파 방송에서 공개적으로 비판적인 얘기를 할 수도, 또한 프로그램의 존속 차원에서라도 그런 솔직한 비판들을 방송으로 내보내지 않게끔 편집하는 것이, 바로 한국 사회의 기존 관행이며 공중파 방송의 엄연한 현실이 아닙니까...  

  게다가, 비단 베라같은 외국인이 아니라도 한국 사회에서 인기 연예인이나 사회적 명사들이 한국 사회를 비판하기가 얼마나 조심스럽고 힘든지는 누구나 다 인정하는 공공연한 사실이 아니던가요... 

  따라서 베라가 지적한 사안들이 일종의 불편한 진실에 해당한다라면...비록 책의 내용에서 비치는 거친(?!) 표현에 대해 여러모로 아쉬운 마음과 일종의 배신감이 생길 수도 있겠지만, 그런 감정적 반응보다는 우선 독일 여성 베라의 비판이나 지적중에서 받아들일 부분은 겸허히 받아 들이고, 그런 측면들은 조금씩 고쳐야 한다라는 자성의 목소리나 생각을 보여야 하는데,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몇몇 네티즌들이 전혀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으면서, 오히려 한국 사회에 대해 솔직하게 지적이나 비판을 한 그녀를 비난하며 극구 부정하
려는 모습들로 일관하는 것은, 마치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을 연
상시킵니다.


  임금님이 벌거벗었다고 보이거나 생각이 되면, 그것은 영혼이 순수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는 이상주의적 패러다임에 매몰된 사회 구성원들 그 누구도 감히 벌거벗은 임금님의 어이없는 행차에 대하여 솔직하게 말을 못하고 가식적으로 환호하고 열광하지만, 사실 임금님은 벌거벗었다라는 한 어린 아이의 솔직함에 의해서 사람들의 위선과 불편한 진실은 만천하에 드러나 버리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벌거벗은 임금
님은 불편한 진실을 인정함으로써, 정말로 한심하고 초라해지는 자신의 모습을 한사코 거부한 체 끝까지 어이없는 행차를 계속하였다라는 슬픈 동화같은 얘기를 한국 사회는 현실 속에서 너무도 자주 반복하는 것이 아닐까 싶은데,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P.S: 
  미국에서 살고 있는 필자가 바라보기에, 한국 사회에서 지금 벌어지는 미수다 베라 논란은 문제의 본질을 철저히 외면한체 여전히 수박 겉핥기식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판단하는데요...
 
  그러니까 이게 무슨 말이냐면, 천박한 언론이나 미수다라는 프로그램 자체에 책임을 묻는 것이 과연 이 문제를 본질적으로 보는 것이냐라는 얘기이며, 
필자가 판단하기엔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전혀 그렇지 않다라는 말입니다.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이 근거없는 소문과 남의 뒷담화 까기를 즐기는
 가쉽 문화에 매우 관대하고 취약하면서도, 다른 나라 사람들의 평가나 비판에 대해서는 매우 과민하게 관심을 두고 결코 너그럽지 못한 이중성을 너무 자주 보이니까, 그걸 이용하려는 천박한 상업적 언론인들이 자꾸 생겨나는 것이며 미수다라는 프로그램도 편성되고 공공연하게 방송이 되어 왔었던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진짜 본질은 한국 사회 대중들의 근거없는 루머 혹은 가쉽에 대한 천박한 반응과 외부 비판에 대해 지나치게 완고하고 대책이 없는 맹목적인 집단주의, 국가주의 코드라고 필자는 생각하며,

  그런 측면에서, 이제는 
구태의연한 집단주의와 흑백논리에 찌든 국가주의 코드일랑 휴지통에다가 조용히 갖다 버리시고, 왠만해서는 타인의 개인적 사생활이나 인격에는 관심을 두지 않으며, 근거없는 소문이나 뒷담화가 아닌 사실에 바탕을 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를 중요시하는 개인주의적 마인드로 일대 전환을 꾀하는 것이, 이런 소모적 논란을 근본적으로 잠재우는 해결책이라고 필자는 감히 판단하는입니다.

  그리고, 독일 여성 베라가 자신의 모국어로 쓴 책을 직접 사서 읽어 보지도 않았으면서도, 인터넷에 떠도는 몇몇 말들과 허접한 기사들만 굳게 믿고, 그녀를 맹비난하고 홈페이지까지 찾아가 악플을 남긴 이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조용히 반성을 하는 시간이 반드시 있어야 하며, 그녀에게 공식적으로 사과의 말들을 남기기를 바랍니다.

  또한, 필자 개인적으로 판단할 때 과연 몇 권이나 팔릴지도 극히 의문스럽지만, 베라가 독일에서 펴낸 책이 한국에 대한 이미지를 망치기보다는, 오히려 지금 이 시각 그녀에게 가해지는 한국 사회의 비정상적인 반응이야말로 독일 여성 베라에게 한국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더욱더 강하게 심어주는 단초이고, 비단 그녀 한 사람뿐만이 아니라, 대내외적으로도 한국과 한국인들의 이미지를 아주 폐쇄적이고 극단적인 모습으로 이해하고 판단하게끔 만든다는 사실을 여러분 모두가 제발 깨우치기를 부탁드리며,

  마지막으로, 이런 천박한 일반 대중들의 심리를 교묘히 자극하고 선동한 해당 언론사와 기자들은, 일벌백계 내지는 본보기 차원에서라도 강력한 광고 거부 내지는 불매 운동을 전개해야만 하며, 해당 기사(이런 것도 신문 기사라고 할 수 있을까?!)를 쓰도록 사주한 편집장과 기자들은 공식적인 사과 기사를 작성하도록 압력을 넣음과 함께, 아예 편집장이나 기자라는 신분이나 직함까지도 박탈해 버려야 한다라고 필자는 감히 주장하는데,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진 출처 : 구글 이미지
Posted by 네 오 NEO
  여러분은 영화 다이 하드를 기억하십니까? 만약 그 영화를 보셨고 지금도 기억을 하신다면, 어떤 장면이나 대사가 가장 먼저 기억에 떠오르시나요? 필자는 개인적으로 볼때, 일단의 테러리스트가 건물이나 기타 공공 기관이나 장소를 점거후 인질들을 발판삼아 자신의 목적을 관철시키려는 상황과 함께, 그런 위기 상황을 말끔히 해결하는 미국식 영웅 스토리의 대표작중 하나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비단 필자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도 다이 하드라고 하면, 으례히 액션 영화 내지는 미국식 영웅주의를 절묘하게 영상화한 헐리우드식 블록버스터 대작이라고 여기고 계시겠지요?

 
프롤로그
 
그러나, 미국의 패권주의는 문화에도 깊숙히 반영이 되어 있고, 그 중에서도 헐리우드로 대변되는 영화를 통한 미국식 문화와 사고의 전파 혹은 주입은 알만한 이들은 다 알고 있는 공공연한 비밀인데요. 그래서 오늘은 다이 하드라는 액션 무비속에 숨겨진 미국의 신자유주의 혹은 금융 자본주의적 마인드와 경제 패권주의의 코드를 한번 들춰내 보려고 합니다.

 
  그럼 우선 이야기를 진행하기에 앞서, 다이하드의 줄거리를 간략하게 언급하자면 대략 아래와 같습니다. 
 
  ...어쨌거나, 이 시점에서 다이 하드의 줄거리를 대충 마무리짓자면, 주인공 존 맥클레인은 결국 한스 구르버를 필두로 한 일단의 테러리스트들을 모두 물리치고 아내와 화해의 키스를 나누며 영화는 헤피 엔딩으로 끝이 나는데요.


  그럼 이제부터 영화 다이 하드의 내용으로 미국의 신자유주의 혹은 경제 패권주의적 사고와 코드를 한번 살펴 보도록 하지요! ^^ 

영화 다이 하드의 시대적 경제적 배경
  우선, 영화 다이 하드가 나올 당시 미국의 국내외적인 경제 상황이 어떤 것이었는지 잠시 짚어 보겠습니다. 당시 미국은 여러분들도 잘 아시다시피, 레이거노믹스 이후 뉴욕 월 스트리트를 중심으로 하는 신자유적 자본주의를 본격적으로 구축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에 맞서, 유럽은 독일과 스웨덴을 중심으로 한 소위 라인-알펜형 자본주의를 구가하고 있었으며, 또다른 한편에서는 일본과 한국을 위시로 한 동아시아형 국가 자본주의라는 3가지 형태의 자본주의가 서로 각축을 벌이던 1980년대 후반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만 해도 유럽은 그야말로 잘나가던 독일을 주축으로 한 유럽 경제 블록권을 형성하고 미국의 경제 패권주의에 심각한 위협을 안겨주고 있었으며, 일본을 위시로 한 동아시형 자본주의 체제 역시 일본의 부동산 거품으로 대변되는 자산의 폭발적 증가로 인해서, 미국내 주요 건물이나 영화사들이 줄줄히 일본에게 넘어가던 그런 시점이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시고, 오늘의 포스팅을 잘 살펴 보시길 바랍니다.   
  
다이 하드에 숨겨진 미국의 경제 패권주의 코드
 
영화 다이 하드에서 존 맥클레인은 하고 많은 미국내 지역중에서 하필이면 뉴욕의 경찰입니다. 이것은 미국의 월 스트리트로 대변되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와 월 스트리트의 금융 자산가나 투자자들을 상징하는 캐릭터입니다.

  그리고, 한스 구르버를 위시로 한 일단의 테러리스트들은 바로 경제 블록권을 형성해 미국에게 심각한 위협을 가하던 유로 연합을 상징하는 모델이지요. 나카토미 빌딩과 조셉 타카키 회장은 당시 일본내 부동산 버블로 호황을 누리며 미국내 주요 빌딩들을 사들이던 동아시아형 자본주의 모델의 선두주자인 일본을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다이 하드의 주요 내용을 한번 떠올려 보시길 바랍니다. 통상 테러리스트들은 어떤 부류의 사람들인가요?

  자기 나라의 독립이나 혹은 극단의 정치적 사회적 동기로 인해서 테러를 저지르고 그로 인해서 상대 국가나 사회에 심각한 불안과 혼란을 주는 것이 주목적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영화 다이 하드에 등장하는 일단의 테러리스트들은 그런 목적은 전혀 없고 오로지 나카토미 빌딩 금고 속에 숨겨진 1억 달러를 훌쩍 뛰어넘는 채권 강탈이 주목적이었지요.


  또한, 나카토미 빌딩의 조셉 타카키 회장 역시 금고 속 채권을 지키려고 비밀번호를 밝히기를 거부하다가 한스 구르버의 총탄에 헛되이 목숨을 내어 놓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정말 의미심장한 것은 한스 구르버나 칼, 그리고 일단의 테러리스트들이 모두 유럽 출신이며 그들의 이름 또한 대부분 독일 혹은 스웨덴식 이름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당시 미국 경제를 좌지우지하던 일본의 경제 패권에 맞서 유럽 연합이 일본을 집중 공격하고 있다라는 시대적 경제적 정황을 상징한다라고 느껴지지 않습니까...? ^^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다이 하드라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나카토미 빌딩 금고에 있는 돈이 일본인 타카키 회장의 소유도 아니고, 그렇다고 한스 구르버를 위시로 한 유럽 출신 테러리스트들의 것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 돈은 미국 내에 있고 당연히 미국의 돈이라는 사고가 영화 다이 하드 전반에 면면히 흐르고 있습니다.

  뉴욕 월 스트리트를 대변하는 뉴욕 경찰 존 맥클레인이 한스 구르버 일당에게 맞서자 한스가 이런 말을 하지요... "카우보이...자네가 무슨 람보인 줄 아는가?..자네 혼자서 우리의 계획을 방해하거나 저지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는가...?" 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당시 소련이 점차 붕괴 조짐을 보이면서, 소위 람보로 상징되는 카우보이의 나라 미국이 과거 보였었던 월등한 군사력을 기반으로 한, 이른바 군사 패권주의가 이제 자신들(유럽 연합)에게 더이상 통하지 않는다라는 강력한 암시가 아닐까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영화 다이 하드에서 한스나 다른 테러리스트들의 계획이나 목적이 과연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나카토미 빌딩 금고 속에 있는 어머어마한 액수의 돈(경제)이지요.


  그들은 일련의 인질극을 통해서 무슨 정치 사회적 요구를 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존 맥클레인이 그들에게 맞서고 끝내 한스 구르버 일당의 계획을 좌절시켰다면, 그것은 인질 구출이나 무슨 정의의 사도가 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막대한 액수의 채권, 즉 미국의 경제 패권주의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더더욱 흥미로운 것은, 소위 FBI와 경찰 서장으로 대변되는 미국 정부의 무능한 모습입니다. 이들은 규모면이나 인원 장비면에서 결코 한스 구르버를 주축으로 한 유럽 출신 테러리스트들(유로 연합)에게 밀리지 않았지만, 무능하고 단견적인 마인드로 인해서 영화 내내 한스 구르버 일당에게 질질 끌려 다니며 바보 노릇만 합니다. 

  또한, 제4의 권력으로 대변되는 언론을 상징하는 리처드 쏜버그 기자는 전형적인 선정주의와 포퓰리즘적 보도를 일삼으면서, 시민들로 하여금 사태의 심각성과 본질을 보지 못하게 하고 상황을 오히려 더욱더 꼬이게 만들어 버리지요.

  이는 당시 미국 월 스트리트를 중심으로 신자유주의적 금융 자본주의를 구축하려던 개인 혹은 기관 투자가들의 마인드...  그러니까 무능하면서도 규모만 비대하고 아무 짝에도 필요가 없는 정부와 정말로 한심하게도 말만 더럽게 많은 언론이라는 생각을 그대로 대변한다고 보여지지 않습니까?...

  그래도 필자의 영화 해석이 너무 과장되었다고 느끼신다면, 여기에서 좀더 흥미로운 분석을 시도해 볼까요? ^^ 

  다이 하드에서 뉴욕 경찰 존 맥클레인을 유일하게 이해하고, 그의 편을 들었었던 알 포웰 경사(레지날드 벤존슨 분)는 과연 어떤 것을 상징하는 캐릭터일까요?

  필자가 분석하기에는 알 포웰 경사는 바로 과거 자유주의로 대변되는 시대를 상징하는 캐릭터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익히 아시다시피, 과거 미국은 자유주의적 사조를 바탕으로 정부의 규제가 없고 오로지 인간의 합리적인 선택을 바탕으로 하는 시장의 번영을 추구하다가 대공황을 맞으면서, 자유주의 사조의 시대는 종말을 고했습니다.


  그리고, 유럽의 라인-알펜형 모델식으로 복지와 공공을 우선으로 하는 사회주의적 요소를 일부 받아 들이면서 자유주의적 사조는 역사의 한켠으로 조용히 밀려나게 되었지요...마치 영화 다이 하드에서 알 포웰 경사가 실수로 사람을 쏴 죽인 뒤에, 총을 멀리하게 되었고 순찰이라는 말단 한직으로 밀려나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다이 하드의 엔딩 부분을 다시 더듬어 보세요...존 맥클레인이 처치한 줄로 알았었던 칼이 최후의 도발을 하려고 하자, 알 포웰 경사가 총을 발사해서 칼을 진짜 골로 보내 버리는데요... 이것은 바로 과거 실패로 끝났다고 여겼었던 자유주의 사조가, 시대가 급변하고 미국의 경제 패권주의가 일대 위기에 처하게 되자, 다시 신자유주의로 되살아났다라는 것을 상징하는 장면이라는 얘기입니다.

  또한, 아내 홀리는 남편 존의 성인 맥클레인이라는 이름마저도 거부할 정도로, 과거 대공황의 역사적 기억 때문에 자유주의와 시장 만능주의에 회의를 느끼고, 일본식 동아시아형 국가 자본주의 모델에 열광하였던 1980년대 후반 당시의 미국 국민들을 상징하며, 결국 남편 존 맥클레인의 새로운 면모...즉 신자유주의의 막강한 위력과 초인적인 매력 앞에, 기존의 사고와 기억들을 모두 떨쳐 버리고 열렬히 그것을 받아 들이게 된다라는 얘기이죠...


에필로그
  여러분이 보시기에 어떻습니까?...반 더 빌 트의 영화 다이 하드 해석이 조금 흥미로우셨나요? ^^  다이 하드는 분명 액션 영화중에 단연 백미입니다. 그러나 미국이라는 국가는 액션 무비 하나를 만들어도 절대 허투로 만들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른바 헐리우드를 통해서 자신들의 패권주의와 사고 문화등을 전세계인들에게 알게 모르게 널리 전파하고 끝없이 과시합니다. 영화 다이 하드는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액션 무비의 고전적 공식과 흥행 요소를 모두 살리면서, 거기에 미국의 전통적인 카우보이 트렌드와 영웅주의로 대변되는 프론티어적 사고, 그리고 신자유주의 혹은 경제 패권주의 코드를 절묘하게 주입하여, 전세계의 액션 영화팬들을 열광시켰었던 진짜 수작중의 수작이라는 평을 끝으로, 필자는 오늘의 포스팅을 이만 마치렵니다...^^     

P.S : 오늘의 포스팅이 사뭇 흥미로우셨다면, 지금 바로 가까운 비디오 샵에 가셔서 영화 다이 하드 1편을 빌려다가 한번 찬찬히 보시면서 포스팅의 내용을 확인하시기를 적극 추천하며, 그런 의미에서 바로 아래 추천 버튼을 한번 힘차게 클릭해주시는 센스도 절대 잊지 않으셨기를 기대합니다...^^  


                                                                                  ※사진 출처: 20th Century Fox
Posted by 네 오 NEO
시사 평론2009. 8. 8. 13:02
  요즈음 한국의 주식 시장이 상당한 활황 장세를 유지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이런 일련의 흐름은 다음 뷰에도 반영되어 주식 투자와 관련된 포스팅들이 인기 이슈로써, 당당히 한 꼭지를 차지하고 있기도 한데요.

  그런 일련의 포스팅 중에서 주식 시세를 반영하는 그래프를 버리라는 제목의 포스팅이 눈에 띄였습니다. 필자가 무심결에 그 내용을 세세히 살펴보니, 해당 포스팅에서는 과거 주식 시장의 시세를 나타내는 차트나 그래프는 과감하게 버려야만 하는데, 그 이유로 사람들이 일종의 흐름이나 패턴을 알았다고 단정하거나 생각하지만, 주식 시세 그래프는 사실은 아무런 의미나 패턴을 보여주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포스팅이었습니다.   

  사실 말이 나와서 얘기인데, 주식 투자를 하고 있거나 주식 투자에 관한 공부를 하는 사람이라면 이미 주식 차트의 패턴(?!)을 맹신하면 안된다라는 사실쯤은 익히 알고 있는 일이고, 이런 내용 다음에 무슨 수학 공식마냥 따라붙는 것이 바로 세계 최고의 부자이자 투자가인 워렌 버핏의 소위 가치 투자라는 개념인데요. 그렇다면 과연 이게 100%로 맞는 말일까요?...

평균회귀의 통계적 개념보다는 자신의 판단과 상황의 특수성을 더 선호하는 인간의 심리 
  어느 날부터인가 노래나 연기가 대중들의 주목을 받아서 각종 방송과 쇼 프로그램을 장식하는 신인 연예인이 있다고 합시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 연예인의 후속곡이나 다음 작품을 내심 기대하게 되지만, 통상 후속곡이나 다음 작품, 구체적으로 말해서 그것이 영화이든 드라마이든간에, 해당 연예인의 처녀작만큼 대중들의 호응을 얻어 내지는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또한 스포츠에서도 특정 팀이나 선수가 과거와는 다른 기량이나 역동적인 팀 플레이를 보여주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반짝일뿐, 대부분은 원래의 기량이나 정체되고 수동적인 팀 칼라로 돌아가는 일들이 허다하지요.

  필자가 보기엔 대표적인 실제 사례로 꼽을 수 있는 것이 최근에 벌어진 로저 패더러와 엔디 로딕의 윔블던 결승전이라고 판단하는데요...  
 
  어떤 선수나 신인 연예인이 평소보다 돋보이는 성적을 내는 경우가 가끔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흐름은 통상 그리 오래 가지 않고 해당 선수나 연예인이 가진 평소 모습이나 기량으로 돌아가곤 합니다. 이것은 통계학에서 평균회귀라고 부르는 개념에 해당하는 일인데요. 문제는 이 수학적 개념이 인간의 기본 심리와는 그다지 맞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인간은 과거의 실수나 실패를 버젓이 알고서도 그것을 통해 무엇인가를 배우기보다는 그것을 극구 부정하거나 철저히 망각하고 또다시 상황을 오판하는 아주 묘한 심리가 있다라는 말입니다.
 
  예를 하나만 더 들어보겠습니다.
 
  이 시점에서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뭐?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라고 말입니다.필자가 이런 예들을 줄줄히 열거하며 하고 싶은 말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자기가 가장 똑똑하고 잘났다라고 생각하는 안하무인적인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과거의 잘못이나 실수도 다른 사람이 하면, 아주 가혹하게 평가하고 판단하지만, 자신이 그런 일을 벌이면 온갖 이유와 핑계를 들어 합리화를 시키고는 합니다. 또한, 다른 사람은 실수를 해도 자신이라면 그 상황에서 상당히 다르게 대처했을 것이라고 굳게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심리는 시장에도 작용을 해서 과거 주식 시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데이터나 차트를 보여주고 현재의 주식 시장이나 앞으로의 주가를 예측해보라고 주문하면, 대부분이 과거 주식 시세 변동을 나타내는 차트의 패턴을 일단 알아내려고 하게 되고, 그것을 이용해 주식 시세를 예측하면서 이번만은 과거와는 사뭇 다를 것이라는 강한 확신을 갖게 되며, 소위 묻지마 투자의 대열에 과감하게 뛰어들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이렇게 함으로써, 또다시 과거 어느 순간과 대단히 유사한 형태의 주가 패턴을 만들게 되고, 이것이 또다시 하나의 데이터나 차트로 남아서 주식에 발을 들여놓은 또다른 초보 투자자들에게 참고 자료(?!)가 되는 일종의 사이클을 형성하게 된다는 것이죠.

시장과 인간의 심리, 그리고 군중심리의 경제학
  필자는 이것을 시장에 반영되는 군중심리의 경제학이라고 정의하고 싶은데요. 자본주의가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이후, 그러니까 시장이란 영역이 생겨나고, 그것이 인간들의 실생활에 강력한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 이후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시장을 유지하고 그것을 이끄는 매우 강력하면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변수는 바로 집단적으로 분출되거나 발현되는 인간들의 심리라는 말입니다.

  여야를 비롯한 정치권 혹은 이념상의 좌우 진영을 떠나서 노무현 참여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실패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가 무엇인지 여러분들은 혹시 아십니까? 바로 노무현 참여정부가 부동산 시장을 관통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좀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부동산은 사람들의 실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부분이고 한국에서는 부의 핵심이자 원천이기도 합니다. 자연히 부동산 시장은 사람들의 심리와 경기의 흐름을 아주 민감하게 반영하겠지요? 그런데, 노무현 참여정부가 벌인 부동산 정책을 자세히 살펴 보십시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집권 초반부터 부동산만은 반드시 잡겠다라고 누차 공언을 했었지만, 각종 정책이나 규제책을 내놓은 시기도 항상 부동산 시장의 흐름을 뒤따라가는 형국이었고, 또한 규제를 한다면서도 한편으로는 판교, 용인, 동탄같은 신도시 건설과 혁신 도시, 기업 도시, 행정 도시 만든다고 토지 배상비를 엄청나게 풀어 버리고, 이른바 전국에 골프장 100개를 만든다는 정책 구상까지 경제 부총리란 자가 공공연히 내놓으면, 부동산 시장이 정부의 정책을 신뢰하겠습니까?

  자연히 시장은 노무현 참여정부를 믿지 않게 되고, 부동산에 더욱 돈이 몰리는 것은 필연이겠지요. 그렇게 참여정부를 신뢰하지 않는 부동산 투자자들이 하나둘씩 모이고 부동산 가격이 슬슬 요동을 치면서, 점차 주변에서 부동산으로 제법 돈좀 만졌다라는 입소문이 퍼지기 시작하면, 이제 그 누구도 탄력을 받은 시장의 흐름을 막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당시 기억들을 잘 더듬어 보시길 바랍니다. 노무현 참여정부 초반만 해도 대다수 서민들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공약을 철썩같이 믿었습니다. 그리고, 부동산 가격이 현실화되고 안정되는 시기를 오매불망 기다렸었지만, 시장의 상황과 결과가 정반대로 진행되자 모두가 초조하고 다급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정이 이렇게 되자 부동산이든 주식이든 영원히 가격이 오를 수 있는 물품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라는 과거의 숱한 사례와 자명한 이치를 모두가 망각한 체, 너도나도 부동산에 돈을 쏟아 붓기 시작했습니다. 특히나 한국 같은 경우는, 부동산 담보대출이라고 해서, 은행을 통해 일정 기간이 넘어가면 원금을 일시에 상환하는 방식으로 돈을 빌려 집을 사기 마련인데, 바로 이것이 지금 시점에서 대부분 만기가 도래하면서 부동산 가격까지 하락세로 돌아서자, 심각한 가계 부실의 중요한 원인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당시에 부동산으로 돈을 버는 부자들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아마추어리즘을 내심으로는 한껏 비웃으면서 부동산 폭등의 수혜를 마음껏 누렸었고, 다른 한편으로 내 집 마련의 꿈을 간직하고 한푼두푼 돈을 아껴서 적금을 붓던 서민들은 이렇게 가다가는 내 집을 마련하기는커녕 치솟는 전세값마저도 치르기가 버겁다라고 판단한 나머지, 자세히 따져보면 너무나도 분명하였지만, 당장 크게 무리를 해서라도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집을 구입하려고 일제히 나서게 되면서, 어느 지역 청약률이 수천대 일의 비율을 넘었다느니 혹은 어느 지역 아파트가 한달 보름만에 2억이 뛰었다느니 하는 얘기들이 공공연하게 신문 기사에까지 나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 이 시각까지 노무현 지지자들이 늘상 주장하는 얘기들처럼, 일부 강남의 부동산 투기꾼들이 일부러 조장한 것도 아니었고 한나라당이나 조중동의 방해 공작이 절대적이라서가 아니었으며, 오로지 노무현 참여정부의 어설픈 부동산 정책에 대한 시장의 강한 불신과 사람들의 불안 심리가 엉켜서 빚어낸 일대의 광풍이었던 겁니다. 


  만약 노무현 참여정부가 부동산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하고, 부동산 정책의 세부 각론을 좀더 치밀하게 준비해서, 부동산 문제를 조세 정책이나 주택 수요와 공급의 문제가 아닌 금융의 문제로 보고, 담보 대출 규제같은 조치를 좀더 일찍 시행했더라면 아마도 결과는 상당히 달랐을 거라고 필자는 판단합니다.

  그러나, 이미 부동산 시장의 신뢰를 완전히 상실하였고 사람들이 담보 대출을 엄청나게 받은 시기인 정권 후반기에 이르러서야 이런 정책들을 시행하면서, 오히려 그것이 시장의 신뢰를 더욱 상실하는 확인사살격이 되고 말았는데, 
이게 무슨 말이냐면, 은행에서의 부동산 담보 대출이란 것이 한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아파트나 주택을 구입하신 경험이 있는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계약금 명목으로 우선 얼마, 그리고 중도금 명목으로 얼마하는 식으로 대출금을 나누어서 지급하곤 하는데, 정부가 뜬금없이 담보 대출 규제를 한다고 하면, 중도금을 치루어야 할 수 많은 부동산 구매자들은 과연 어떻게 되겠습니까?...

  참여정부가 이제와서 뒷북을 친다고 크게 원망하거나 비웃지 않겠습니까? 결국 당시 노무현 참여정부는 기존의 대출은 허용하고 신규 대출부터 규제를 하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었지만, 그 와중에 정책의 신뢰는 다시 한번 바닥을 기게 되었고 일선 은행권에선 담보 대출이 계속되었던 겁니다. 그리고 이런 와중에 정권이 바뀌고 미국발 부동산 폭락이 시작되면서 부동산 가격이 서서히 내려가기 시작한 것이니, 무슨 선방이고 뭐고를 따지거나 말할 구석 자체가 없는 것이죠... 


  한마디로 노무현 참여정부의 무능은 바로 부동산 시장의 매커니즘, 더 정확히 말하면 사람들의 심리와 시장과의 상관 관계를 보여주는 군중심리의 경제학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다는 부분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결국 부동산 폭등을 불렀으며 참여정부 부동산 정책이 총체적으로 실패했다라는 비판을 듣게 된 근본 원인이었던 셈입니다.


결론
  주식 시장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주식 시세를 보여주는 그래프나 차트를 아예 버리거나 무시하라는 말은 과거 주식 시장의 시세나 흐름을 잘 알아도, 그것으로 시장의 흐름을 미리 예측하거나 완벽하게 통제할 수는 없다라는 얘기와도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주식 차트나 그래프를 통해서 시장의 대세를 어느정도 파악하고 그래프가 그려 나가는 일종의 궤적 속에서 시장을 관통하는 사람들의 집단 심리와 특정한 사회적 트렌드를 읽어낼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의 심리가 시장에 다시 반영되는 순환 사이클의 메커니즘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주식 시장의 그래프나 차트는 가볍게 무시하거나 혹은 과감하게 버려야 할 부분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중요한 참고 지표가 된다라는 얘기입니다.


  세계적인 투자가인 워렌 버핏도 처음에는 주식 시세에 대한 그래프나 차트를 있는 그대로 분석해서 주식에 투자를 했다가 손해를 본 경험이 몇번 있었습니다. 그 후에 그는 소위 가치 투자라는 방식을 적용해 기업의 내재적 가치와 장래 수익등을 고려하는 투자 방법으로써 세계적인 부자의 반열에 올라섰고, 그의 일화나 수 많은 기관 투자가들의 주식 투자 실적을 계산한 결과를 바탕으로, 주식 그래프나 차트를 통한 주식 시세 예측은 모두 무의미하며, 주식 시장에 일정한 패턴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말들이 정설처럼 떠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정이 그렇다고 해서 워렌 버핏이 주식 그래프와 차트를 아예 쳐다 보지도 않는다라는 말은 또한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바로 그 주식 차트 속에 그려진 도형의 이면에 자리잡은 인간들의 집단 심리와 주식 시장의 대세나 진짜 수익을 창출할 사회적 트렌드를 구분할 줄 아는 특출한 지혜와 남다른 혜안을 터득하거나 가지게 되었다라고 보는 것이 더 합당한 설명일 것입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세계적인 투자가나 부자들은 모두가 독서광이며, 읽고 있는 책의 장르도 비단 경제만이 아니라 사회, 정치, 종교, 과학 기술과 같이 인간의 실생활과 사고에 깊은 영향을 주는 분야들을 두루 거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좀더 깊이 유추해본다면, 주식 시장을 판단하고 예측하는데 있어서 무슨 그래프나 차트는 무시하거나 아예 버리라는 식의 극단적이고 단정적인 얘기들은 쉽사리 내뱉지 못하게 된다라는 결론을 내리면서, 필자는 오늘의 포스팅을 이만 마치렵니다...   


P.S: 
 
필자는 오늘의 포스팅에서 주식 시세 차트나 그래프...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기술적 분석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고, 그 속에서 당시 사람들의 집단 심리나 사회적 트렌드를 읽어 보라고 권했지만, 이런 혜안을 가지고 있는 주식 투자자는 현실에서 그리 많지 않습니다. 사실 엄밀하게 말해서, 누구나 워렌 버핏과 같은 혜안을 가졌다면 주식 시장은 더이상 존재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모자란 식견과 주식에 관한 지식이 부족한 여러분들이, 만약 주식 투자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통해 돈을 벌어 보려고 생각한다면, 다음 몇 가지 사항은 반드시 염두에 두시길 바랍니다.

  필자가 지금부터 제시하는 사항들은 워렌 버핏이나 그 밖의 수 많은 세계적 투자가들이 제시하는 주식 투자에 관한 조언중 엑기스만을 정리한 것입니다. ^^*



  주식 투자에 관한 조언을 보고 싶은 분들은 아래의 더보기를 클릭하세요!^^
※좀더 생각해 볼 문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쌍용 자동차의 노사 협상이 드디어 타결되었습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필자는 판단합니다.

  굳이 멀리 볼 것도 없이 바로 위에, 주식 투자 요령 5번 항목에서 언급한 얘기를 쌍용 자동차에 한번 적용해보면, 참으로 암담한 상황에 직면해 있음을 금방 파악하게 됩니다.

  당장 시장에 내놓아서 구매자들의 호응을 부를만한 신차종도 하나 없을뿐만 아니라, 중국 상하이 차가 무책임하게 벌인 장기간의 경영 부실과 함께, 노동자들의 생존권 보장이라는 차원의 그 누구도 말릴 수 없는 파업이 계속됨으로 인해서, 부품을 조달하던 중소 하청업체들의 줄도산 그리고 자동차를 판매할 대리점으로 대변되는 영업망이 이미 붕괴되기 시작했다면...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정신이 제대로 박힌 투자자라고 한다면 어느 누구도 지금의 쌍용 자동차에 자신의 돈을 절대(!!!) 단 한푼도 집어 넣으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되면, 결국 법정 관리로 들어가 정부가 직접 나서서 국민들의 피와 같은 세금을 마구 퍼부어서 이 회사를 살리거나, 아니면 파산을 시켜서 아예 회사를 공중 분해시키거나 조속한 제3자 매각이라는 길밖에 남는 것이 없게 되는데, 그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후폭풍이 실로 만만치 않으니, 앞으로도 쌍용 자동차 문제는 소위 시한 폭탄 내지는 뜨거운 감자가 될 운명이 거의 확실할 듯 싶습니다.

  그리고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지난 노무현 참여정부 시절 쌍용 자동차의 중국 상하이 차로의 매각 결정은 정말로 성급하고 아무런 장기적 안목이 없이 진행된 졸속 사안이거나 소위 시한 폭탄 돌리기의 대표적 사례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모든 정책의 효율성이나 회사 운영이 으례히 그렇듯이, 타이밍이란 게 정말로 중요한 법인데, 만약 당시에 쌍용 자동차를 참여정부가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을 통해서 좀더 적극적으로 관리하고, 그 당시에 개발중이었던 하이브리드 카라든가 다른 신차종의 개발에 역점을 두게 하면서, 산하 중소 부품업체들과 대리점으로 대변되는 영업망과 생산 라인을 관리하고 운영하면서 시간을 보내거나 지내 왔었더라면, 그 결과가 과연 지금과 같은 모습이었을까요?...

  아님 현정부는 진짜 싫고 증오스럽지만 노무현은 무조건 좋으니까, 과거 노무현 참여정부가 어떻게 깽판을 쳤든간에, 이제 쌍용 자동차 노사 협상이 끝났으니 어떻게든 해결되겠지~~ 라는 안이한 생각으로 노무현 참여정부의 과거 시행착오는 세세히 따져보지도 않으며 또다시 뒷켠으로 슬그머니 묻어 버리고, 지금같은 식으로 어정쩡하게 사태를 방치 관망하다가, 문제가 곪아 터져서 또다시 생존권 차원의 파업이 발생하면 노동자들을 응원하고 관련 소식들을 인터넷으로 전하고 현정부를 성토하면 만사가 해결되는 것입니까?

  다음 뷰에서 제법 이름이 알려진 어떤 시사 블로거는 쌍용 자동차 노조가 남을 자와 떠나야 할 자들로 갈리게 되는 현상황을 보며 노동자들의 연대가 깨졌다라고 강하게 비판하면서, 무슨 말장난마냥 게임의 법칙을 운운하면서 쌍용 자동차 불매 운동을 얘기하던데, 회사가 아예 공중 분해가 되느냐 마느냐의 중대 기로에 서 있는 이 마당에, 아직도 1980년대식 노동자 연대 투쟁을 생각하는 바보 멍청이들이 넘치는 것도 정말로 문제이지만,

  이미 외환 위기 이후 정규직과 비정규직이라는 넘을 수 없는 신분상의 차이로 인해서 완전히 둘로 갈라져 버린 노동자들의 정서와 참담한 현실 , 투자자들의 생리와 철저한 자본주의적 마인드 그리고 국내 자동차 산업 시장 전반의 구체적 여건과 사정등을 외면한 단견적 발상과 이상에 사무친 주장과 비판들은 완전히 넌센스가 아닐까요?...

  그리고, 바로 이런 측면에서 필자는 소위 민주 진보 세력들의 무슨 노동자 연대 투쟁같은 시대 착오적 발상이나 무능함과 함께, 과거 쌍용 자동차를 서둘러 중국 상하이 차에 매각한 노무현 참여정부를 강하게 비판하고, 그 원인을 철저하게 따져서 다시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태와 참담한 비극이 재발되지 않게끔, 사태의 원인과 전말을 국민들에게 소상히 알리고 사회적인 공론을 형성해야 한다라고 판단하는데,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진 출처 : 구글 이미지
Posted by 네 오 N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