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평론2012. 10. 22. 14:03

  지난 시간에 필자는 북한과 남한의 첨예한 갈등과 대립의 상징인 NLL문제의 난해성과 불가해성에 대해서 짚었었다.

 

 그 포스팅에서 분명히 밝혔듯이, NLL이 국제법상으로나 미국이 해제한 비밀문건상에 나와있는 원론으로는 영토선이 아니라는 입진보들이나 친노 세력들의 주장이 맞을 수 있겠으나, 한국이 처한 동북아 정세와 엄혹한 현실은 남북한 모두 1950년의 한국전쟁이 끝난 후 20여년이 넘는 시간 동안에, NLL에 대한 문제를 언급하지 못하게 하였다.

 

 

 당시의 냉전 상황과 미국의 세계패권과 서구 유럽으로 대변되는 석유문명체계에 문제가 생기거나, 그들의 영향력이 도전을 받는 일이 일어나는 경우와 NLL문제가 거의 겹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점을 들면서, 독도나 이어도의 영유권 문제에서의 실효적 지배권과 같이, 동북아 정세의 흐름과 미국 및 중국 일본같은 주변 강대국들의 전략과 장기적 비전에 입각한 새로운 남북관계나 국가관에 대한 사회적 공론 합의가 될 때까지는, 지난 1990년대 초에 맺어진 남북합의서의 내용대로 남북한이 각자 관할한 구역에 대한 지배권을 유지하는 선에서, 추후에 주변국들의 동향과 경제 여건과 안보 외교상 문제들이 모두 합치될 경우에 이르면, 자연스럽게 남북한이 유엔동시가입을 한 것과 같이 이 난마와도 같은 문제가 풀릴 날이 있을 것이라고 내다 보았다.

 

 

 석유문명과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새로운 프레임과 패러다임을 준비하는 미국 및 서구 유럽의 최정점에 이른 자본주의와 사회 인프라 복지 모델을 따라 잡으려고 중국 및 신흥공업개발국들이 석유문명의 발전단계를 일제히 따라가고 있는 관계로 인해서, 결국 미국과 서방 세계가 주도하는 새로운 판에 합류하려면 한국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고민해야 할 중대 시점이라고 냉정하게 진단하였으며, 이런 중차대한 비전과 장기적 계획들이 수립될 사회적 여건과 정치 혁신보다는 오로지 당리당략과 특정정파의 패권주의를 위해서 NLL문제를 정수장학회 문제로 희석시키려는 측면이 보인다고 하였다. 

 

 

 

 

 분명히 말하지만, NLL에는 남북한만이 아닌 미국과 서방 세계의 반대축에 있는 국가나 국제질서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며, 대단히 비극적이고 불행하지만, 남북한 당사자나 양자간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였던 것인데, 한겨레가 정수장학회 문제를 아주 이상한 방법으로 취재해서 마치 박근혜가 정수장학회를 이용해서 대선판을 주도하려 하였다고 여론을 형성하는 것과 함께, 그런 잘못되고 과도하게 경도된 여론에 밀려서 기자회견을 자청한 박근혜의 발언 중에서 일부의 오류나 역사인식의 문제점을 부각시키며, 무한논쟁과 소모적 정쟁의 장을 부르는 구태가 반복되어서, 보수와 진보 양자가 모두 잘못된 방향과 논점을 가지고 싸우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한다.

 

 

  바로 어제, 다음 뷰에서는 하나의 포스팅이 올라와서 다음 메인을 장식하고 SNS와 인터넷에서 이른바 펌의 횟수가 상당한 글이 보였는데, 이 글에서 박근혜의 기자회견을 반박한답시고 사용한 여러 근거나 준거들이 사실은 문제가 많았다는 점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박근혜가 주장하는 강압에 의한 재산헌납은 아니었다라는 말에는 필자도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박정희 군사정권이 들어설 당시의 상황과 그 이전의 일본치하의 식민지 시절의 역사와 해방 후에 일본이 방치하고 떠나간 수많은 기업체와 재산에 대한 처분과 집행과정에서 보여진 이승만 초대정부와 미군정의 행태들을 종합해서 보면, 반드시 '입진보들이 주장하는 내용대로만 해석해서는 이 문제가 끝도 없이 되돌이표를 찍게 될 것'이란 사실과 함께, 이런 식의 소모적 논의가 결국 누구를 위하거나, 어떠한 정치적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를 낱낱히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다.

 

 

 만약에, 정수장학회 문제가 단순하게 지분이나 돌려주고 국가의 강제적 재산환수에 따른 피해보상의 차원이라면, 굳이 이런 식으로 시끄러울 이유가 없었으나, 그 이면에 여러 복잡한 사안들이 아직도 남아 있기에 그런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겠다는 말이다.

 

 

 과연, 박정희 군사정부는 아무런 잘못이나 과오가 없는 한 멀쩡한 기업인만을 골라서 강압적인 수단으로 재산을 빼았고 탄압해서 경제적 상황과 생활을 어렵게 하고, 말못할 고충으로 세월을 보내게만 하였는지도 따져 볼 것이니까, 왜 아래의 포스팅이 일견 박근혜의 기자회견을 제대로 반박하였다고 보이다가도, 다른 한편으로는 진영논리와 친노 문재인 일파의 정치적 이득과 장래를 위해서 쓰여진 편향된 포스팅이라고 필자가 강조하는지를 독자 여러분들이 신중하게 판단하시길 바란다....

 

박근혜'정수장학회' 기자회견을 반박해주마 <--- 역사적 사실을 빙자해서 자신들의 진영논리를 강화시키는 부분만을 극대화시킨 전형적인 사기성 포스팅...말 그대로 도그X같은 얘기라서 포스팅 박스도 그에 해당하는 빛깔로 채색하였으니 이해하시기 바람...^^

 

 

 

 친노 시사 블로거와 입진보들 그리고 노무현 광신도들과 대다수 진보적 성향이라고 자신들을 규정하는 이들에게는 박근혜와 정수장학회는 말 그대로 하나로 묶여 있거나, 앞으로도 그런 이미지에 구속되어야 하는 필요성이 존재한다.

 

 

 박근혜를 공격하는 것과는 별개로, 정치적으로나 장기적 비전을 제시하고 일반 시민들에게 이를 수용하게 하는 부분에서 실패한 엄중한 책임과 과오를 모두 묻어버리고, 친노 자신들의 알량한 한줌도 안되는 정치적 도덕적 정당성과 정치적 생명을 위해서라도 그렇다는 말인데, 뭐가 문제인지 살펴 보자!!!

 

 

 박정희가 부일장학회의 김지태를 압박하고 그의 재산을 강제로 국가에 귀속시켰다는 사실을 강조하려면, 김지태는 입진보들이 강조하는 친일파나 기득권 세력의 전형에서는 멀어져야만 하였으며, 그런 이미지 환기나 대척점에 해당하는 사항들로 김지태를 포장하고 정수장학회의 부당성과 국가주의의 폐단만을 극대화시키는 것이 입진보들이나 친노 세력들이 정치 생명을 유지하고, 박근혜와 새누리당을 공격할 여지와 근거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하겠는데, 바로 그런 여지를 만들고자 김지태와 유사한 상황에 처한 삼양그룹 김연수 회장을 걸고 갔다는 것은 외려 입진보들과 친노 세력들의 무리수를 만천하에 보여준 계기였다는 얘기이다.

 

  문제의 블로거가 언급한 김연수라는 인물이 어떠한 사람인지 보기 전에, 김지태를 비호하기 위해서 언급한 구절들을 살펴보자!!!

 

 김지태가 조선주철공업 등을 통해서 돈을 번 것은 사실이지만, 친일파들처럼 적극적인 협조와 친일행위를 한 것은 아니라는 식으로 주장을 하고 있다. 여기에, 동양척식주식회사에 근무한 것만으로 그를 친일파로 매도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관점과 너그러운 마음씨~~~~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었는데, 과연 그런 기준과 주장이 김지태에게만 적용될 사항인지 의문스럽다는 것이다.

 

                                              ※원문출처:박근혜'정수장학회' 기자회견을 반박해주마 

 

 

 지금, 정수장학회의 전신인 부일장학회의 김지태가 근무하였던 동양척식주식회사가 도대체 어떤 회사인지 입진보들은 제대로 알고 있는가???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일본이 식민지가 된 한국의 농민들에게서 토지와 식량을 수탈하고 경제적 착취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악랄하기 그지없었던 일본 제국주의의 주체이자 경제적 침탈의 주체였던 회사인데, 이런 회사에서 근무한 것만으로는 친일했다고 볼 수 없다면 친일파에 대한 기준과 근거에 일대 변화가 생기지 않을까???

 

 

 입진보들에게 독립운동가 나석주와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식산은행의 스토리를 들려주고, 다시 김지태의 동양척식주식회사 근무와 함께, 그가 퇴직해서 불하받은 드넓은 토지에 대한 얘기와 이를 통한 부의 축적 얘기를 들려주면, 과연 자라나는 학생들이 그래도 김지태의 해방전 행적에 대해서 한점의 의혹이나 반감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암튼간에, 다시 얘기로 돌아와서 김지태가 동양척식주식회사에 입사하기 바로 전해인 1926년에 나석주 의사가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식산은행을 폭파하려고 하였으며, 폭탄을 투척하고 일본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다가 장렬히 산화하였다는 사실에서 한국의 입진보들이 그간에 주장한 내용들은 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

 

 나석주가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투척할 당시에, 이미 동양척식회사가 한국의 농민들에게 가한 수탈과 경제적 착취가 얼마나 극심하였으면 이런 의거가 있었겠는가!!! 특히나 나석주나 김지태가 동척과 관련된 극단적으로 상반된 행동을 보였던 배경에 일본의 식량난 가중과 이를 만회하려는 일본정부의 경제적 착취와 식량수탈의 통로가 동척이었다는 것도 함께 고려하면 더욱 좋은 말이 나오지 않는다!!!!

 

 일본순사보다 동양척식주식회사가 더 무섭다라는 당시의 은어들이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구글 이미지

 

 

 

 노무현과 그의 측근들이 정치적 절차나  정치적 부분에서의 과거사만 강조하고, 경제적 부분에서의 서민들의 아픔과 애환에는 눈을 감은 것이 일본 제국주의에 신음하였었던 한국민중들의 경제적 고충과 애환의 중심에 서 있었던 동양척식주식회사에 대한 역사적 몰이해나 의도적 침묵에 기반한 것이 아닐까라는 개인적 의구심마저 생긴다!!!

 

 

 아래에 필자가 발췌한 내용들을 꼼꼼히 읽어보시고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일본의 경제적 수탈이 어떤 것인지를 따져 보시길 권한다. 과연, 멍청한 시사 블로거의 주장대로 동양척식회사에 근무하였다는 이유만으로 김지태를 친일로 몰아서는 안된다는 얘기가 100%로 온당한 것인지 말이다!!!

 

 

 나석주라는 독립투사는 1926년에 우리 민족을 착취하고 국가의 부를 일본으로 가져가는 주요 창구와 주체였던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투척하였는데, 김지태는 나석주가 그렇게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한 바로 다음해인 1927년에 동양척식주식회사에 입사하여서 근무하였다고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말이다!!! 

 

 

 부일장학회의 김지태가 동양척식주식회사에서 건강상 이유로 퇴사하면서 불하받은 토지의 규모도 당시의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일본인들에게 불하하던 토지규모의 2배(울산농장 2만평...당시 일본인도 1만평 이상을 불하받지 못하였다는 사실과 비추어서 생각하시길...)를 상회하고, 이런 파격적인 조건의 토지불하가 당시 한국민중들 사이에서는 전례가 없었던 사실에서 보여지는 김지태와 일본 동양척식주식회사의 끈끈한 유대와 관계를 보더라도, 단순한 근무자였다고 미화하면 곤란하지 않을까???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김지태는 일본이 한창 한국에서 경제적 침탈과 착취를 강화하던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의 특수를 타고서 부를 축적하였으며, 그가 소유하고 있던 회사들이 일본의 군수물자나 전쟁에 쓰여졌다는 사실이 과연 일본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하지 않거나, 입진보들이 매도하는 친일파들처럼 자신의 부를 축적하기 위해서 친일행위를 한 것이 아니라고 자신있게 강변할 사안인가!!!

 

 

 이런 식의 행위들이 해방 전에 있었기 때문에, 김지태가 8.15 해방 후에 부일장학회를 설립하여서 학생들을 돕고 이승만 정부의 사사오입 개헌에 반대하는 일련의 정치적 포지션을 취하게 된 계기였다고 보여지지는 않는가???

 

 

 

 김지태가 5.16 군사쿠테타 이후에, 아무런 잘못이나 죄가 없는데도 억지로 끌려가서 재산을 강제로 국가에 빼았겼는지에 대한 부분들도 이론이 분분한 상황이 아니던가??? 

 

독립투사 나석주, 동양척식주식회사 '친일 김지태'에게 폭탄 투척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植株式會社) : 1908년 제국주의 일본이 한국의 경제를 독점 착취하기 위하여 설립한 특수국책회사.

 

일본은 (을사)보호조약이 체결 된 후 우리나라 산업자본의 조장(助長)과 개발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제국의회(帝國議會)에서 회사설치 법안을 통과시키고 서울(京城)에 본점을 두어 1천만 원의 자금으로 회사의 발족을 보게 하였다.

 

이 회사는 우선 토지매수에 힘을 써 1913년까지47,148정보(町步)의 토지를 10,731,196원으로 매수하고, 1914년에는 농공은행(農工銀行)에서 거액의 융자를 받아 전라도, 황해도의 비옥한 전답(田畓)을 강제로 사들였다. 이리하여 1924년에는 60,591정보의 토지가 회사소유로 화하고 회사 창립 때 현물출자(現物出資)라는 형식으로 출자 당했던 정부소유지 17,714 정보를 합하여 막대한 토지가 회사 소유가 되었다.

 

이와 같이 강점(强占)한 토지는 소작인(小作人)에게 빌려주어 5할이 넘는 고율의 소작료(小作料)를 징수하는 한편, 영세농민(零細農民)들에게 빌려 준 곡물(穀物)에 대해서는 2할 이상의 고리(高利)를 추수 때 현물로 받아 들였다. 1924년의 통계에 의하면, 소작료로 현미(玄米) 20,184석, 벼 457,089석, 콩 6,409석, 잡곡 9,907석, 목화 70,295근, 현금 116,260원, 등을 징수하여 일본으로 반출하였다.

 

그 후 이 회사는 착취로 사세의 확장을 보아 1917년 회사법을 개정, 본점을 도쿄(東京)로 옮기고 만주, 몽고, 동부러시아, 중국, 필리핀, 남양제도(南洋諸島), 말레이반도, 타이, 부라질 등에 지사를 설치하였다. 이리하여 우리나라에 17개의 지점을 두고 각국에 52개의 지하를 설립, 경제적 침략(侵略)을 도모하다가 패전과 함께 폐사(廢社)되었다. (國史大事典 ,李弘植 편저, 동아출판사 1977.3.30, pp 440)

 

독립투사 나석주(羅錫疇 1889~1926)의사

독립운동가 황해도 재령(載寧)출신, 23세에 만주로 건너가 4년간 군사훈련을 받고 귀국, 3.1운동 후 상해임시정부에 군자금을 거두어 보내고, 동지들을 규합 일본경찰과 면장 등을 살해하고 중국으로 망명, 중국 하남성(河南省)에서 한단군관학교(邯鄲軍官學校)를 졸업, 중국군 장교로 근무, 의열단(義烈團)에 가입, 1926년 12월 잔인무도하게 조국을 착취하는 일본의 동양척식회사(東洋拓植會社)와 식산은행(殖産銀行)을 파괴할 목적으로 국내에 잠입, 동 12월 23일에 식산은행에 폭탄을 던지고, 동양척식회사로 가서 수위 및 사원들을 사살한 후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이 되었다. 을지로에서 추격하는 왜경과 교전하다가 최후의 일발로 34세의 나이로 자결 하였다. (國史大事典 ,李弘植 편저, 동아출판사 1977.3.30 318pp)

 

 

 

친일파 김지태 (金智泰, 1908.7~1982.4)

1927년 부산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에 입사하였다. 1932년 폐결핵으로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퇴사하였다.

 

조선섬유한국생사(주) 사장, 부산상공회의소 초대 회장, 부산일보 사장, 경남육상경기연맹회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1950년 무소속으로 제2대 민의원, 1954년 자유당 소속으로 제3대 민의원을 역임하였다.

 

그의 자본가로서의 시초는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장의 인간적 신뢰로 동경의 본사와 의논해 불하받은 울산의 땅 2만 평이 자본가 변신으로의 첫걸음이었다. 직물공장으로 사업을 시작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지기공업(紙器工業)에 진출하였고 마침 터진 중일 전쟁으로 인해 사업 성공, 지기제조, 지류무역, 부동산업 등으로 인해 막대한 부를 쌓았다. 해방 후 조선견직(전 아사히 견직), 삼화고무, 제사업(製絲業) 등을 주축으로 전국적인 자본가로 성장하였다.(이 기업들이 대부분 귀속기업체라는 사실을 볼 때에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가 용인한(?!) 친일파들의 적산기업 인수와 하나의 궤를 같이 따라가고 있음...)

 

1949년 부산일보를 인수하였다. 1959년 부산문화방송을, 1961년 한국문화방송을 개국하였고, 1958년 부일장학회를 설립하였다.

 

1956년 12월 사사오입 개헌에 반대하다가 자유당 해당 행위자로 제명되었으며, 1957년 5월에 복당했으나 1958년 5월 제4대 민의원 선거에서 낙선하고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1961년 5·16 군사 정변 후에 부정축재 혐의로 구속되었으며, 1961년 12월 30일 부정축재 환수금으로 5억 4570만 환을 냈다.

 

그 후에 1962년 5월, 다시 국내재산도피방지법, 관세법 및 형법, 농지개혁법 위반 혐의로 군검찰로부터 징역 7년을 구형받았는데, 같은 해 6월 20일 구속 상태에서 부산일보, 한국문화방송, 부산문화방송 및 부일장학회 소유의 부산 시내 땅 10만 147평을 5·16 장학회에 무상 기증한다는 기부 승낙서에 서명하고 날인하였다. 그리하여 6월 22일 공소 취소로 석방되었고 5·16 장학회는 나중에 정수장학회로 바뀌었다.(위키 백과)

 

김지태 친일행적

김지태의 재산축적 과정은 다음과 같다. 김지태는 일제시대 가장 악랄했던 농민 수탈 기관 중 하나였던 동양척식주식회사(동척) 부산지점에 입사해 4년간 근무했다. 이때 김지태는 동양척식주식회사에서 너무 열심히 일해 과로한 탓으로 폐결핵에 걸려 5년 만에 회사를 그만두면서 회사 울산농장의 땅 2만평을 10년 분할상환 조건으로 불하받았다. 이 땅에서 수확한 벼는 분할상환금을 갚고도 매년 100석 이상이 남았을 뿐 아니라 그 땅을 담보로 대출도 가능했다고 한다.

 

그는 1935년 부산 범일동에서 제지회사인 조선지기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이 회사는 일본의 대륙침략 전쟁에 따른 군수물자 시장의 확장에 힘입어 날로 번창했다. 김지태는 이렇게 모은 자금으로 1943년 일본인이 경영하던 조선주철공업합자회사를 인수했으며, 1949년 적산(敵産) 기업이던 아사히견직(조선견직주식회사의 전신)의 관리인을 맡게 됐다. 1954년에는 신발제조공장으로 당시 전국 최대 규모였던 삼화고무를 인수해 전국 10대 재벌의 반열에 올랐다. 기업 활동을 하면서 김지태는 부산일보와 부산문화방송을 인수했고 2대와 3대 국회의원(부산 갑)을 지냈다. 1958년 김지태는 정수장학회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부일장학회를 설립했다.

 

 

김지태는 1962년 5월에 군사정부에 의해 부정축재자로 지목돼 구속됐다. 혐의는 밀수입, 국내재산해외도피, 농지증명서허위작성 등이었다. 당시 검찰부가 징역 7년을 구형했으나 공소 취하의 대가로 부일장학회의 기반이었던 부산 서면 일대 땅 10만 평을 헌납하고 풀려났다.(위키 백과)
 

<© 뉴스타운 >

 

 

 

 김지태가 사업을 어떻게 번창시켰으며, 일본에게 군수물자를 대면서 부를 축적하였는지는 위와 아래에 회색 박스 속에 있는 내용들로 확인하시길 바란다.

 

부산경제야사 인물편: 김지태에서 일부 발췌

울산농장을 담보로 부산 제2금융조합에서 융자를 받아 1935년 9월 범일동에서 조선지기(紙器)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원료는 일본 굴지의 제지회사인 왕자제지와 태양제지에서 공급받았는데 사업은 날로 번창했다.


 


회사설립 1년 뒤인 1937년 중일전쟁으로 전쟁 특수까지 겹쳐 회사는 더 한층 활기를 띠었다. 사업에 자신이 생긴 그는 지류생산업에 머물지 않고 식산은행 부산지점에서 거액을 대출받아 지류 무역업에까지 사업을 확장했다. 재운이 있었던지 오사카에서 물품을 배에 싣고 부산으로 오는 사이 값이 폭등하여 횡재를 하기도 했고 창고가 모자라면 공장 부근의 소 마구간을 빌려 물품을 쌓아 두었다고 한다.

 



그는 부동산업에도 손을 대 부산뿐 아니라 김해와 동래,경주에까지 진출해서 기존 울산농장 외에 동래와 김해의 농토를 중심으로 목산(牧山)농장을 설립하는 한편 부산부동산회사까지 설립했다.

 



이처럼 지류와 부동산업으로 거대자본을 축적한 그는 1943년 일본인이 경영하던 조선주철공업합자회사를 인수했다. 이 회사는 주물 위주의 기계류생산했는데 때마침 태평양전쟁 중이라 군수품 공업의 호경기에 편승할 수가 있었다.

 


그 무렵 김지태는 38세 젊은 나이로 부산에 거주하는 우리나라 사람 중 호별세를 가장 많이 낼 정도로 재산가로서의 탄탄한 기반을 갖고 있었다.

 

 

 

 

 얘기가 중반에 이르렀으니, 이쯤에서 다시 한번 정리를 하고 가자....

 

 

 부일장학회의 김지태는 해방 전에 동양척식주식회사에 근무하였었다. 그런데, 문제의 동척은 일본이 한국의 농민들과 토지를 수탈하고 경제적 착취를 위해 설립한 악질적인 제국주의 전형이었으며, 그 착취와 약탈의 강도가 너무나도 컸던 나머지, '일본순사보다 동양척식주식회사가 더 무섭다'라는 당시 세간의 은어가 광범위하게 회자되고 있었고, 이런 배경 때문에 나석주라는 독립투사가 동척에 폭탄을 투척하고 일본경찰과 대치하다가 장렬히 산화한 바로 다음해에, 김지태가 동척에 입사하였다는 사실이 보여주는 '역사적 진실'을 말이다!!!

 

 

 그렇게, 민족의 고혈을 빨았던 일본제국주의의 주체인 회사에서 근무하면서 일본인들과 친분을 쌓고, 이를 바탕으로 조선의 농민들에게 강제로 착취한 토지를 불하받아서 재산을 축적한 셈인데, 이게 적극적인 친일이 아니라고???

 

 

 그리고, 김지태가 그렇게 해서 소유한 회사들이 일본의 중일전쟁 수행과 태평양 전쟁의 진행에 도움을 줄 군수물자나 비품들의 생산에서 기반한 것인데도, 그것은 별것이 아니라고???

 

                                                                                                  ⓒYouTube에서 캡쳐              

 

 동척에 폭탄을 투착한 나석주와 그런 동척에 근무한 김지태를 잘 비교하시길...

 

 

 당시에, 김지태가 얼마나 잘 나가는 인사였는지는 그가 친히 집필한 평전에서 호별세를 가장 많이 내었다고 하는 부분에서도 보여지지 않는가 말이다!!!

 

                                                                                       ⓒYouTube에서 캡쳐 

             

 

 바로, 이런 경력 때문에 해방 후에 이승만 정권과 각을 세우거나 장학사업을 벌였지만, 결국 4.19학생 의거 당시에 부정축재자 명단에서 1호로 지목되어서 이미 장면정권 때부터 법적 처벌을 기다리고 있었던 형편이었다는 사실들은 모두가 숨긴체, 김지태가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박정희가 권력을 동원해서 재산을 강탈한 것처럼 묘사하면 곤란하지 않을까???

 

 

 물론, 박정희 정부가 강압적인 방법과 분위기를 풍기면서 부일장학회를 국가소유로 돌린 것은 분명하지만, 그 이전의 경위와 정황들도 두루 살펴야 하지 않을까???

 

 

 아래에, 해방 이후에 김지태가 매입한 부동산이나 토지에 대한 농민들의 원성이 있었다는 부분도 보수 세력들의 주장만이 아니라, 입진보들이 주장하는 상당히 신망을 쌓은 김지태였다는 사실을 충분히 감안하더라도, 4.19 학생의거 당시에 부정축재자 명단에 이미 올라서 학생들이 그런 부정축재자들를 일소하라고 요구하였던 당시 사회 분위기와.... 5.16 군사 쿠테타 전의 장면정부에서 이미 김지태에 대해서 여러 가지 법적인 제재나 처벌을 고려하였다는 불편한 진실은 분명히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YouTube에서 캡쳐              

 

 더더욱 골때리는 것은 바로 이 부분인데, 만약에 박정희가 정치적 정적이나 자신의 권력만을 위해서 재산을 환수하거나 강제로 국가에 귀속시킨 것이라면, 정치적 후환을 제거하기 위해서라도 김지태의 모든 재산과 사회적 관계를 모두 끊어버렸을 것인데, 이상하게도 김지태는 부일장학회를 국가에 헌납한 이후에도 사업에 매진하여서 은탑산업훈장까지 받았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냐는 것이다!!!

 

 

 박정희가 그런 식으로 김지태를 착취한 것이 아니라, 당시 사회가 원하던 수준의 부정축재자에 대한 재산환수를 한 이후에는 김지태의 사업활동을 보장하였기에, 그런 사업실적과 산업훈장도 가능한 것이 아니었을까?

 

 

 당시는 박정희라는 절대권력자가 기업을 육성하거나 국가주도의 사업이나 경제계획을 추진하던 매우 특수한 시기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더욱 분명한 것이 아니겠는가!!!

 

 

 아래에 보여지는 김지태와 박정희 모습과 은탑산업훈장에 대해서 잘 살펴보시길 권한다...

 

 

                                                                                                     ⓒ구글이미지

 

 

 재미있는(?!) 것은 부일장학회의 김지태와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관계인데, 노무현이 부일장학회에서 장학금을 받아서 공부를 하였고, 이것이 밑거름이 되어서 사법고시에도 합격하고 법조인으로써 살아갈 근거가 생겼다는 사실이며, 노무현도 지금의 자신이 있기까지 김지태의 도움이 컸다고 하는 말이 공공연히 나오는 것과, 지금 이 시각 김지태를 미화하고 박근혜의 정수장학회의 부당함을 강조하는 이들의 그릇된 부분과 논리들도 같이 고려하시길 바란다...

 

                                                                                               ⓒYouTube에서 캡쳐  

            

 

 그리고, 이렇게 해서 변호사가 된 노무현이 김지태 유족의 100억대 상속세 소송을 맡아서 김지태 일가의 재산을 보호해 준 과정과, 노무현 참여정부 시절에 유난스러울 정도로 정수장학회 문제와 김지태 유족들의 정수장학회 반환소송의 문제들이 튀어나왔다는 점도 유심히 살펴 보시길 바란다...

 

 

 그리고, 더더욱 불편한 사실은 바로 아래에 필자가 발췌한 모 시사토크쇼의 일부 내용인데, 정수장학회 문제를 친노나 입진보들이 아 난리를 치면서 공격하는 이유가 서울시 교육감이 정수장학회 이사장 역임의 권한이 있으며, 곽노현 서울시 교육감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정수장학회의 감사를 요청하고, 박근혜와 최필립 이사장을 한데 묶어서 공격한 것이라는 점들을 보라는 것이다.

 

김대중 정부 시절에 보건복지부 장관을 역임했던 김원길의 모 시사토크쇼의 발언 중 일부 발췌

“정수장학회는 소유권은 국가에, 이사장 임명권은 서울시교육감이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특정세력이 유력 대선후보에게 과거와 음모프레임에 가두기 위해 네가티브 공작을 하는 것”이라며, “농민으로부터 농지를 수탈한 동양척식회사에 다닌 후, 땅2만평을 불하받고 군수회사 등을 운영하며 친일행각을 해오다가, 탈세와 부정축재로 범죄혐의가 입증된 민족수탈자본가인 김지태씨를 애국자로 탈바꿈시킨 세력들이 정말 나쁜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방송에서 그는 “정수장학회의 최필립 이사장이 개인적으로 그만두려고 해도 본인이 그만두면 서울시 교육감이 보궐 이사장을 임명하기 때문에 (어떠한 거짓과 왜곡을 만들지 모르기에) 그만두지 못할 것”이라는 잘 알지 못했던 사실을 밝히면서 “제2공화국 장면 정부 때 이미 탈세 등의 범죄행위가 발각된 김지태 씨 등을 포함한 당시 재벌들을 처벌하기 위한 처리를 하는 중, 5.16이 일어나 군사정권에서 부정축재자들에 대한 정부의 재산환수작업을 마무리한 것”이라며 “정수장학회는 부일장학회(제2공화국)가 5.16장학회(제3공화국)로, 일부 출연되었고, 전두환 정권에서 정수장학회로 그 이름이 바뀌었으며, 정수장학회는 제5공화국에서 전두환이 명명한 것”이라고 말했다.

 

 

 

 자...김지태에 대한 냉정한(?!^^) 평가 기준 그대로 문제의 시사 블로거가 지적한 삼양그룹 김연수의 행적을 살펴 보자...

 

 

 김연수가 동아일보 사주인 김성수와 형제간이며 고려대에 막대한 지원과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에 더욱 가혹한 잣대로 김연수라는 인물을 재단하였다고 보여진다는 말이다.

 

 동양척식주식회사에 몸담으면서 맺은 일본인들과의 친분과 교류를 바탕으로 동척이 강제로 수탈한 토지를 불하받은 김지태와는 사뭇 다른 배경과 설립배경을 가졌던 김연수의 경성방직의 내용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이다!!! 




                                                                                           ⓒ구글 이미지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과 착취에 대응해서 민족자본으로 설립된 경성방직을 통해서 근대기업의 모습을 갖추고, 한국 산업의 상징과도 같은 모습으로 회자되었던 당시 경성방직의 설립자가 김연수라면 얘기가 어떻게 되는 것인가???

 

 

 특히, 그 물적 기반이 호남을 배경으로 하였다는 점은 주목할 부분이 아니겠는가!!!

 

 

 식량과 토지 문제에 대한 함의와 일본의 경제적 침탈이라는 흐름을 동시에 살핀다면, 도저히 친일파라고 단정해서 말하기는 곤란하다고 보여지는데 말이다!!!

 

 

 문제는, 해방 이후에 반민특위의 조사와 수사대상에 올라서 재판을 받았다는 것인데, 결국은 어떻게 판결이 났는지 좀 알아보시길 바란다!!!

 

 

 

 문제의 시사블로거는 이 부분에 대한 사과나 소명을 해야 할 것이다!!!

 

 

 지금 KBS방송사의 얘기로 물타기한다고 해서, 역사에 대한 편향성과 오류가 가려지는 것이 아니다!!! (이 부분은 김지태가 왜 다른 이들과 달리 부일장학회 문제로 논란이 생기며, 방송사 지분과 관련된 얘기들이 나오는지 결말 부분에서 따질 것이다!!!)

 

 

 

[2005년 재계인맥 혼맥 대탐구]삼양그룹 창업주 김연수家에서 일부 발췌

일반인들에게 ‘삼양설탕’(현 ‘큐원설탕’)으로 익숙한 삼양사는 한국 근대경제사를 주도한 명문 기업이다. 호남 거부의 후예인 김연수(金秊洙) 창업주는 일제하인 1924년 순수 민족자본으로 기업을 설립, 한국기업의 명맥을 이었다. 김 창업주는 형인 인촌(仁村) 김성수씨가 동아일보를 설립하고 꾸려가도록 뒷받침했고, 여러 차례 재산을 털어 고려대와 고려중앙학원의 기틀을 마련하도록 뒤에서 도왔다.



그러나 김 창업주는 일제하에 기업을 경영함으로써 최근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사인명사전을 편찬하면서 친일인사로 선정하는 등 사후에 ‘친일’ 시비에 휘말리고 있기도 하다. 때문에 근대 한국경제의 산증인인 김 창업주의 삶은 굴곡 많은 우리 근대사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27세에 경영인으로 출발

김 창업주는 15세 되던 1910년 12월8일 자신보다 두 살 위인 박하진씨와 혼인을 맺었다. 결혼 이후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거쳐 한국인 최초로 교토제대 경제학부를 졸업했다.



그는 고국으로 돌아온 이듬해인 1922년 형의 권유로 경성직뉴와 경성방직의 전무와 상무에 취임, 경영인의 삶을 시작했다. 김 창업주는 고무신과 ‘태극성표’ 광목을 대히트시킴으로써 일본자본과 맞서는 최대의 민족회사를 일궜다.



집안 내력을 잘 아는 김재억 삼양사 상임감사는 “30년대 경성방직은 우리나라 금융거래 절반을 담당할 정도의 민족 최대 기업이었다.”고 말했다.



김 창업주는 또한 농촌재건을 위해 소작농을 협동농업 형태로 결합한 근대영농을 시작했다. 이를 발판으로 1924년 삼수사(三水社)를 설립해 호남 일대의 소유농토에 대한 근대화 작업에 나섰다.

 

 

장성, 줄포, 고창, 명고, 신태인, 법성, 영광농장을 차례로 개설해 기업형 농장으로 탈바꿈시켰다. 간척사업에도 눈을 돌려 손불농장과 해리농장의 2개 지역에 1070정보의 농토를 만들었다. 이 시기에 상호가 삼양사(三養社)로 바뀌었다. 어느 날 한 작명가가 찾아와 ‘물 수’(水)를 ‘만인의 양식’이라는 뜻인 ‘기를 양’(養)으로 바꿀 것을 권했다고 한다.

 



김 창업주는 만주벌 개척에도 나섰다.5개 협동농장을 개설한 데 이어 봉천에 남만방적을 설립했다. 남만방적은 한국기업 최초의 해외생산법인이다. 그러나 1945년 해방으로 만주의 사업장들을 고스란히 놓고 철수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민족기업과 일제 치하에서의 약소국이 겪었던 기업가의 한계와 대단히 불편한 진실이 보이는 대목...)


 

 

 

 김연수라는 인물이 경성방직을 운영하면서 보였던 민족자본과 일제의 수탈이라는 배경과 함께, 보다 큰 그림에서 보자면, 결국 김연수가 일구었던 경성방직이 일본총독부와 일본 제국주의의 전략과 궤를 같이 할 수 밖에 없었던 한국근대사의 아픔과 약소국의 경제인의 한계와 모순이 무엇인지도 마지막에 다시 짚으려고 한다!!!

 

 

 

 

 문제의 시사블로거가 정권나팔수 운운하면서, 자신의 주장의 절대성과 무오류성을 강조하지만, 사실 이 뭐같은 시사 블로거가 친일파로 매도한 김연수의 경성방직이 일본이 설립한 조선방직에 대항하였던 회사였다는 사실도 잘 살펴보시길 권한다.

 

 

 필자는 물론이거니와, 문재의 시사 블로거가 독립투사이거나, 당시의 김지태 입장이었다면 해방 이후에 설령 자신에게 조선방직에 대한 운영권이 불하된다고 해도 한칼에 거부했어야 온당한 것이라고 감히 말할 그런 상황이 아닌가!!! 

 

 

 이승만 정부가 자신과 각을 세우려고 조선방직을 자신에게 불하하지 않았다라고 하는 관점과 함께, 이승만 정권이 자신들의 권력유지를 위한 자금처로 사용한 조방이든 혹은 김지태에게 불하할 예정이었던 조방이었든 간에, 일본 제국주의가 한국에서 수탈한 경제력과 국민들의 고혈의 상징인 조방이라는 생각도  함께 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조선방직주식회사

조선방직주식회사일제강점기 일제가 한국에서의 목화의 재배와 매매 및 면사방직과 판매에 대한 영리를 목적으로 1917년 11월 범일동일대에 세운 일본 미쓰이재벌[2]계의 방직회사이다. 1925년 부산공장에서 조면업을 시작하여, 1928년 대구공장 설립 등을 거처, 사리원 및 진남포공장(1933), 원주공장(1934), 대전공장(1935), 안동공장(1936), 춘천공장(1937), 김천공장(1939) 등 철도를 중심으로 공장을 설립하며 조면업을 확장시켜갔다. 1933년 지정공판제의 강화로 인한 재벌자본 중심으로 조면업 개편, 일제의 군수공업화정책에 편승하여 사업을 확장시켜 같은 미쓰이계의 남북면업과 더불어 조선 최대의 조면업체가 되었다.

 

일제강점기하에서 일본경제의 일부로 작동하던 한국내 공업들은 해방 이후 일본과의 단절로 재생산구조가 붕괴되어 혼란을 겪어야 했으나, 면방직공업만은 예외였다. 대규모 산업시설, 원면 제고 및 원조원면의 원활한 공급, 시장수요의 폭발적 증가로 인해 가장 먼저 조업을 재개할 수 있었으며, 그 중 조선방직이 단연 돋보였다. 조방은 전국 17개 지역의 모면공장과 2차 가공공장으로 대구의 메리야스 공장을 보유한 한국 최대의 면방직회사로 미군정의 직접통제하에 들어가 상무부 산하에 방직공장 운영부를 설치하고 귀속방직 공장을 직접관리하다가 정부 수립후 상공부 산하의 기업이 되었다. 1949년 2월에는 상공부 지시에 의해 대구 메리야스공장을 분리하고 11월에 정부의 방적관계 사업체 통합운영방침에 따라 대구방적공사(구 근시방적)을 흡수 통합하여, 조선방직 대구공장이 되었다.[3]

 

한국전쟁 당시 전쟁피해가 없이 가동된 방직회사는 조방과 조방 대구공장, 삼호방직뿐이었다. 방적기가 4만여추에 달하는 조선방직에 비해 삼호방직은 1만여추에 불과했기 때문에 조방의 위상은 더더욱 격상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로 인해 정치권의 영향력이 커지게 되었다. 자신과 정치노선이 다른 실업가 김지태에게 경영권(불하)이 넘어가는 것을 우려한 이승만이 불하를 취소하고 1951년 9월 경영과는 무관한 종로깡패 강일매를 자신의 측근이라는 이유로 관리인에 임명하였다. 이에 반발한 조방노조가 1952년 파업이 일으켰으나, 이승만은 초지일관 강일매를 지지하였다.

 

이후 1955년 2월 대구공장의 분리와 동시에 부산공장은 강일매에게 임대되었다가 그 해 8월, 35억환에 강일매에게 불하되었다. 그러나 방만한 경영과 시설개선에 쓰여야할 자본이 자유당의 정치자금으로 들어가면서 시설의 노후화, 체불임금으로 인한 파업, 불하대금의 연체 등 자금난이 가중되어 불하 3년만에 불하금의 2배에 육박하는 55억환에 달하는 부채를 지면서 강일매는 몰락하고 결국 조선방직은 막대한 부채를 안은채 1968년 4월 부산시로 넘어가게 되었다. 부산시는 조방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시청 등 각종 공공시설을 이설하여 새로운 도시중심지를 조성하기 위해 그해 5월 1일 범일지구 재개발사업 기공식을 시행하였고 조방은 문을 닫았다. 조선방직은 1969년 7월 법인청산 절차가 종결되면서 공식적으로 해산되었다.

 

조선방직이 있었던 자리에는 부산시민회관, 한양과 삼익아파트, 자유시장, 평화시장과 각종 호텔, 예식장이 들어서 있으며, 현재도 조방 또는 조방앞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4]

 

 

  오죽하면, 부산시에 아직까지 남아있는 조방이라는 명칭을 없애자고 일인시위를 하는 이가 있었겠는가!!!

 

 

 조방이 부산 경제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으며, 해방 이후에 미군정이 이 건물을 개조하여서 미국 문화원 등으로 사용하다가 1980년대의 미문화원 방화사건의 근원지가 되었다는 뼈아픈 역사도 잘 살펴 보시길 바란다!!!

 

 

 

 

 이런 가슴 아픈 역사를 알고 있는데도, 김지태처럼 조방 운영권이 이승만 정권과의 불화 때문에 자신에게 오지 않았다는 말들이나 주장들이 태연하게 나올 수 있다고 보시는가??? 막말로, 다시한번 강조하지만... 필자같으면 조방을 거저 주어도 안 받았겠다!!!

 

 

"조선방직 이름 딴 길" 이제는 바꿔야

부산경제야사 인물편: 김지태에서 일부 발췌

김지태가 부산지역 기업인에서 전국적 기업인으로 발돋움한 것은 한국생사를 창업하면서부터다. 한국생사의 모태는 1946년에 설립한 대동산업이었다. 이 회사는 조선견직의 원료 조달과 생산된 견직물 수출을 주로 하는 일종의 무역회사였다.


그 후 대동산업은 밀양 진주 진해 등지에 있는 제사공장을 인수하고 강원도 춘성에 60만정보의 뽕나무밭을 조성하여 관리했는데 1949년에는 회사를 서울로 이전,자본금 1억원의 이화상사㈜로 새출발했다. 전국에 걸쳐 설립 또는 인수한 생사회사가 16개사로 늘어나자 1955년 회사 명칭을 한국생사㈜로 바꿨는데 이때부터는 그야말로 실크계의 세계적인 회사라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때 시중에서는 진담반 농담반으로 세계 최대의 실크황제는 중국 마오쩌둥이고 그 다음은 일본에 있는 편창제사,그리고 세 번째가 한국생사의 김지태라 했을 정도다.



그러던 김지태에게 위기가 닥쳤다. 조선방직 이사로 있던 그가 1950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조방낙면(朝紡落綿) 사건에 휘말린 것이다.

 

 

내용인즉 조방에서 생산되는 군수용 광목에 불량품을 섞어 이적행위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이승만 대통령 연임 반대에 앞장섰던 야당 국회의원 김지태에 대한 정치적 탄압이었다는 것이 일반적 시각이었다. 김지태에 의하면 그 사건 때문에 그에게 넘어오기로 되어 있던 조방 관리권이 강일배에게로 넘어갔다는 것이다.

 

 

 

 필자의 막말조의 주장은 물론 입진보들의 그 잘난 독립투쟁사의 찬양과 논리대로라면 그렇다는 얘기이다!!!

 

 

 문제는 해방 이후에 일본이 남기고 간 소위 적산을 통해서 지금의 대기업과 재벌들이 탄생하였다는 불편한 진실에 있다.

 

 일본이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해서 본국으로 쫒겨간 이후에 한국에 그냥 방치된 굵직한 기업체들을 운영하고 불하받은 이들이 상당수 친일파라고 매도당하는 상황이 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렇게 방치된 적산을 통해서 오늘날과 같은 기업으로 성장하였다는 것은 대단한 성과이며, 경영상으로나 경제사적인 측면에서도 연구대상이었음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

 

 

 해방 이후에 극심한 사회혼란과 좌우이념 대립과 이승만 정부의 전횡과 미군정의 대한반도 운영방침이 맞물리면서 벌어진 적산 기업들의 불하 문제와 부일장학회의 문제도 결국 같은 궤를 갖고 있다고 보여지지 않는가???

 

 

 적산은 누구의 소유여야 할까??? 근본주의적이고 환원주의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그것은 바로 한국의 국민들이 일제 시대에 빼앗겼던 재산이므로, 해방 이후에 모구 원주인에게 돌아가야 하였겠지만 소련과 미국의 냉전과 세계대전 이후의 동북아시아와 태평양을 세력권안에 둔 미국이라는 세계 최강국의 패권과 석유문명체계의 흐름에는 맞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이상과 아쉬움들이 역사가 아닌 만약이라는 가정으로만 남은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런 적산을 통해서 부를 축적한 기업가 1세대 명단에서 경성방직이란 민족자본의 기업을 꾸렸던 김연수같은 이들의 이름은 해방 이후에 반민특위와 좌우 이념 대립의 표적권에 들어서 사라져버린 아이러니도 함께 보며 한국 근현대사의 아픔과 한을 재조명해야 하지 않을까????

 

 

 만약에, 제대로 된 과정을 거친 건국이었다면 이승만이 아닌 상해 임시정부의 김구가 한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어야 했던 것처럼, 경제 부분에서 그나마 한국의 민족자본과 산업기반을 유자하고자 노력하였던 김연수같은 이들이 적산의 최대 수혜자로써 해방 이후의 한국기업들과 경제계를 주도하였어야 되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다고 해서, 입진보들마냥 대한민국 건국과 역대정부 모두를 부정하는 극단적인 사관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니 오해하지 마시길...)

 

[한국기업성장사]일제가 버리고 간 회사들...한국대기업들의 싹을 틔우다

마침내 일본이 패망했다. 일왕의 무조건 항복 선언으로 종전이 되자, 그동안 무람없이 설쳐대던 일본인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현해탄을 건너 줄행랑쳤다. 길바닥을 질질 끌고 다니던 게다소리가 멎은 가운데, 일본인들이 미처 가져가지 못한 임자 없는 재산이 여기저기 즐비했다.

 

 

일본인들이 팽개치고 간 이런 재산을 이른바 적산(敵産)이라 불렀다.

일찍이 개항에서부터 8ㆍ15 해방이 될 때까지 일본인들이 조선에서 축적한 재산으로, 기업, 부동산, 유형 또는 무형의 동산과 주식 및 지분 따위였다. 미군정청은 동양척식의 농지를 포함한 적산 재산의 전체 가치를 3053억원(지금 돈 약 1520억 달러)으로 추정했다.



일제 강점기 때 우리 나라 주요 산업 시설은 대부분 일본인들의 것이었다. 주요 산업 시설의 80%가 일본인 소유였으며, 이 중 70%는 북한에 산재해 있었다.

 

 

이러한 일본 산업자본은 일제 강점기 때 모두 두 차례에 걸쳐 집중적으로 현해탄을 건너왔다. 1930년대 말 산업통제법이 발효되면서 비교적 통제가 덜한 한국으로 서둘러 진출해온데 이어,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미군의 폭격을 피해 많은 산업 시설들이 한국으로 소개됐다.


때문에 해방 직후에도 꽤 많은 산업 시설이 남으면서, 적산으로 분류된 기업의 수만 2700여 개를 헤아렸다. 당시 기간산업으로 지정된 대부분의 대기업은 모두가 적산이라고 보아도 틀림이 없었다. 민족기업이라고 해봤자 김연수의 경성방직, 김영준의 천일고무 등 대여섯 개가 고작일 따름이었다.


이처럼 수많은 산업 시설들이 종전과 함께 줄행랑친 일본인들의 철수 이후 임자 없는 재산으로 덩그러니 남게 됐다. 임자 없는 재산은 누구라도 먼저 차지하는 자가 곧 임자였다. 이러한 적산을 잡기 위해 너도나도 벌떼처럼 몰려들었음은 물론이다. 적산 가옥은 문패만 바꿔달면 주인 행세를 했다. 적산 토지는 말뚝만 박으면 내 땅이었다.



 

다만 적산 기업만은 덩치가 좀 컸던 탓일까. 서로 눈치만 살피며 머뭇거리고 있을 때에 미군정청이 법령을 선포했다. 일본인 재산의 매매는 일정한 절차를 밟아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또한 적산 기업에 관리인을 선임하거나 파견시킨데 이어, 얼마 지나지 않아선 적산 기업을 불하하기 시작했다. 이때 적산의 관리인에겐 최우선 순위가 부여됐다. 적산 기업의 관리인이 된다는 건 곧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차지하는 지름길이나 다름없었다.


경제계가 발칵 뒤집혔다. 저마다 승부욕이 넘치는 얼굴로 어떻게든 줄을 대기 위해 머리통이 깨져라 몰려들면서 브로커가 날뛰고 정치권력이 춤을 췄다.



황금알을 낳는다는 적산 기업은 그렇게 새 주인이 속속 나타났다. 다 그런 건 아니라지만 브로커든 정치권력이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사람이며, 연고권을 가진 사람이 대부분 하루아침에 새 주인으로 등장했다.


최초의 근대기업가 박승직의 후계자인 박두병은 소화기린맥주의 관리인이 되었다. 일본 기린맥주가 영등포역 철로 변에 건설한 소화기린맥주는 한국인 가운데 김연수와 박승직이 각기 200주씩의 주식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박두병은 그런 연고로 소화기린맥주의 관리인이 되면서 결국 불하받게 된 것이다. 박두병은 소화기린맥주(훗날 동양맥주, OB맥주)를 불하받으면서 포목상에서 맥주업으로 전업, 오늘날의 두산그룹을 키워내는데 발판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우리나라 맥주기업의 원조인 삿보르비루는 동경제대 경제학부 출신 민덕기의 소유가 됐다. 명성황후의 인척인 민덕기는 명문가의 후손답게 종로 관훈동의 태화관 건너편에 99칸짜리 저택에서 살았는데, 신분에 걸맞지 않는 맥주공장을 불하받아 조선맥주(훗날 하이트맥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국내에서 화약을 독점 제조, 공급하는 조선화약공판에 근무하고 있던 김종희는 불과 25살의 나이에 이 회사의 화약 공급 계열사인 조선유지의 인천공장 관리인이 됐다. 김종희가 일본이 남겨두고 간 창고 안의 재고를 몽땅 처분해서 자금을 만든 뒤, 그 자금을 다시 화약 공장에 투자한 것이 오늘날 한화그룹의 시작점이 됐다.


선경직물 또한 젊은 25세의 생산계장 최종건이 자치위원장이 되면서 연고권을 얻어 관리인이 됐다. 관리인으로 선경직물을 불하받으면서 지금의 SK그룹을 일으키는데 초석을 닦았다.



일본 무장고등공업학교 출신으로 관동기계공작소에서 공장장으로 근무하던 김연규 역시 일본인들이 철수하자 기계공작소를 불하받았다. 김연규는 이후 상호를 대한중기공업으로 개명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해방 직전까지 조선지기(紙機)와 조선주철 등 소규모 공장을 경영하고 있던 김지태는, 비록 이승만 정부의 눈 밖에 벗어나 국내 최대 기업 조선방직을 눈앞에서 아깝게 놓치긴 했으나 낙심할 필요까진 없었다. 곧장 아사히견직의 관리인이 되면서 전국에 흩어져있던 제사공장들을 인수, 한국생사그룹을 일으키면서 부산의 대표적인 기업가로 떠올랐다.


대구에서 양말공장을 하던 정재호는 조선방직을 넘겨받았다. 김지태가 강일매에게 빼앗겼으나 경영 부실로 내몰리고 말면서 결국 정재호가 붙잡았다. 그 밖에도 정재호는 자유당의 2인자 이기붕이 불하받아 친척에게 맡겨둔 오우방직 등을 인수받으면서, 1960년대 중반까지 삼성그룹에 이어 재계 랭킹 2위에 오른 삼호그룹을 키워낼 수 있었다.

 

대구에서 비누공장을 경영하고 있던 김성곤 역시 적산을 불하받으면서 업종을 바꿔 방직산업으로 투신했다. 그는 영등포에 자리한 적산 기업 경기염직에서 방적기 2천추와 함께 적산 기업 조선직물의 토지와 공장건물을 불하받아 금성방직을 세우면서 쌍룡그룹을 일으키는데 발판을 구축할 수 있었다.



평양 태생의 김형남과 포항 태생의 김용주는 조선 4대 방직회사 가운데 하나였던 적산 기업 가네보방직 광주공장을 불하받아 공동으로 경영하다, 각기 일신방직과 전방으로 분가했다. 김용주는 또 적산 기업 조선우선의 관리인을 맡다 불하받아 대한선주(훗날 한진해운에 인수)로 개명한 뒤, 1979년에는 첫 '1억 달러 운임의 탑'을 수상하는 해운 기업으로 키워냈다.


동양방직공사를 불하받은 서정익은 이 공장을 동일방직으로 키워내면서 지금의 동일그룹을 이룩했다. 종로 육의전의 마지막 후예 백낙승은 고려방직공사를 불하받아 태창방직으로 개편했으며, 함경도 청진에서 70여 척에 달하는 대형 선단을 이끌며 정어리 어업으로 재계에 뛰어든 설경동은 군시공업 대구공장을 불하받아 대한방직으로 개편시켜 오늘날의 대한전선그룹으로 키우는데 발판을 마련했다.



그런가하면 적산 기업 영강제과에서 근무하던 한국인 삼총사 민후식, 신덕발, 박병규가 해방 이후 불하받았던 공장이 지금의 해태제과다. 조선주조 군산공장을 불하받은 강정준은 지금의 백화양조를, 조선도시바전기를 불하받은 서상록과 장병찬은 이천전기를, 지금은 비록 CJ그룹에 인수 합병되고 말았지만 모리나가제과와 모리나가식품을 불하받은 함창희는 동립산업으로 한때 재계에서 반짝이던 별들이었다.


그밖에도 적산 기업을 불하받아 지금의 대기업으로 키운 사례는 헤아릴 수 없다. 삼성그룹의 이병철은 미쓰코시백화점과 조선생명을 불하받아 신세계백화점과 삼성화재로, 현대그룹의 정주영은 조선이연금속 인천공장을 불하받아 인천제철로, LG그룹의 구인회는 조선제련을 불하받아 LG금속으로, 대성그룹의 김수근은 조선연료ㆍ삼국석탄ㆍ문경탄광을 불하받아 대성산업으로, 삼화제철을 불하받은 장경호는 동국제강으로, 한국타이어ㆍ조선피혁을 불하받은 조홍제는 효성그룹으로, 대농그룹의 박용학은 조지야 백화점을 불하받아 미도파백화점으로, 조선제분을 불하받은 최성모는 신동아그룹으로, 동양그룹 이양구는 소야전시멘트 삼척공장을 불하받아 동양시멘트로, 천야시멘트 경성공장을 불하받은 김인득은 벽산그룹으로, 한일면업 대구공장은 내외방직으로, 삼척화학 카바이드공장은 북삼화학으로, 제천제철은 삼화제철로, 삼성광업은 장항제련소로, 조선전선은 대한전선으로, 북선제지화학공업은 전국제지로, 조선화재해상보험은 해동화재보험으로, 일본고주파는 풍한산업으로, 대성목재와 부산제빙냉장은 상호가 그대로인 채 주인만 바뀌었다. 단성사ㆍ국도극장ㆍ명동극장ㆍ문화극장ㆍ스카라극장 등은 주인을 잘못 만나 한동안 돌고 돈 끝에야 비로소 새 주인을 찾을 수 있었다.


적산 기업 가운데는 지금의 공기업도 빼놓을 수 없다. 경성전기ㆍ남선전기ㆍ조선전업은 한국전력으로, 소림광업은 대한중석으로, 조선주택영단은 주택공사 등으로 제각기 탈바꿈했다.



한데 대한중석은 공기업으로 뿌리내리지 못한 채 새 주인을 찾아 지구를 한 바퀴나 돌아야 했다. 일찍이 1934년에 설립돼 강원도 상동광산과 경북 달성광산에서 텅스텐 광산과 제련업으로 사세를 확장해온 대한중석은, 공기업 가운데 1호로 1994년 민영화의 길을 밟게 된다. 당시 대한중석은 명동의 금싸라기 땅과 100만주에 달하는 포항제철(포스코) 주식, 500만평의 상동광산과 15만평의 대구공장 부지 등 엄청난 자산을 보유하면서 낙찰가 661억원에 나승렬 거평그룹에 인수됐다.



하지만 김영삼 정권 때 IMF 외환위기를 넘지 못한 채 거평그룹이 도산하고 말면서, 대한중석은 이스라엘의 금속가공 기업 IMC로 넘어갔다. 그리고 2006년에는 워렌버핏의 투자회사 벅셔헤서웨이가 지분을 인수하면서, 지금은 초경합금 절삭 공구를 주력 생산하는 대구텍으로 이름과 문패를 바꿔 단 상태다.


해방 이후 적산 기업은 이보다 훨씬 더 많았다. 하지만 대한중석의 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지금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기업은 그리 많지 않다. 불하받은 기업이 그만 경영 부실로 내몰리면서, 또는 곧이어 벌어진 6ㆍ25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대부분 역사 속으로 종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이밖에도 미군정청의 원칙 없는 고무줄 재량에 의해 불하된 적산은 또 있었다. 주택 8000여 호, 선박 2000여 척, 상점 2000여 개를 헤아린다고 알려졌으나 더 이상 확인할 길은 없다.


또 한 가지 눈여겨볼 점이 있다. 적산으로 분류된 기업 수만 2700여 개나 헤아렸음에도, 일제 강점기 전성기를 구가하던 유력 기업가들의 얼굴은 온 데 간 데 없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동안 일본 자본에 맞서 꿋꿋이 버티어왔던 경성방직의 김연수, 광산 재벌 이종만, 화신백화점의 박흥식, 자동차왕 방의석, 동일은행의 민규식 등의 이름은 찾아보기 어렵다.



대신 적산에 몸담고 있던 25살의 새파란 기술자에서부터 낮은 직급의 사무원, 그리고 이병철ㆍ정주영ㆍ구인회ㆍ조홍제ㆍ박용학ㆍ이양구ㆍ김인득 등과 같이 일제 말기에 창업을 했거나 해방 이후에 창업한 젊고 새로운 기업가들이 그 자리를 대신 맡고 나섰다. 그동안 경제계를 호령하던 유력 기업가들이 해방 이후 '반민특위'와 같은 정치 사회 분위기에 휩쓸려 비틀거리고 있을 적에, 이같이 젊고 새로운 기업가들이 임자 없는 적산 기업을 거저줍다시피 불하받으면서 대거 등장케 된 것이다.

 



그렇대도 해방 이후 적산 기업 불하는 아무래도 너무나 성급하고 잘못된 역사였다. 국민의 자산을 국가 권력을 통해 사적 자본으로 전환시켜 해방 이후 자칫 해체 위기에 직면한 자본주의 질서를 재정립할 수 있었다는 일부 성과에도 불구하고, 정실에 치우치고 말았다는 오명을 벗어나기란 어려워 보인다. 경제적 문법에 따른 엄정한 기준에 의해서라기보다는, 그저 힘깨나 쓴다는 정치권력에 따라 결정됐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당시 미군정청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끗발, 예컨대 미군정청의 재정부장 고든 중령이랄지 인사행정처장과 물가행정처장을 역임한 한국인 정 아무개, 군정 요직에 있던 조 아무개와 장 아무개 등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정부 수립 이후까지 계속된 적산 기업 불하에서도 이러한 정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승만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도 정부와 자유당 실력자들의 이른바 '빽'이 등장한 것이다. 그런 빽만 잡으면 원하는 적산 기업을 손쉽게 차지하여 대자본가로 급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적산 기업을 손에 넣었다고 해서 대자본가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기업을 경영해본 학습이 돼 있지 않은데다, 원료 부족이며 기술 부족 등으로 대부분 정상 가동이 어려워 또 다른 주인으로 바뀌기 일쑤였다. 이같이 변화무쌍한 분위기 속에서도 반세기 넘도록 기업을 키워내어 오늘에 이른 기업가들을 보노라면 가히 놀라운 역량이 아닐 수 없다.


 

 

 

 

 경성방직을 통해서 당시 한국인들과 경제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고, 경성방직의 주요생산품에 한국의 국기인 태극마크를 달아서 판매하였다는 사실이 주는 '불편한 진실'은 모두 외면한체, 김연수는 김지태와는 다른 친일파라고 매도하면 끝나는 것인가???

 

 

 똑같은 잣대로 보면 그 정도와 수위에 얼마나 차이가 나거나 친일의 정도가 가려진다는 것인가???

 

 

 비판을 하려면 김지태도 김연수도 좋건싫건 일본에 협력하고 적극적인 경제적 이해관계를 도모하였다고 해야 필자가 반발을 안하거나 비판을 안하지, 이게 지금 무얼 증명하고 누구를 위해서 정권나팔수를 운운하며 저러는 것인지는 독자 여러분들의 판단에 맡기겠다.

 

 

 필자가 보기에는 친노 문재인을 위해서 자신들이 보려고 하는 역사만 보고 편집해서 어린 친구들을 선동하고, 그렇게 해서 자신은 경제적 이익과 정치적 목적으 도모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하려면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는 문제이니까 말이다!!!

 

                                                                                             ⓒ구글 이미지

 

 

 문제의 시사 블로거와 다음 뷰 편집진은 위의 사진을 보면서 경성방직과 김연수의 행적에 대한 균형잡힌 시각과 함께, 일제 시대에 김지태가 근무한 동양척식주식회사와 그가 설립한 회사들의 군수품 생산과 부의 축적 과정과...장면 정부에서부터 이미 부정축재자 명단에 그의 이름이 오르내렸던 배경에 대해서도 좀더 여유로운 모습과 사고로 바로 보았으면 좋겠다.

 

 

삼양그룹 김연수 회장과 반민특위의 무죄 판결

민족문제연구소는 지난 8월29일 친일인사인명사전 편찬을 앞두고 수록예정자 명단 3090명의 이름을 공개했다. 이 명단에는 삼양사의 창업주 김연수씨도 포함됐다.



김씨는 전쟁협력 분야에서 ▲1939년 만주국 명예 총영사 ▲1940년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이사 ▲조선방적 이사장 ▲1940∼1945년 중추원 참의(자문위원)를 지냈다는 이유로 선정됐다.



이에 대해 삼양그룹측은 대응을 일절 자제한 채 구체적인 언급을 회피하고 있다. 다만 그룹의 한 관계자는 “창업주가 일제의 압제에 죽음으로 항거하는 등 깜짝 놀랄 만하게 대항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나름대로 일제의 폭거에 맞서 민족자본을 형성했다.”며 “후세에 역사가들이 올바른 평가를 내릴 것”이라고 비교적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지금보다 반일 감정이 팽배했던 1949년 반민특위 재판에서도 창업주는 무죄를 받았다.”고 해명했다. 또 창업주는 창씨 개명도 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김 창업주의 일대기인 ‘한국 근대기업의 선구자’에는 일제시대 그의 행적이 상세히 수록돼 있다.6부로 구성된 전기에는 4부 ‘고난의 시절’ 편에 일제에 협조할 수도, 항거할 수도 없었던 고심의 일단들이 실려 있다.



김씨는 중추원 참의 임명과 관련해 1940년 5월 조간신문에 자신이 칙임참의에 임명됐다는 기사를 보고 내무국장 우에다키에게 항의하러 갔지만 결국 그의 완력에 굴복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그는 이후 ‘설사 내가 지녔던 일제치하의 모든 공직이나 명예직이 스스로 원했던 것이 아니고 위협과 강제에 의한 것이었다고 할지라도 일단 그런 직함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조국과 민족앞에 송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며 통렬한 자기반성의 글을 실었다.



김 창업주는 반민특위에 검거돼 7개월간 수감됐지만 이런 반성의 자세가 참작됐는지 재판에서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당시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고는 경성방직을 경영함에 강력히 일본자본과 싸웠고, 항상 한민족을 위한 경제적 기반확립에 노력했고, 경성방직의 상표를 태극기에서 모방한 것으로 보아 피고의 행위는 많이 참작할 곳이 있으며, 그 외의 관직 및 명예직은 일제의 압력에 못이겨 피동적으로 맡은 것이라고 증명되며, 또 피고는 한국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많은 학생에게 원조를 해 그의 혜택을 본 자의 수는 현재 수백명에 달하는 것이니 이 점으로 피고가 남긴 공적은 크다고 할 것이며, 기타 증인의 증언을 통해 볼 때 피고를 단순히 친일 및 반민족행위자라고 규정할 수 없을 것”이라고 판시했다.

 

 

 

 그런 차원에서....위의 박스 안에 있는 김연수라는 인물에 대한 반민특위의 판결을 그대로 옮긴다...

 

 

 “피고는 경성방직을 경영함에 강력히 일본자본과 싸웠고, 항상 한민족을 위한 경제적 기반확립에 노력했고, 경성방직의 상표를 태극기에서 모방한 것으로 보아 피고의 행위는 많이 참작할 곳이 있으며, 그 외의 관직 및 명예직은 일제의 압력에 못이겨 피동적으로 맡은 것이라고 증명되며, 또 피고는 한국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많은 학생에게 원조를 해 그의 혜택을 본 자의 수는 현재 수백명에 달하는 것이니 이 점으로 피고가 남긴 공적은 크다고 할 것이며, 기타 증인의 증언을 통해 볼 때 피고를 단순히 친일 및 반민족행위자라고 규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서서히 결말을 내려야 할 시점이 온 것 같다...

 

 

  문제의 시사블로거가 친일파로 매도한 김연수는 경성방직이라는 민족기업을 일구었고, 그런 경성방직이 김지태가 근무한 동척이나 해방 이후에 불하받고 싶어했던 조방같은 일본 자본에 대항해서 민족자본과 근대기업으로써의 틀을 갖춘 대표적인 기업이었다는 지독한 역사적 아이러니.... 

 

 

 

 그러나, 기본적으로 국가의 주권이 일본에게 귀속되어 있던 식민지 시절이었고, 더 크게는 일본이 동북아시아를 비롯한 태평양 전역까지를 자신들의 수중 아래에 두려고 하던 시기와 맞물려 있었으며, 한국의 국민들이 동척같은 악질적 경제수탈에 대한 반발과 민족적 저항의식 고취를 무마시키기 위해서, 경성방직같은 민족자본기업들을 암암리에 지원하고 후원하였다는 불편하고 서글픈 진실에서 지금 우리가 배워야 할 부분이 무엇이겠느냐는 점을 다루거나 살피는 것이 진일보한 역사와 과거사 논쟁이라는 얘기이다!!!

 

 

 보수 세력들이 주장하는 일본에 의한 근대화가 없었다면 한국은 발전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견해에는 필자도 100% 동의하지 못하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일제 치하에서 경성방직같은 기업들이 성장하고 발전하여서 한국 산업을 상징하는 과정 속에서 보여진 일본총독부와 일본의 패권전략과 암묵적인 경제적 지원은 깊이 고민하고, 지금의 현실에서 무엇이 문제인지를 보는 틀로써 충분히 재위치를 찾을 수 있지 않겠는가!!!

 

 

 일본이 후원한 경성방직이 민족기업의 상징이 될 수 밖에 없었던 당시의 암울한 상황과...해방 이후에 무주공산과도 같았던 적산기업들을 불하받아서 오늘날의 대기업이나 재벌이 탄생하였다는 불편한 진실과 함께, 일본을 대신해서 그 자리를 미국이라는 더욱 막강하고 거대한 세계패권세력이 차지하고, 한국의 경제 활동과 정치 문화 사회 발전에 깊숙한 영향과 롤모델을 제공하였으며, 지금 이 시간까지도 그런 흐름을 대체하거나 변혁할 정치적 사회적 여지가 그리 많지 않다는 현실을 일제 시절의 경성방직에서 찾아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 아닐까!!! 

 

근대기업 '경성방직'의 산파역...'근대공업의 소산' 눈여겨봐야

식민지 시기를 제외시키고 조선후기로부터 자본주의의 기원을 찾으려는 시도는 타당한 것인가?

식민지시기를 제외시키고, 조선 후기로부터 자본주의의 기원을 찾으려는 시도는 타당한 것인가? 전적으로 한국사의 내부에서 발전 요인을 찾으려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는가? 역사적 실제는 이러한 주장을 충분히 뒷받침하고 있는가? 라는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일제하 전라북도 고창 출신 김성수·김연수 일가와 경성방직의 성장에서 한국자본주의의 기원을 찾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내재적 발전론처럼 일본이 침략하지 않았더라면 어떤 일이 일어날 수도 있었을까를 상상하지 말고, 일본의 침략으로 실제로 일어난 일을 살펴보자고 제안하며 그 표본을 경성방직으로 삼았다. 중소 직포업체로 출발한 경성방직이 일본 제국주의의 지원과 협력으로 만주와 중국 본토에서까지 사업을 펼치는 대기업으로 성장하는 눈부신 발전과정에서, 현대 한국 자본주의의 원형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에커트는 한국에서 근대화의 기동력이 외부에서, 곧 일본제국주의에서 왔다고 주장한다.

 

 

그는 한국의 역사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은 일본에 의한 근대화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저자는 경성방직의 재정과 경영의 연구를 통해 식민지 환경 속에서 정부와 기업의 관계를 고찰한 후,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

 

 

식민지 조선에서 정부-기업 관계는 국가의 우위에서 이어졌으며, 조선 경제의 대일 의존성이 컸다. 이것은 정치적 조건에서 기인하는 것인데, 경성방직은 제품 판매를 위해 만주와 중국에서 일본 제국주의에 적극 협력하게 되었고, 일본 제국이 지속될수록 경방이 얻을 이익 역시 훨씬 더 커졌다. 요컨대 경성방직의 시장구조는 총독부정책과 거의 완전히 부합해 발전했다. 식민지 공업화의 진전과 더불어 한국인 자본가들은 경제적으로 번영했다.


저자 : 카터 J. 에커트 (Carter J. Eckert)
미국 워싱턴 주립대에서 일제하 경성방직과 고창 김씨가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5년 부터 하버드대 동아시아언어문화학과의 한국사 교수로 재직 중이다. 1993년 부터 하버드대 한국학연구소 소장으로서 한국학을 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한국을 연구하는 외국인 학자 중 그가 남다른 것은 그가 한국의 언어, 문화, 역사에 능통하다는 점이다. 1969년 평화봉사단원으로 한국에 와서 1977년까지 8년간 머무르면서 공부한 것이다. 그 연구의 탁월한 힘은 상당 부분 여기서 비롯된다. 이 책《제국의 후예》로 미국 역사학회의 존 페어뱅크상을 수상했다.
출처 : 제국의 후예 : 고창 김씨가와 한국 자본주의의 식민지 기원 1876~1945

 
 
 
 

 극우 보수세력들이 일본이 아니었다면 근대화는 없었다고 강변하는 부분만 타박하고 공격할 것이 아니라, 실제로 토지 소유에 대한 개념이나 경제적 관념들이 일제 치하에서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토지매입과 불하와도 상당한 연관성을 가지며, 해방 이후에 한국경제를 일으킨 주춧돌이 일본이 남기고 간 적산에서 비롯되었다는 '불편한 진실'은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역사적 과오와 실책에 대한 성찰에서 머물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시각 한국 사회와 경제와 정치 사회 분야에 주어진 위기와 이슈들을 해결할 장점을 찾아야 하는 시기가 아닐까???

 

 

 박정희가 부일장학회를 권력을 동원해서 강제로 환수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그러나, 그 부일장학회의 설립자인 김지태와 그가 부일장학회라는 재단을 일구는 원천인 부의 축적과정은 일제 시대의 경제인들이 보여준 전형적인 모습들 중에 하나였으며, 해방 이후에 그가 소유하였던 부일장학회가 국가로 귀속된 것이 강탈이나 장물로만 치부되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고 필자는 판단한다는 것이다. 

 

 자세히 따져보면, 박정희는 부일장학회를 환수하였지만 경영에 일절 관여하지 않았으며, 박정희 군사정권이 끝나던 시절까지도 박정희와 육영수 여사의 이름글자를 딴 정수장학회라는 명칭은 존재하지도 않았었으며, 그런 이름을 지어준 정부는 전두환 정부였다는 사실과 함께, 박정희나 전두환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언론을 통제하였으며, 그런 상황 속에서 유독 부산일보와 부산 MBC지분을 가졌던 김지태의 모습이 더 크게 부각된 것이라는 점을 바로 알아야 하지 않을까??? 

 

 

 정수장학회라고 이름이 바뀌고, 그런 일련의 과정을 초법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던 전두환 정권과 그 후의 정권에서 박정희에 대한 예우와 호구지책으로써 정수장학회의 이사장직을 박근혜에게 허락하였다고 보지는 않는가!!!

 

 

 오히려, 문제가 되는 부분은 정수장학회의 지분이 MBC와 부산일보와 관련이 있으며, 시대가 변하고 민주화가 되면서 언론의 공정성과 공영성 문제가 되는 시점이라고 한다면, 박근혜와 정수장학회를 마냥 엮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사실상 없다고 보여지지 않는가!!!

 

 

 분명히 말하지만, 박근혜의 정치적 입지와 대선정국을 위한 정수장학회 지분논의는 문제가 보통 많은 것이 아니지만, 그에 못지 않게 그런 비밀 얘기들이 어떻게 한겨레 신문에 입수되었고, 누구의 이해관계와 결정을 거쳐서 세상에 나오게 되었는지는 같은 무게로써 고려되고 법적인 처벌이나 국민적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박정희가 부일장학회를 국가에 환수해서 장학사업에 기여한 부분으로 모든 것을 정당화하는 보수 세력들도 문제이며, 그 반대로 김지태의 친일행적과 동척이라는 회사에 대한 의미와 민족사적 아픔들이 묻히는 것도 결연히 반대한다는 것이다.

 

 

 김지태가 일제 시절에 동척이라는 악질기업에서 불하받은 2만평의 토지가 누구의 고혈에서 나온 것이며, 그것의 원래 주인이 누구였는지를 따져보면 지금의 김지태 유족들의 행태도 좋게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에, 이런 논리로 접근한다면 해방 이후에 적산을 통한 기업들은 모두 원주인을 찾아주어야 하거나 국가로 귀속시켜야 하는데, 이게 가능하다고 보시는가???

 

 

 김지태가 가지고 있었던 부산일보와 부산MBC를 두려워해서 박정희가 더 강하게 김지태를 압박하였을 가능성도 필자는 충분히 인정하며, 전두환이 언론통폐합을 통해서 언론의 자유와 공정성을 말살하고, 민주주의에 커다란 장애와 난관을 만든 것도 사실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런 과정 속에서 동아일보나 삼성같은 기업들도 자신의 알토란같은 라디오나 텔레비젼 채널들을 국가에 빼앗겼으며, OECD국가에서는 유일하게 신문방송겸영 금지의 상황이 지난 2009년까지 지속된 배경이란 역사적 진실들을 모두 고려하고, 여기에 지금의 정수장학회의 바른 처리와 공영방송의 지분 문제를 생각한다면...

 

 

 

 지금, 친노 민통당과 문재인이나 다음 뷰의 뭐같은 시사 블로거의 정권나팔수나 권언유착같은 자극적인 언사나 정치적 스탠스로는 문제만 더욱 복잡하게 꼬이게 만들지 않겠는가 말이다!!!

 

 

 KBS건 혹은 MBC나 EBS같은 지상파 방송 모두가 과거 역대 정권들의 정치적 이해관계와 영향력 아래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구조를 전두환 이후로 지금까지 유지하면서 온 것도 모자라서, 아직까지도 본질은 놓아둔 체 정수장학회를 둘러싼 자잘한 헤게모니와 정치적 역사적 근거의 정당성을 놓고 싸우는 동안에도, 디지털 방송과 미디어 산업계의 동향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급변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보여지는 반역사적인 결과물과 파국은 누구의 책임으로 돌려야 하는가???

 

 

 과연, 부일장학회나 적산기업은 전혀 별개의 노선과 궤를 따라서 형성되었는가???

 

 

 만약에, 이런 식의 논리대로라면 언젠가는 동아일보나 삼성도 자신들의 잃어버린 재산을 찾겠노라고 나서도 할말이 없어지는 것이다...

 

 

 이런 식의 논의는 결국 친노의 정치적 입지와 이득 밖에는 차릴 것이 없다.

 

 

 삼성비자금 사건과 폭로 그리고 검찰의 수사 결과에 의해서 만들어진 재단에 친노 인사들이 관여하였거나 근무하면서 경제적 도움을 받았다는 뒷얘기나 극우보수 세력들의 반발을 사지 않기 위해서라도, 너무 눈에 보이는 정수장학회와 박근혜의 연결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

 

 

 서울시 교육감이 정수장학회 이사장직을 임명한다는 사실과 곽노현 서울 교육감의 감사와 일련의 정치적 공방과 그의 처지는 모두 하나의 그림을 지향한다는 것이 너무 불쾌하다는 것이다!!!

 

 결국, 정수장학회는 구실일뿐이고 이를 둘러싼 정치권과 몇몇 단체들의 이해관계의 문제라는 생각이 자꾸 밀려오게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지금 이런 식으로 역사를 재단하고, 각자가 자신들이 보고 싶은 부분들만 취합해서 싸우면서 향후 5년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친노 문재인이 주장하는 정수장학회를 사회에 환원한다는 의미가 도대체 무엇인가???

 

 

 친노와 그에 부응하는 시민단체들의 품으로 돌리자는 것인가??? 아니면, 진정한 장학사업과 공익사업에 부응하는 방향으로 완전히 정치색을 배제한 인사로 이사진이 꾸려진 장학재단의 출현을 바라는 것인가???

 

 

 어정쩡한 단어와 구호로 자신들의 목적과 이해관계를 관철시키려 하지 말고 분명하게 정수장학회 문제를 정치색을 배제하거나 , 아니면 여야 동수의 이사진을 구성하거나 해서 절충점을 찾기를 권하는 바이다.

 

 

 

 그리고, 정수장학회 문제로 희석하려는 NLL문제에 대해서도, 문재인 자신이 지난 2007년에 발언하였던 일련의 내용들에 대한 입장과 해명은 분명히 있어야 할 것이다.

 

 

 NLL이 남북한만의 문제가 아니라 중국과 미국의 세계패권의 최일선에 있는 상징적인 선이라는 부분과 함께, 과거 수십년간 국제법상이나 미국의 비밀문건에서조차 근거가 희박한 상태로써, 남북한이나 미국 및 소련 일본등의 주변국가가 방치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보다 심층적이고 거시적인 역사관과, 미래에 대한 사고와 확고한 안보관과 외교관이 절충된 발언이나 해명을 주문하는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정수장학회나 박근혜의 역사인식과는 별개로 문재인 자신이 가진 NLL과 남북한 문제와 2007년과는 사뭇 다른 발언의 취지나 배경은 분명히 짚어야 한다.

 


 
 
 
 


 

                                                                                             ⓒMBC뉴스
 
 

 과거사와 역사 놀음을 하더라도, 극우나 허접한 입진보가 아닌 합리적 보수와 균형감각을 지닌 진짜 진보의 모습으로 변할 수 있는 의제와 공정한 토론과 사회 정서가 자리잡기를 바랄뿐이다!!!

 

 

 가계대출과 부동산 버블 하락과 주택경기 침체 문제와 수출로 지탱되던 한국경제 전반에 걸친 총체적인 난국과 위기를 돌파하려는 시점에서 과연 정수정학회나 NLL문제를 이런 식으로 논의해서 일반 국민들에게 무슨 도움이 될까???

 

 

 북한과 한국이 임진각에서 대치를 하고 있고, 그런 이면의 이유가 삐라살포와 NLL과 정수장학회로 대변되는 보수와 친노 세력간의 감정적 골과 정치적 이해관계에 기반하는 것이라면, 그 책임은 친노 세력들에게 더 물을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라는 말이다.

 

 

 친노 입진보들의 논리대로 사회적 물적 토대가 한국사회 내부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이미 해방 이후에 적산을 통한 재벌과 대기업의 탄생에서 숙명적으로 정해진 것이라는 사실과 함께, 자원과 내수 시장의 여건이 부족한 한국이 경제적으로 활로를 찾을 부분을 내수에만 집중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며, 일반 서민들을 위한다고 선거 때마다 비슷한 공약과 구호로써 기대와 국민적 바램을 점점 희석시킨 결과가 선거참여율의 저하와 민심이반과 야권에 대한 지지율 재고로 이어지는 현실을 너무 외면하는 것은 아닌지 반성하시길 바란다!!! 

 

 

 
 
 
 
 
 

 친노 문재인과 야권이 주장하는대로라면, 향후 4년간은 새누리당이나 박근혜와는 도저히 대화가 되지 않으며, 그렇게 해서 생긴 사회적 갈등과 혼란은 새누리당만의 것이 아니기에, 필자는 안철수에게 정치개혁의 실낱같은 희망을 기대한다는 말이다.

 

 

 친노 시사 블로거처럼 경제적 여유와 사실관계에 기반하지 않은 진영논리적 사회정서와 정권교체 심리와는 많이 동떨어진 얘기일 수 있지만, 준비가 과연 되어있는 야권의 정권교체를 말하는 것인지는 프랑스의 올랑드 정권이 보여주는 곤경과 어려움들을 참조하시길 권한다.

 

 

 박근혜의 새누리당과 보수적 정서와 위기상황들을 아우르고 통합할 리더는 친노 문재인보다는 안철수였으면 하는 바램이 현실이 되기를 기도한다....어설픈 정치공학이나 성급한 단일화 얘기보다 더 소중한 사회적 가치와 시급한 과제들에 대한 성찰과 반성이 있었으면 좋겠다...

 

 

 필자에게 주어진 생명의 시간이 채 두달을 남지 않았고, 지금까지 한 모든 얘기들은 누구의 정치적 이해관계나 개인적 경제문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분명히 하면서, 오늘의 포스팅 주제인 정수정학회 문제와 NLL과 김지태와 김연수라는 인물에 대한 평가가 제각각인 이유를 고민하시길 바란다....


 
 
 
 
 


                                                                                                  ⓒ구글 이미지

 

 

 

 

 

P.S: 새누리당과 친노 민통당... 모두 다 구태라는 취지로 글을 썼는데도 정수장학회 관련 논란이 계속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보니까, 필자가 글에서 김원길 전 복지부 장관의 발언을 그대로 발췌한 것 때문인데, 그거 그대로 틀린 말 아니라고 보고 있다.

 

 

 막말로, 곽노현처럼 전투적인 진보성향 교육감이 또 나오면, 정수장학회 이사장직을 갈아치울 목적으로 감사든 뭐든간에, 끊임없이 문제삼고 생난리를 칠테니...말 그대로 정수장학회 이사장은 서울시 교육감이 좌지우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지...^^

 

 

 분명히 정관상으로야 법적으로는 이사들의 투표에 의해서 결정되겠지만 말이다(이거 상식인데 과연 몰라서 그대로 인용하면서 포스팅에 놓아두었을까요???^^  ㅋㅋㅋ)...이걸로 말꼬리 물고 늘어지면서 진중권하고 보수 성향의 일반인과 논쟁이 있었다고...^^  잘들 하시길...^^

 

 

 필자는 양측 세력 모두가 구태이며, 실컷 싸우다가 모두다 사라지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포스팅 작성한 것이니까 말이다!^^ 

 

 

 신나게 싸우면서, 양측 모두가 얼마나 구태이며 생각이 없는 집단인지, 온갖 술수와 거짓을 섞어가며 열심히 싸우시길...^^

 

 

 거짓과 진실이 뒤엉킨 정보와 자료들이 여럿 있고, 그걸로 필자를 특정한 방향으로 얽애 매려고 수작을 부리는 것을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이미, 목숨걸고 글쓰고 있는데 니깟 것들이 아무리 술수를 부린들 목숨을 건 사람한테 당할 수 있을 것 같은가!!! ^^

 

 

 나석주 의사와 관련된 사진이나 이야기도 일부러 어설프게 올려놓은 이유를 잘 생각하렴...^^

 

 

아참!!!...진중권 토론과 관련한 댓글 하나 사진으로 올려둔다...^^  필자가 무엇을 조롱하며 비판하고 있는지 잘 생각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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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네 오 N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