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평론2012. 10. 29. 08:09

 지난 시간에는 '친노 민통당의 청년비례대표인 김광진 의원'의 막말...즉, 6.25참전용사이자 전쟁영웅이라고 알려진 백선엽 장군에 대한 친일파 매도와 민족반역자라는 발언의 배경과 함께, 트워터를 통한 나경원을 향한 성희롱적 막말에 가까운 리트윗을 하게 된 김광진의 물적 정신적 배경이 과연 무엇인지를 짚어 보았었다.

 

 

 

 

 

 필자가 바로 아래 푸른 박스 속에 링크시킨 지난 포스팅을 보시면 알겠지만, 민족사관과 선악의 이분법 구도에 치우친 친일파 단죄의 역사 프레임이 김광진이라는 어린 국회의원을 크게 경도시킨 것이며, 이런 식의 프레임과 과거사 논쟁은 노무현과 그의 측근인 문재인 이해찬 유시민 같은 친노 세력에게서 본격화되거나 가시적인 흐름이 시작되었다고 진단하였고, 대단히 불행하고 짜증스럽게도, 이것이 지금의 변화하는 남북관계나 시시각각으로 바뀌는 대내외적인 정세에 맞지 않는 방향으로 수렴될 공산이 점점 커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를 객관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독일의 통일비용과 긍정적인 결과나 수치에 주목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통일을 이루면서 치룬 비용과 이면의 노력들, 동독과 서독의 경제적 격차에 따른 사회적 혼란과 역사적 기원에 따른 지역갈등의 요인들과 석유문명체계의 발전단계에 비추어서 북한의 경제적 자립과 그 수위와 정도에 대한 불길한 예측과 불편한 진실을 다루었다.  

 

 

 

 

 

 특히, 필자가 지난 포스팅에서 친노 입진보와 진보 성향이라고 자신을 규정하는 모든 젊은 친구들에게 분명히 밝힌 부분은...지금 한국 사회의 경제적 여건과 대내외적 상황들이 친환경과 보편적 복지와 지속가능하면서도 성장 패러다임에서 벗어난 새로운 체제로의 전환을 위한 사회적 합의나 공론이 과연 합치될 수 있는가라는 부분을 짚으면서, 노무현 참여정부식의 역사놀음이나 과거사 논쟁을 다시 하려는 친노 문재인과 민통당이야말로 구태 중의 구태 세력이며, 친노 세력들과 새누리당의 수구보수세력을 하루빨리 기성정치권에서 대체하지 않으면 미증유의 파국이 오는 것을 막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지난 포스팅을 통해서 극명하게 보여주었다고 판단하는데, 뜬금없는 포스팅 하나가 눈에 들어와 오늘 하루는 잠시 쉬어갈겸 불편한 이야기들을 몇 자 적어 보겠다...  

 

 

 

 ...한국 사회 입진보들이나 어린 친구들이 크게 간과하거나 잘 느끼지 못하는 폐단이 하나 있는데, 누군가가 크게 성공하거나 외국의 정책 사례와 역사에서 부각될만한 결과나 현상을 단순하게 비교해서, 이를 한국 사회에 바로 적용하거나 가까운 장래에는 실현가능하다라고 믿게 하는 글이나 주장들이 너무 많다는 점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필자도 블로그 포스팅을 처음 작성할 당시에...그러니까, 글의 전개라든가 논리의 일관성이나 포괄성 내지는 복잡성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었던 시기에는, 한국과 외국의 상황을 비교하면서 여러모로 부족한 포스팅을 선보인 적도 꽤 있었다.

 

 

 하지만, 필자가 3~4년전 당시에 그런 포스팅을 작성하면서도, 내심으로는 한국과 외국의 상황은 분명히 다르며, 이들이 이런 상황이나 현실을 구가하게 된 물적 토대나 사회 배경들...그리고 역사적 문화적 요인들이 따로 있을 것이라는 암시나 방향성만은 분명히 제시하려고 노력하였는데, 지난 5년간 이명박 정부의 임기 내에서 다음 뷰에 올라온 한국과 외국의 상황을 비교한 포스팅을 살펴보면, 대부분은 단순비교나 특정 국가의 정치나 교육 경제 복지 상황을 유토피아처럼 묘사하고, 한국 사회도 이들처럼만 하면 뭔가가 많이 달라질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갖게 하는 글은 이제는 지양해야 할 시점이라고 판단해서 비판을 가하겠다는 말이다...

 

 

 

 아래 파란색 박스안에 링크된 포스팅을 주목하시길 바란다.

 

 

 독일의 어느 교포 블로거가 작성한 포스팅인데, 독일의 교육제도가 워낙에 좋아서 노벨상 수상자가 넘치고 넘친다는 논조의 포스팅을 작성하였는데, 이것이 그간에 다음 뷰를 통해서 자신이 작성하거나 선보였던 독일식 교육의 장점의 결과라고 은근히 암시하고 있음을 깨닫거나 파악하지 못하는 이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막말로 초등학교 이상의 독해능력만 있다면 누구도 이해를 하지 못할 이가 없을만큼 해당글의 논조나 뉘앙스는 분명해 보이기에, 조목조목 한번 따져 보려고 한다...

 

 

 

  

 

 독일 교포 블로거가 논한 바와 같이 독일의 교육시스템과 사회적 인프라는 대단히 훌륭한 것이라고 보여진다. 그리고, 그런 교육적 시스템과 국가적 정책이 만나서 노벨상 수상자의 다수 배출이라는 결과가 나왔다고도 개인적인 판단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독일식 교육의 장점의 결과로 노벨상을 언급하는 것이야말로 결과적 수치나 수량의 많고 적음을 통한...다시 말해서, 규모와 양적인 성장에 기대는 프레임과 패러다임의 그늘이 여실히 보인다고 비판하면 지나친 과장일까???

 

 

 독일은 이미 19세기 후반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당시까지 세계최고의 과학기술과 의학기술이나 군사력을 보유한 국가였었다. 그리고, 과학을 상업과 현실에 접목해서 국민들의 생활과 경제적 수준을 업그레이드시키는 부분에 일찌감치 눈을 뜬 정치가와 사회적 분위기가 있었다는 점을 우선 지적하려고 한다.

 

 

 그리고, 독일의 과학계가 현실과 과학적 실용성을 접목하는 부분에 남다른 관심과 열정들이 정치권의 그릇된 판단과 독단으로 인해서 어떻게 망가지거나 빛이 바랬는지를 살펴서, 한국 정치계와 사회 구성원들에게 줄 수 있는 메시지나 역사적 교훈을 살펴보는 것이 훨씬 바람직하고 유익한 글쓰기가 아닐까???

 

 

 독일의 과학계...특히, 화학 분야의 업적과 발전 속도는 독일 물리학계의 전설들과 더불어서 과학사의 한페이지를 당당히 차지할만큼 그 내용이나 역사가 대단히 드라마틱하고 비극적인 측면이 있었다.

 

 

 프리츠 하버라는 독일의 천재 화학자의 일생은 한국 입진보들이 친일 논쟁을 하면서, 한번쯤 짚고 가거나 생각할 부분이 있다고 보여진다.

 

 

 19세기 말경에 봉건사회의 유지기반이던 식량문제는 한마디로 위기 그 자체였었다. 오죽하면,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느는데,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늘어난다는 논리를 펴는 경제학자가 있었겠는가 말이다.

 

 

 그런데, 이런 절망적이고 급박한 상황을 질소고정법이라는 화학의 힘으로 해결한 사람이 바로 프리츠 하버였다. 간략하게 표현하자면, 프리츠 하버는 19세기 문명의 끝자락에 떨어진 인류의 기아와 배고픔을 해결한 절대영웅인 셈인데, 그가 이런 전설적인 발견을 하고 난 이후의 생애는 말 그대로 비극이었다는 말이다...  

 

 


 

 

                                                                             프리츠 하버ⓒ구글 이미지 

 

 

  세계1차대전이 발발하자, 프리츠 하버는 조국인 독일의 명령을 받아서 질소고정법에 사용되던 방식으로 독가스를 추출하게 되는데, 이것이 인류가 전쟁에서 독가스를 대규모로 사용한 최초의 사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피해와 인명살상을 냄으로써, 프리츠 하버가 독가스의 아버지 내지는 독가스 화학자라는 불명예스런 수식어로 장식된 과학자로 남았을뿐만이 아니라, 그렇게 자신이 충성을 다바친 조국 독일이 히틀러의 나치스가 집권하자마자, 프리츠 하버가 유대인이란 이유로 독일에서 추방시켜 외롭게 생애를 마쳤다는 내용은 알만한 이들은 다 알고 있을 것이다.

 

 

 또한, 프리츠 하버에 대해서 역사적 평을 할 시에, 공식처럼 나오는 반응이라는 것이 프리츠 하버가 비록 19세기 후반에 인류의 절대적 위기의 원인인 식량난을 질소의 추출로써 해결한 공로는 인정하겠지만, 그에 못지않게 그가 세계1차전쟁 중에 합성한 여러 독가스로 인한 인명살상과 폐해가 너무나도 컸다는 점도 다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과학자의 윤리나 정치와의 관계에 대한 부정적인 주장이나 논리를 펼 시에 프리츠 하버를 단골소재로만 이용하는 상황들이 보이는 뭔가 많이 불공평하고 편향되어 있는 부분을 지적하겠다는 말이다.

 

                                                                            ⓒ구글 이미지 

 

 

  자... 잘 생각하시길 바라겠다...

 

 

 위에 필자가 게재한 세계1차대전의 사진 밑에 연혁이 있는데, 세계1차대전의 기간은 공식적으로는 1914년 7월부터 1918년 11월까지이다.

 

 

 프리츠 하버가 질소고정법으로써 노벨상을 수상한 시점은 1918년이니까 세계1차대전이 끝나는 시점이었는데, 어째서 인류의 발전과 학문에 이바지하는 과학적 공로를 세운 이들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명예상인 노벨상 수상자에 프리츠 하버가 들어 있을까???

 

 

 지금까지도 이 부분 때문에, 노벨상 스캔들이니 뭐니 해서 논란이 분분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과연 당시의 노벨상 수여에 무슨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었을까???

 

 

 프리츠 하버가 유대인이라는 생물학적 한계를 가지고서, 독일인으로써 살고자 조국 독일에 충성하려고 개발한 독가스가 살포된 제1차세계대전은... 엄밀히 말하자면 히틀러의 나치스와는 무관한 전쟁이었다.

 

 

 프리츠 하버가 조국 독일에서 추방당한 이유는 히틀러의 나치스가 집권하면서부터였고, 그가 개발한 독가스가 히틀러의 나치스 치하에서 개발되거나 최초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하시길 바란다.

 

 

  여기에, 독일이 프리츠 하버를 앞세워서 독가스를 전쟁에서 사용하자, 상대국인 영국도 독가스를 개발해서 똑같이 사용하였다는 부분도 분명히 하자...

 

 

세계1차대전 

프리츠 하버

독가스 과학자 프리츠 하버

두 얼굴의 과학자 프리츠 하버

독일 화학자 프리츠 하버

과학은 두 얼굴을 지닌다. 인류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 사용되기도 하지만 사악한 폭력에 이용되기도 하는 것이 과학이다. 1868년 오늘 태어난 독일의 화학자 프리츠 하버는 과학의 이러한 야누스적 면모를 여실히 보여준 인물이다.

 

 

그는 화학사상 최대 발견이라는 ‘공중질소 고정법’을 발견했다. 이로 인해 질소비료의 무한공급이 가능해졌다. 그가 아니었다면 아직도 인류는 기아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세계인구가 섭취하는 단백질의 약 3분의1이 질소비료에서 나온다.

 

 

 

하지만 그는 클로린을 비롯한 여러 가지 독가스를 개발, 1차 세계대전이 독가스를 이용한 대량 살육전이 되게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독일과 영국은 무려 22가지의 화학무기를 사용했다.

 

 

그는 개종한(개신교도) 유태인이었다. 암모니아 합성과 독가스 개발로 독일에 공헌했지만 조국은 유태인 하버를 받아주지 않았다.

 

 

1934년 나치에 의해 독일에서 추방당한 뒤 1934년 1월 29일, 스위스 바젤의 한 호텔에서 심장 발작으로 숨졌다. 그의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가 개발한 자이클론 B(Zyklon B)라는 독가스가 동족인 유태인을 죽이는데 사용된 것이다. 희생자 중에는 하버의 친척도 여러 사람 있었다.

 

 

 

 다시 강조하지만, 프리츠 하버가 조국 독일에서 유대인라는 이유로 추방된 해는 1934년이었고, 바로 그 해에 그는 심장발작으로 사망하였다.

 

 

 

 

                                                                        ⓒ구글 이미지 

 

 

  세계2차대전은 1939년부터 1945년까지의 기간에 치루어진 전쟁으로 역사가 기록하고 있으니, 프리츠 하버는 히틀러의 나치스와는 관계가 없다고 보는 것이 객관적이고 냉철한 역사인식일텐데, 왜 그만 유독 이렇게 역사적 악명을 뒤집어 쓰고 있겠는가를 좀더 깊게 보자는 말이다.

 

 프리츠 하버가 개발한 독가스가 세계2차대전 중에 어디에 쓰였는가???

 

 바로, 유대인을 학살하는 도구로써 쓰였다는 것이 그를 비극적인 역사의 인물로 만든 결정적인 계기가 아니었을까???

 

 

 지금 이 시간, 전세계를 주름잡는 미국의 브레인 집단이나 기업에 유대인들이 얼마나 영향을 주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으신가???

 

 

  프리츠 하버는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같은 동족을 배반한 배신자이자 나치스에 동조한 학살자 중에 하나로 보였을 것이 아닌가 말이다...

 

 

 그러니까, 세계1차대전이 종결된 1918년 당시에는 히틀러와 나치스가 독일 정치계 전면에 등장한 시기가 아니었으며, 세계1차대전의 발발원인도 민족주의와 각 유럽국가들의 정치 경제 사회적 측면의 갈등과 모순이 폭발한 것이라는 자성과 성찰이 있었기에...

 

 

 그리고, 비록 프리츠 하버가 독가스를 사용하였다고는 하지만 영국도 독가스를 개발해서 똑같이 전쟁중에 보복살상을 감행하였었고, 전쟁의 책임을 온전히 독일에만 물을 수 없었던 1914~1918년 당시의 복잡한 사회상이 노벨위원회로 하여금 프리츠 하버의 공로를 그대로 반영한 노벨상 수여를 하게 된 계기였는데, 이를 두고서 현재의 시각과 관점으로 노벨상 수여를 비판하게 되면 얘기가 어떻게 될까???

 

 

  핵심적인 포인트는... 결국 프리츠 하버가 개발한 독가스가 유대인 학살에 사용되었다는 사실이 과거로 소급되어서 역사적 단죄를 하고 있는 격이 아닌가 말이다!!!

 

세계2차대전

제2차 세계 대전(한자: 第二次世界大戰, 영어: Second World War 또는 World War II)은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인명 피해와 재산 피해를 남긴 가장 파괴적인 전쟁이다. 통상적으로 전쟁이 시작된 때는 1939년 9월 1일 새벽 4시 45분 나치 독일군이 폴란드의 서쪽 국경을 침공하고,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군이 1939년 9월 17일 폴란드의 동쪽 국경을 침공한 것이라고 본다.

나치 독일

나치 독일(독일어: Zeit des Nationalsozialismus, 문화어: 파쑈도이췰란드)은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아돌프 히틀러 치하의 1933년부터 1945년까지의 독일을 가리킨다. 과학자들이 많았고 과학기술이 우위에 있었다. 나치 독일은 일본 제국, 이탈리아 왕국과 동맹을 맺었고 이들 국가는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추축국이 된다. 나치 독일은 2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국에 패배하면서 멸망했다.

 

 

 

 어찌되었든간에, 프리츠 하버라는 화학자는 유대인의 신분으로써, 독일인으로 살고자 노력하였고, 천재적인 재능으로써 인류의 기아와 식량난을 해결하는 질소고정법을 발견하였지만, 그에 못지않게 세계1차대전 중에 독가스를 합성하여서 많은 이들을 죽였으며, 그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독일에서 추방당하고 죽고 난 뒤에도 히틀러와 나치스가 집권해서 독가스를 사용해서 유대인을 학살하였다는 사실이 과거로 소급되어서 프리츠 하버는 독가스의 아버지요, 그릇된 윤리와 정치 사이에서 배회한 잘못된 과학자의 전형이라고 기술한다고 치자면, 하이젠베르크라는 물리학자는 어떻게 바라 보아야만 하나??? 

 

 

 

                                                              하이젠베르크ⓒ구글 이미지 

 

 

 하이젠베르크라고 하면, 불확정성의 원리라는 물리학의 법칙이 따라 나오고, 그런 물리학의 이론이 양자역학이라는 현대물리학의 확립에 크게 기여하였다는 정도는 대부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하이젠베르크라는 물리학자가 히틀러의 나치스 치하에서 원자폭탄을 개발하는 연구에 몰두하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그가 나치스나 독일 민족주의에 대해서 호의적이었으며, 원자폭탄 개발에 대해서 자신감을 보였다거나 미국보다도 앞선 연구결과를 가졌던 시기도 있었다는 점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여기에서 정말 이상한 것은, 세계2차대전이 끝난 후에 독일의 과학계나 미국 및 유럽의 과학자들이 하이젠베르크를 지목해서 단죄하려고 노력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왜, 당시에 그들은 그러지 않았을까???...

 

 

 프리츠 하버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인해서 질소고정법을 발견하고 세계1차대전 당시에 독가스를 합성하고 이것이 훗날 나치스의 유대인 학살에 쓰였다는 사유로 인해서, 말 그대로 독일이나 미국의 입장 모두에서 부관참시를 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원자폭탄이라는 가공할만한 무기를 연구하고 개발하던 하이젠베르크에 대한 단죄는커녕, 그가 히틀러와 나치스의 원자폭탄 개발을 저지하려고 노력하였다는 설까지 난무하는 판이니, 뭔가 많이 불공평하지 않은가 말이다!!!

 

 

 분명히, 세계2차대전 당시에는 독일이 미국과 비교해서 훨씬 앞선 과학기술과 원자폭탄 연구의 실적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선 미국이 원자폭탄을 가진 최초의 국가가 된 이유는 하이젠베르크의 노력보다는 영국과 노르웨이의 첩보원들의 눈물겨운 헌신과 희생에 의한 노르웨에 중수공장 파괴 때문이 아니었던가...

 

 

 그에 반해, 프리츠 하버는 유대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여러가지로 불이익을 받았으며, 불행하게도 세계2차대전의 원흉으로 지목된 히틀러와 나치스의 유대인 대학살의 도구를 제공한 과학자로 낙인이 찍혔지만, 하이젠베르크는 그런 입장에서는 한층 자유로웠으며, 여기에 당시 물리학계와 과학계의 최첨병에 해당하는 양자역학의 확립에 이바지한 공로로 인해서 그 죄과가 가볍게 다루어졌다고 생각지 않는가???

 

 

 분명히, 히틀러의 나치스와 원자폭탄이란 가공할 살인무기를 개발하는 일에 열정적으로 매달렸고, 히틀러에 대한 충성 맹세나 나치스의 민족주의적 아리안족 우월 프레임에 대해서도 호의적이었던 하이젠베르크가 받았던 대우나 평가는 프리츠 하버에 비하면 하늘과 땅의 차이가 아니었을까???

 

 

 왜, 이런 차이가 생겼을까???

 

 

 프리츠 하버도 19세기 인류의 식량난 해결에 이바지한 과학계의 전설이며, 하이젠베르크도 20세기 현대물리학과 전자공학이나 정보 통신분야의 절대적 근거이자 기준인 양자역학의 확립에 기여한 과학계의 영웅인 셈인데, 왜...이 두 과학자 사이에는 이런 상이한 역사적 평가가 자리잡고 있을까???  

 

하이젠베르크와 국가주의, 그리고 나치즘

하이젠베르크의 거짓말

노르웨이 중수사건

노르웨이 중수 사건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이 핵 개발을 위해서 노르웨이산 중수를 획득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한 일련의 사건이다. 1934년 노르웨이 베모르크에 노르스크 하이드로가 지은 수력 발전소에서는 비료 생산의 부산물로 중수가 생산되었고, 연간 12톤이 생산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추축국이 중수 공장 설비를 독일로 빼돌려 나치 독일의 핵 개발을 지원하기로 하였다. 노르웨이 텔레마르크의 류칸 폭포에 있는 60MW급 베모르크 수력 발전소에 공습이 행해졌다.

 

1940년 4월 9일 독일이 노르웨이를 침공하기 전 프랑스 듁시엠 뷔로에서 당시 중립이었던 노르웨이에서 중수 185kg을 빼냈다. 공장 관리자는 전쟁 기간 동안 프랑스에 중수를 대여하기로 했다. 이후 중수는 오슬로, 스코틀랜드 퍼스를 거쳐 프랑스로 이동하였으며, 이후에도 공장에서는 중수가 생산되었다.[1]

연합국 측에서는 이 장비가 추축국 손에 넘어갔을 때 더 많은 중수를 생산하여 핵 개발 프로그램에 사용할 것을 걱정하여, 1940년부터 1944년까지 노르웨이 레지스탕스 운동의 일부 및 연합국의 전략적인 폭격으로 중수 생산을 마비시키고 생산된 중수를 파괴하였다. 각각 그로스(Grouse), 프레시맨(Freshman), 거너사이드(Gunnerside)라는 코드 네임이 붙은 작전이 계획되었으며, 이 작전들을 통해 1943년 초 중수 생산을 마비시켰다.

 

 

 

양자역학

양자역학(量子力學, 문화어: 량자력학)은 분자, 원자, 전자와 같은 작은 크기를 갖는 의 물리학을 연구하는 분야이다.

19세기 중반까지의 실험은 뉴턴고전역학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이루어진 전자, 양성자, 중성자 등의 아원자입자에 관련된 실험들의 결과는 고전역학으로 설명을 시도할 경우 모순이 발생하여 이를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역학 체계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 양자역학은 막스 플랑크의 양자 가설을 계기로 하여 에르빈 슈뢰딩거,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폴 디랙 등에 의해 만들어진 전적으로 20세기에 이루어진 학문이다. 양자역학에서 플랑크 상수를 0으로 극한을 취하면 양자역학이 고전역학으로 수렴하는데, 이를 대응 원리라 한다.

양자역학은 모든 역학, 전자기학(일반상대성이론은 제외)을 포함하는 고전 이론을 일반화한다. 양자역학은 고전역학으로 설명되지 않는 현상에 대한 정확한 설명을 제공한다. 양자역학의 효과는 거시적으로는 관측이 어렵지만 고체의 성질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양자역학 개념이 필수적이다. 예를 들어 드하스-판알펜 효과 는 양자역학을 통해서만 설명이 가능하다. 물론, 원자 또는 그보다 작은 영역에서는 분명해진다.

 

 

양자역학의 응용

학생: 양자역학이 현대기술에 어떻게 이용되나요?
  
  양자역학 자체를 직접 이용한다기보다 양자역학이 그런 기술의 바탕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셈틀(컴퓨터)을 포함한 모든 전자기술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반도체입니다. 반도체가 없으면 전자기술이란 성립할 수가 없어요. 예컨대 셈틀의 핵심 부품들은 모두 반도체로 만든 거지요. 그런데 반도체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느냐를 설명하는 것이 양자역학입니다. 양자역학이 없으면 반도체를 전혀 이해할 수 없지요. 반도체란 고전역학으로는 다룰 수 없고 양자역학 때문에 알게 된 것입니다.


 

 

 자...얘기를 조금 더 확장해서 전쟁의 원흉격인 독일이 아닌 세계2차대전의 승전국이자 참전의 시기가 늦었던 미국의 입장에 서 있던 과학자를 살펴보자...

 

 

 1945년에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는 히틀러와 하이젠베르크가 계획하고 연구하였던 유형의 폭탄이 떨어져서 어마어마한 사상자와 도시 파괴 그리고, 방사능 피폭이라는 씻을 수 없는 재앙을 초래하였다.

 

 이 원자폭탄의 위력이 어찌나 컸는지...이를 사용한 미국조차 그 파괴적 실상에 전율하였으며, 유럽 각국을 필두로 한 세계 지성인들 사이에서 원폭에 대한 두려움과 우려가 밀물처럼 일어나고, 이에 대해서 원폭의 이론적 근거를 마련하였던 아인슈타인이나 오펜하이머같은 물리학자들이 반전과 반핵으로 돌아섰다는 역사적 사실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거 불편해도 너무 불편한 얘기가 아닌가 말이다...

 

                                                                       ⓒ구글 이미지 

 

 

 

 세계2차대전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 독일과 미국은 각각 하이젠베르크와 오펜하이머라는 물리학자를 앞세운 원폭개발 경쟁을 하였으며, 이 경쟁에서 최종적인 승리를 한 이는 미국의 오펜하이머인 셈인데, 결국 이 상황에서 본질적으로 원폭개발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운 이가 있는가....

 

 

 세계1차대전에서도 조국에 승리를 안기기 위해서 프리츠 하버가 독가스를 사용하자, 곧 영국에서도 독가스를 개발해서 똑같이 사용하였다.

 

 

 하지만, 세계2차대전에서 원폭이 일본에 사용된 이후에, 공식적인 그 어떤 전쟁에서도 원폭을 투하해서 전쟁을 승리하고자 하는 국가는 아직까지는 없는데, 이 결과의 차이가 역사적 공과나 평가를 이렇게 다르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가???

 

 

 지금의 역사와 평가는 과연 누구의 관점과 세력권의 영향력을 반영하고 있을까???

 

히로시마 원폭투하

1945년 8월 6일 새벽 2시. 미국의 B-29 폭격기는 서태평양 티니안 섬 기지를 출발해 일본 히로시마로 향했다. 그로부터 6시간 뒤 오전 8시 15분경 히로시마는 원자폭탄 리틀보이의 폭격으로 시커먼 잿더미로 무너져 버렸다.

미국은 3일 뒤인 9일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자폭탄 팻맨을 떨어뜨렸고 이후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이로써 1945년 8월 15일 태평양 전쟁은 막을 내렸다.

지름 71㎝, 길이 3.05m, 무게 4t의 폭탄 덩어리가 히로시마 도심 상공 580m에서 터졌을 때 반경 2㎞내의 건물은 거의 모두 파괴됐고 도시 60%가 새카맣게 타버렸다.

당시 34만2천의 히로시마 인구 중 폭심지에서 1.2㎞내에 있던 사람 중 50%가 즉사했고 그 해 말까지 모두 14만 명이 사망했다.

또한 나가사키에서는 24만 인구 중 3만5천명이 즉사하고 이후 7만 명 이상이 숨졌다. 현재까지 원폭 피해로 숨진 사망자 수는 25만여 명에 달하고 생존자 역시 화상, 기형출산, 암 등 후유증으로 시달렸다.

 

원폭 피해자는 일본 군국주의의 희생자이자, 인류가 만들어내 최악의 무기인 핵무기의 희생자이기도 하다.

 

 

  하이젠베르크는 비록 히틀러에 충성맹세를 하고 아리안의 우월성을 믿어 의심치 않은 정황과 함께, 원자폭탄 개발의 지휘를 맡았다는 물릴 수 없는 죄과에도 불구하고, 승전국인 미국을 비롯한 유럽 각국의 이해관계와 원폭 사용에 대한 암묵적인 반성과 묵인이 작용하여서, 그 죄과를 크게 물지 않은 반면에...

 

 

 그 살상력이나 인명피해의 정도는 대단하지만, 원폭에 비하면 그 파괴력이나 살상력은 비할 바가 못되는 독가스를 합성한 프리츠 하버는 유대인이라는 신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고 독일에 더 헌신하였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후일 나치스의 집권과 독가스를 사용한 유대인 학살과 연루되어서 더더욱 역사적 단죄를 받고 있다고 평해도 크게 과장된 얘기는 아니지 않을까???...

 

 

 자.... 얘기의 시각을 조금 좁혀서 구한말 조선의 황제였던 고종의 손자인 이우라는 인물에게 집중해보자...

 

 

 역사에서는 이우가 일본의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서 중좌의 지위까지 받았으며, 히로시마에 발령을 받아서 이우가 히로시마에 도착한 시기에 미국이 히로시마에 원폭을 떨어뜨려서, 그가 원폭에 의한 방사능 피폭 때문에 죽었을 것이라는 심증이 가게 하는 대목으로 끝나고 있다.

 

 

 그리고, 비록 이우가 일본육사에 지원하였고, 중좌의 신분에 이르렀으나 일본 황족과의 혼인을 거부하고 조국의 땅에서 여생을 보내려고 하였다는 사실에 무게를 두어서, 결국 이우는 친일한 것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는데...일본 육사...그것도 중좌의 신분까지 올라간 일본 육사생도의 이미지만을 빌린다면...다시 말해서, 박정희를 지금 이 시간까지 열나게 비판하는 입진보들의 기준으로는 만주군관학교같은 변방의 육사도 아닌 일본육군사관학교와 대학을 졸업하였다는 것은 당시의 절대적 권력자이자 지배자인 일왕에게 충성맹세를 해도 수백 번은 하고도 남았을 것이란 식의 박정희 때리기식 비판이 얼마든지 가능하지 않은가 말이다.

 

 

 

 만약에, 이우라는 고종황제의 손자가 일본 황실과의 혼인을 거부하고 조선에 돌아오려고 하였다는 점을 들어서 친일이 아니라고 한다면, 박정희가 일본에게 충성한다고 썼다는 혈서나 만주군관학교의 추측뿐인 친일행적의 잣대보다도, 그 이후의 광복권과 관련된 행적이나 김구 선생이 바라본 박정희에 대한 개인적 평가들도 똑같은 무게로 평가나 비판을 받아야 할 것이 아닌가 말이다!!!   

 

 

 

 

 

                                                                         ⓒ구글 이미지

 

 

 

 

 민족주의적 사관과 선악의 이분법 구도로 볼 때에, 이우의 행적과 마지막을 장식한 히로시마에서의 죽음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일본이 조선을 강제로 병합하고 고종황제의 후손을 일본으로 데려가서 황국신민으로 만들려고 하다가 벌어진 일이니까 일본이 전부 책임을 져야만 하나???

 

 

 미국이 원폭을 사용하지 않고는...도저히 전쟁을 종결하거나 수행할 이유가 없었던 것일까???

 

 

고종황제 손자 이우와 히로시마

이우(李鍝, 1912년 11월 15일 ~ 1945년 8월 7일)는 대한제국 황실의 후예이자 일제 강점기의 군인이다.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 이강의 차남이다. 본관은 전주, 초명은 성길(成吉)이며, 아호는 염석(念石), 상운(尙雲)이다.[1] 1917년흥선대원군의 장손 이준용이 사망하자 당숙의 양자로 입적되어 운현궁의 4대 종주가 되었다. 운현궁을 상속한 후에 공위를 세습 받아 ‘이우공 전하’라는 공족의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사망 이후에 사시인 흥영군(興永君)에 추봉되었다.

 

일제강점기 조선 경성부 사동궁에서 태어나 일본 육군사관학교일본 육군대학교를 졸업하였고, 일본 제국 육군에 입대하여 계급이 중좌에 이르렀다. 일본 정부에 의해 일본 황족과의 결혼을 강요받았지만 조선인과 혼인하기 위해 저항하여 박영효의 서손녀 박찬주와 결혼하였다.

 

1945년 8월 6일일본 히로시마에서 원자 폭탄에 피폭되어 8월 7일히로시마 시 니노시마에서 사망하였다. 1945년 8월 15일경성운동장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으며,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의 운현궁 가족 묘지에 안장되었다.[2]

 

 

 

 어찌되었거나...다시, 얘기의 범위를 넓혀서 미국의 입장으로 돌아가 보자...

 

 

 세계2차대전 당시에 원폭개발을 둘러싼 미국 및 연합국과 독일의 첩보전과 피말리는 승부는 익히 알려진 내용이다.

 

 

 하이젠베르크와 오팬하이머는 독일과 미국이라는 자신이 속한 국가에 충성하고,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원자폭탄이란 무시무시한 살상무기를 개발하는 일에 총책임자를 맡았었다.

 

 

 만약에, 이유를 불문하고 인류의 생명과 번영에 해를 끼칠 과학적 발견과 연구에 봉사하였다는 이유로 프리츠 하버가 단죄를 받아 마땅하다라면, 비록 전쟁의 승리나 연구 성과나 결과에 상관없이 핵개발에 관여한 모든 과학자들은 국적을 불문하고, 역사적 단죄를 받아야 할 것이다.(원자력이 전쟁 이후에는 발전에 이용되어서 인류의 편익과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가 아무리 있다고 해도 말이다...입진보들의 기준대로라면 그렇게 해야 얘기가 제대로 성립되지 않는가!!!^^   물론, 필자는 그런 식의 입진보 사관이나 어설픈 현실인식에는 단호히 반대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였다...

 

 

 비록, 오펜하이머나 아인슈타인같은 과학자들이 반전과 반핵으로 돌아섰다고 하여도, 프리츠 하버가 만든 독가스로 많은 이들이 죽은 것처럼, 당시 일본의 히로시마나 나가사키에 있었던 이우를 비롯한 숱한 민간인들이 원폭에 대량학살된 책임을 공정하게 묻는다면, 현재 한국 사회나 전세계 서방 세계의 영향을 받는 나라들이 배우는 역사교과서는 크게 달라질 것이다...(비록 그것이 사상적으로나 체제를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주장이라고 매도된다고 해도, 분명히 아닌 것은 아니라는 입진보들의 원론적 관점이나 막가파식 주장이라면 이런 엄청난 결론이 도출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건 필자의 생각이 아니라, 온전히 친노 입진보들의 역사관점과 원론주의적 주장을 좀더 확장하면 이런 식의 불편한 결론이 나온다는 말이다!!!^^)

 

 

 왜, 필자가 친노 문재인과 김광진의 역사관이나 입진보들의 역사관이 편향된 것이며, 그릇된 인식의 결과로 인해서 일반 국민들에겐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는 정치적 이득을 위한 프레임이라고 비판하는지를 잘 생각하시길 바라겠다...

 

 

 

 

                                                                         오펜하이머ⓒ구글 이미지 

 

 

 세계2차대전당시에, 원폭을 개발해서 미국의 영웅이 되었다가, 당시 미국 대통령인 트루먼에게 각을 세우고, 여기에 공산주의자들과의 교류라는 혐의가 덧씌워져 메카시즘 광풍에 의해 마녀사냥을 당해서, 남은 연구 일생과 과학자로써의 정체성이 모두 망가진 오펜하이머의 비극이 결코 남의 일이며, 과학자만의 숙명이 아니란 사실을 친노 문재인과 김광진은 분명히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이제...슬슬 결론을 내려야겠다...

 

 

 노벨상의 수상자수나 챙기는 식의 마인드로는 결코 독일처럼 될 수 없다...또한, 막연한 방식의 독일이나 스웨덴과의 경제나 복지와 관련된 지표를 비교하면서, 한국 정부를 비난하거나 헛꿈을 꾸게 하는 행태도 수준이하라고 판단한다.

 

 

 또한, 역사논쟁에 있어서도 평화시의 관점과 잣대가 반드시 공정하지도 객관적이지 못한 이유가, 당시의 정황과 실상을 느껴보거나 경험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는 점도 강하게 지적하였다.

 

 

 특히, 세계1,2차 대전이나 한국전쟁같은 굵직한 근현대사의 세계사와 한국사의 총체적 결과물격인 대한민국의 건국사와 해방 전후의 친일 행적에 대한 좌파위주의 시각과 판단은 당시의 시대상이나 정서에 전혀 맞지도 않고, 급격하게 변화하는 지금의 시대상에도 걸맞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다...

 

 

 세계1,2차 대전과 한국전쟁은 자세히 따져보면, 결국은 한 시대의 시작과 세계화 체제의 재편과정에서 일어난 부대적인 사건이라고 보는 것이 정답에 가까울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금 전세계와 이에 속한 한국 사회는 새로운 세계체제와 질서의 확립이 가시화되기 전의 과도기라는 혼란과 갈등의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으며, 그 최종적인 역사의 판단은 누구도 재단하거나 100%로 예측하기는 어렵다는 사실(그렇다고 해도,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인구통계학상의 대변화인 고령화 저출산 문제나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적인 위기와 환경파괴 지구온난화로 대변되는 화석연료의 사용과 고갈의 문제와 물부족 현상이 부를 문명의 흥망법칙은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겠다...)과 함께, 이런 식의 근본적인 체제변화가 일어나는 시기에 과거의 프레임에 기반한 역사논쟁이 과연 사람들에게 이로운 것인지는...이미 새누리당이나 친노 민통당같은 기성정치권의 소모적 공방에 지칠대로 지쳐서, 안철수같은 제3의 인물과 정치 세력을 바라는 일반 국민들이 마음 속으로 판단하고 있을 것이다...


Posted by 네 오 N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