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비판2011. 12. 5. 06:50

 요즘 미국, 유럽은 물론이고 한국 사회에서도 가장 많이 회자되는 단어들 중에 하나가 바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일명 SNS라는 것은 이제 삼척동자도 다 아는 기정 사실(?)이며 , 시대적 명제인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10여년 전부터 월드 와이드 웹으로 대중화된 인터넷을 통한 기초적 형태의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와 정보 교류는 있었지만, 스마트 폰을 통해서 구현된 SNS가 주는 정보 습득의 속도와 정도는 가히 전례가 없는 것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이에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열광하며 정치, 사회, 경제, 안보, 교육과 같은 거시적인 이슈뿐만이 아니라 개개인의 일상과 그에 얽힌 여러 사연들을 타인과 공유하며, 그것을 통해 친밀감과 유대감을 나누고 이를 진정한(?) 나눔과 소통이라 명명하는 형국인데요...

 
 
 과연 SNS는 이미 구시대적(?)으로 보여지는 종래의 대의 민주주의를 비롯한 정치, 경제, 사회 전반의 문제를 시민들이 자발적, 주체적으로 나서서 제기하고 해결책을 제안하는 이상적인 통로이자 도구가 될 수 있을까요?...

 
 오늘 필자가 하고 싶은 얘기의 주제는 바로 SNS는 진정 이 시대의 희망이 될 수 있을 것인가인데, 우선 얘기를 본격적으로 진행하기 전에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고 이런 부분들과 연관시켜, 필자를 비롯한 우리 모두가 SNS를 통한 정보나 이야기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고 다루어야 하는지를 고민하고, 더 나아가서는 진정 SNS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희망이 되기 위한 비전을 한번 제시해 보고자 합니다.


집단 속에 속한 개인의 행동은 그가 혼자일 경우와는 상황이 많이 다르다?

 1964년 3월 13일 금요일 케서린 제노비스란 여성이 원스턴 보즐리라는 남성에게 무려 13차례나 칼에 전신을 난자당하여 살해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사실은 그녀가 그렇게 무참하게 살해되어가는 모습을 지켜 본 목격자가 자그만치 38명이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그녀의 불행을 경찰에 신고한 이가 한 명도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뉴욕타임즈를 비롯한 언론에서는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38명의 목격자들이 보여준 무심함과 침묵에 대해서 당시의 법이 어떤 형식의 처벌도 규정할 수 없다면, 관련 법들을 개정해서라도 그들을 처벌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만약 이것조차도 되지 않는다면 뉴욕 타임스 1면에 이들의 이름과 주소를 공개해야 한다라는 극단적인 견해까지 나왔었습니다.

 
 이 시점에서 필자가 여러분에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과연 그 당시 38명의 목격자들은 정말로 우연히도(?) 다른 이들보다 더 냉정하고 매몰찬 인성을 가진 이들로만 뭉쳐 있어서 그런 끔찍한 살인사건이 그대로 방조되고 벌어진 것일까요? 당시 목격자들의 증언은 다른 이가 있으니 나 하나쯤은 괜찮지 않을까라는 심정으로 그냥 바라본 것이었다는데, 여러분은 이게 과연 사리에 맞고 온당한 얘기로 들리십니까?

 
 위의 사례가 우리나라가 아닌 외국의 사례라서 실감이 잘 안 나신다구요? 그럼 또 다른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2002년 온 국민에게 감동과 환희를 안겨주었던 월드컵 4강이 있었던 바로 그 날... 서해에서 북한과의 교전에서 우리들의 아들이자 남편 그리고 아버지이기도 했었던 일단의 장병들과 장교들이 소중한 생명을 잃어버린 사건이 있었습니다. 평상시였다면 엄청난 사회적 파장과 정치, 외교, 안보적으로 나라 전체를 뒤흔들만한 일대 사건이었지만, 당시 한일월드컵의 분위기에 휩쓸려 아주 미미하게 언론에서 다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월드컵이 끝난 이후에도 전사자들에 대한 처우 문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유가족들에게 씻을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다시 한 번 안겨준 형국이었는데요...
 
  왜 당시 우리나라의 대다수 국민들은 이 사건을 나중에 알고서도 평상시와는 너무나도 달리 시큰둥하거나 사뭇 무책임한 모습으로만 반응을 하게 되었을까요?

 
 이런 상황에 대해서 달리와 라티네라는 사회 심리학자들은 책임감 분산(Diffusion Responsibility)이라는 용어를 정의하면서 어떤 사건이나 인물에 대해 목격하거나 관여한 사람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책임감이 분산되기에, 특정 인물이나 사건에 관해 보여준 무관심이나 방관에 대한 책임을 그 누구도 지지 않으려 하며, 애써 모른 척하거나 회피하려고 한다라는 매우 불편한 사회적 명제를 제시하였습니다. 이는 우리네 사회에서 흔히 얘기하듯이 다른 이들과 함께 하면 그만큼 세상이 밝아지며 훈훈해진다는 사회성이라는 명제가 어떤 특정한 경우나 시기 혹은 인물이 처한 상황에 대해서는 그저 허울 좋은 명분이 되거나 혹은 우리 모두에게 상황을 오판하게 하여 불필요한 사회적 논쟁과 더불어 애꿎은 희생양을 만들어내는 식의 그릇된 방법으로 이끌어 갈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까? 

 

평범한 개인이 펼치는 표현에 대한 자유보다 특정 개인의 표현의 자유가 훨씬 더 크다?

 필자는 이 글을 작성하기 며칠 전에 이 나라의 법과 질서를 수호하신다는 사법부의 모 부장판사님께서 한미FTA에 대한 비판적인 성격의 글을 올리고, 그에 100여명의 판사들이 동조를 하면서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그동안 한미FTA의 ISD조항에 대한 논쟁은 분분했지만 법 체계를 다루는 전문가이신 부장판사님이 주장하는 내용은 필자와 같은 일반인이 주장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무게와 파장을 지니며, 이는 소위 말하는 세상살이의 인지상정일 것입니다. 따라서, 이에 대한 공정성과 부당성에 대한 논쟁은 일반인인 필자의 영역이 아니며, 이 글에서 논하고픈 문제의 본질이 아니라고 생각되어 따로 언급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필자가 이 사건을 보며 매우 불쾌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정말 흥미롭다고 느꼈던 부분은 평소 사법부에 대한 야당의 비판이나 국민적 불신들이 이번에는 전혀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사법부를 두둔하고 옹호하며, 개인적 표현의 자유라고 찬양 일색(?)의 발언들만 넘치더라는 점입니다.

 
 하지만, 그런 의견을 제시한 모 부장판사님은 사법부 전체의 의견을 수렴하고 충분히 사안을 검토한 뒤 자신의 주장을 개진한 것입니까? 아니면 SNS라는 새로운 경로를 통해 자신의 평소 개인적 신념이나 사회적 가치관을 여과없이 피력한 것입니까? 야당을 비롯한 많은 국민들이 모 부장판사님의 개인적 의견이며 이에 대한 재제는 시대착오적이라고 주장할지 모르겠으나, 다른 한편으로 대다수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사법부라는 전체 기구의 주장이라고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이 불편한 아이러니를 어떻게 해석해야만 할까요?

 
 그리고 이런 사회 심리적 현상은 비단 이런 특수한 경우에만 보여지는 것만도 아닙니다. 우리가 어느 식당에 들어가 특정 종업원이 보여준 질이 낮은 서비스로 인해 감정을 상하고 그 식당에 대한 이미지 자체가 나빠지는 경우, 그리고 그 반대의 경우는 또 얼마나 흔합니까?

 
 여기서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사람은 결코 개별 상황이나 특정 인물이 펼치는 주장을 순수한 이성과 합리성, 객관성을 가지고서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며, 다분히 자신들이 기존에 가진 주관이나 감정들에 의거해서 재해석한다라는 점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특정 인물에 대한 사회 집단의 지나친 관심이나 반감은 잘못된 해석을 낳는다?

 
 필자는 모 부장판사님의 사건이 있기 얼마 전에 한미FTA 강행처리(?)에 얽힌 다소 유치한 뉴스를 하나 접하게 되었습니다. 민주당의 김진애 국회의원께서 한나라당의 박근혜 의원을 겨냥하여 올린 글이라는데, 한미FTA 처리를 둘러싼 여야의 극한대치 속에 박근혜 의원께서 국회 내 화장실에서 태연하게 화장을 고치더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짤막한 뉴스로 인해, 박근혜 의원은 안티팬들뿐만 아니라 많은 일반인들에게도 나라의 중대사를 앞에 두고서, 화장이나 하는 아무 신념도 생각도 없는 정치인으로, 한순간에 이미지에 일종의 낙인(?)이 찍히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여기서의 본질적인 문제는 박근혜 의원의 당시 심사를 본인 이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는데도, 반대 야당의 여성 의원이 올린 유치한 글 하나에 자신의 이미지가 심히 훼손당했다라는 점이 아닌가라는 점입니다.
 
 필자는 남자이지만 기분이 안 좋거나 컨디션이 조금 떨어진다라고 느껴질 때면, 화장실에서 수시로 면도를 하곤 합니다. 그럴 때면, 주변 사람들은 흔히들 오늘 데이트가 있느냐 혹은 무슨 좋은 일이 있느냐라는 반응을 보이곤 하였습니다. 필자가 보이는 면도에 관한 독특한 행동이나 습관을 그들은 자신들의 평소 습관과 잣대로 판단하기 때문이지요...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박근혜 의원이 당시 그런 중대사를 앞두고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화장을 고친 것인지, 아니면 어떤 특정한 상황이나 인물을 대해야 하기에 예의상 화장을 고친 것인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지만,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여성의 화장 패턴이나 정치인에 대한 부정적 기억과 감정이 결부되어서 민주당 김진애 의원이 올린 유치찬란한 폭로성 기사는 강력한 휘발성을 갖게 되었으며, 평소 박근혜 의원에게 반감을 가졌던 사람이라면 더더욱 자신의 생각이 옳았다라고 느낄 것이며, 박근혜 의원에게 반감을 갖지 않았던 무당파적 사람들도 별다른 생각 없이 그녀에 대한 반감을 품게 되며, 이 감정적 정서적 기억은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과연 민주당 김진애 의원의 그 유치찬란한 폭로성 기사는 박근혜라는 정치인을 100%로 진실되게 그리고 보여주는 적절한 뉴스였을까요?


결론

 필자는 이제 불편한 군중 혹은 집단 심리에 대한 이야기의 결말을 지어 보려 합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만은 정말 신중하고 합리적으로 모든 결정을 내리고 있다고 믿지만, 불행하게도 진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1964년의 뉴욕, 그리고 2002년 대한민국 사회에서 벌어진 집단적 무관심과 무책임함은 그 집단에 속한 개개인의 도덕적 결함도 책임감의 부재도 인성의 문제도 결코 아닙니다. 그저 해당 집단이 처한 특정한 상황과 그 속에 속한 개인의 감정이 빚어낸 비극이었습니다.

  모 부장 판사님의 한미FTA논란에서 자주 회자되는 개인의 표현에 대한 자유에 대해서도, 사람들이 저마다 주장하는 표현의 무게와 파장에는 커다란 차이가 존재합니다. 그래서 필자는 표현의 차이가 확연히 다른 인물이 주장하는 내용은 개인의 주장이라고 보기에는 어렵다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이런 경우에, 개인의 표현에 대한 자유보다 우리가 더 고려하고 신중히 저울질할 부분은 그 특정 개인의 사회적 지위나 영향력, 그리고 그것을 대하는 사람들의 일반적 잣대나 이중 심리를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라는 얘기입니다. 또한 특정 인물이나 집단, 혹은 상황에 대한 평소의 반감은 아주 짤막하고 왜곡된 정보에 의해서도 더욱 증폭되며, 설령 사후에 그런 이미지에 대한 해명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라는 점을 지적하였습니다. 최근 방송에 복귀한 주병진 씨를 한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필자나 여러분과 같은 이 사회의 평범한 구성원들이 가지는 일반적 윤리나 도덕적 잣대에 의해서 한순간에 이미지에 타격을 입은 뒤 본인은 얼마나 억울하고 힘들었겠습니까...

 
 따라서, 필자는 이런 주장을 하고 싶습니다. SNS는 분명 유례가 없는 정보 혁명의 도구이자 소통의 경로이지만 , 지금처럼 집단에 속한 개인의 심리나 감정에 의해서 정보가 왜곡되거나 비틀릴 수도 있다라는 인식이 의식 속에 깊이 배어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강력한 선동의 무기가 될 수도 있고, 자신들에게 반대하는 특정 인사나 집단을 악의적으로 공격하는 도구로 전락할 가능성이 너무나도 크기에, 정보를 바라보는 우리네 인식을 바꿔 줄 근본적인 교육 체계 개편이 필요하다라고 주장하는 바입니다.

 
 이미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인간은 그렇게 합리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않으며, 감정과 상황에 쉽게 굴복하거나 휩쓸리는 나약한 존재임을 현대의 많은 학자들이 연구한 학문적 연구와 성과를 통해 우리는 어렴풋이나마 이미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현대 심리학이나 기호학, 산업 혹은 인지 심리학,사회 심리학, 행동 경제학, 정보 사회학과 같은 과목들을 아주 어릴 때부터 기초 과정부터 심화 과정까지 나누어서, 학년이 올라갈수록 더욱 심화된 학습을 하고 정보를 바라보고 바람직스럽게 유통하는 방법을 가르쳐야만 하며, 그러려면 현행 교육 체제의 전면적 조정과 개편이 반드시 필요할 것입니다.

 물론 필자를 포함한 여러분 모두도 매사에 정보를 모두 분석하고 그것의 파장과 합리성, 객관성을 최대한 감정을 배제한 채 상세하고 면밀하게 다루는 단계에 있지도 않으며, 우리네 사회적 분위기도 전혀 성숙되지 않았다라고 감히 주장하는 바이며, 이에 대해서도 언론...그것이 주류 언론이 되었든 비주류 언론(?)인 SNS가 되었든간에, 관련 정보를 취재하고 정말로 많은 이들이 공감하며 자신의 정보 습득 경로를 되짚어 보고, 평소 주관이나 감정을 반성하고 돌아볼 수 있는 진짜 양질의 콘텐츠나 프로그램을 다함께 고민하고 기획하며 만들어 가시길 바라는 바입니다.

 
 그리고, 이런 부분들이 하나하나 현실화되고 대다수 국민들이 진정 정보를 주체적으로 해석하면서 사회 전반을 바라보는 시각을 가지기 전까지는...지금처럼 개인의 정보가 무단으로 노출되고, 특정 집단이나 개인이 그것을 악용하는 사례가 끊임없이 보도되는 시점이나 상황이라면 최소한의 규칙이나 규범, 규제는 반드시 필요하다라고 보여집니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민주주의와 산업 혁명을 이끌었던 시민 계급은 개인의 사적 영역, 프라이버시를 확립함으로써 자신들의 정체성을 발견하고 그 시대를 선도할 수 있었으며, 지금도 대다수 민주주의 국가의 헌법에는 개인의 자유와 사생활 보장이라는 조항이 포함되어서 종래까지는 그 가치에 근본적인 변화가 오거나 큰 문제가 일어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이 정보의 속도와 량이 역사상 유례를 찾아 볼 수 없고, 개인의 사생활이나 정보의 보호가 결코 완전하게 이루어질 수 없는 불완전하고 과도기에 해당되는 시대적 상황이라면...또한 SNS와 관련된 분야와 산업의 폭발적인 증가와 함께, 관련 법안들이 서로 상충되거나 사각지대가 생기고 있는 현실 속에서라면...우리는 이제 개인의 인격과 관련된 사적 영역, 프라이버시에 대한 개념도 다시 잡아가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필자가 주장하는 이런 모습들이 현실화된다면, 분명히 시민들이 주축이 되는 완전한 직접 민주주의를 SNS라는 경로를 통해서 구현할 날이 분명히 올 것이라고 생각되며, 그런 사회적 흐름을 이끌어가는 진짜 스마티즌들이 이끌어가는 선진 대한민국을 필자가 살아있을 때 보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사진출처: 구글 이미지

Posted by 네 오 NEO
  여러분은 성매매 여성을 주변에서 보신 적이 있나요? 만약, 그런 여성을 보셨다면, 어떤 생각들을 떠올리십니까? 대부분의 남성이라면 본능적으로 해당 여성의 얼굴과 몸매를 한번쯤 훔쳐 볼 것이고, 여성분들이시라면 자못 눈쌀을 찌푸리거나 혐오스런 마음으로 해당 성매매 여성들을 넌지시 바라 보시겠지요? 

  필자도 남성인 관계로 그런 여성분들을 우연히라도 보게 되면, 거의 본능적으로 해당 여성의 얼굴이나 가슴, 몸매의 굴곡에 시선이 가서 꽂히곤 합니다. 그러면서도, 관념상으로나 머릿 속으로는 필자와 같은 혈기왕성한 남성들의 성욕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여성의 성까지도 철저하게 상품화시키는 자본주의의 논리가 이렇게 무섭구나라고 생각하며 절치부심하곤 합니다.

 
 프롤로그
  그리고 바로 이런 측면에서, 지금도 경제를 수박 겉핥기식으로 아는 분들은 자본주의를 민주주의에 부차적인 것이거나, 사회 구성원들이 원한다
면(?!) 언제든지 바꾸거나 선택 혹은 통제할 수 있는 체제, 이념 정도로 간단하게 치부하거나 생각하시겠지만, 필자는 그런 식의 어설프고 순진하며 이상에 찬 이분법적 견해와 단순 무식한 사고 체계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어떤 한 국가가 민주주의 체제든 혹은 그것과는 다른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체제를 지녔던간에, 그 곳에 자본주의와 시장의 논리가 일단 침투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정도의 차이만 존재할 뿐, 사람들이 보이는 행태는 세계 어디에서나 매우 흡사하게 변해 버리고 마는데, 그런 모습의 일환이 바로 성매매 여성들이 아닐까 싶어서, 오늘은 영화 인터걸을 통해서 러시아 성매매 여성들의 실상을 진단하고, 결론 부분에서 필자가 하고픈 얘기들을 조목조목 소개하면서 이 포스팅을 마치고자 합니다.


   
                                                                              ※사진 출처: 구글 이미지

영화 인터걸의 시대적 배경, 그리고 구소련 개혁파들에 대한 강렬한 의문이 생기다
  여러분들은 혹시 알고 계신지 모르겠지만, 성매매 여성들의 거리가 지금의 러시아에서 공공연히 자리를 잡은 것은 그리 오래된 얘기가 아닙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러시아는 구소련의 후신격인 국가입니다. 구소련은 한때 자본주의 체제의 본산인 미국과 일대 자웅을 겨루었던 세계 최고의 초강대국이자,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영토를 지닌 공산주의 체제의 국가였지요.

  따라서, 자본주의 체제와는 다르게, 소위 시장의 원리보다는 공공재의 개념과 국가의 역할이나 기능이 매우 강했었습니다. 그리고, 개인의 사익 추구나 각 집단간의 사적 이해 관계보다는 국가 혹은 사회 공동체를 위한 삶을 살도록 규정하고, 그런 이념과 사상을 태어날 때부터 교육을 통하여 끊임없이 주입시켰으며, 국가 경제는 철저하게 계획 경제의 개념으로 움직였더랬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게도, 그렇게 철저하게 교육을 시키고 공산주의 이념을 주입시킨 사람들의 노동 의욕은 갈수록 떨어져만 갔고 방만해진 정부 내 관료들의 무사안일함과 부정 부패는 극에 달했으며,  사회 전반에 대단히 경직적이고 보수적인 사고가 넘쳐 흐르다 보니까, 점차 구소련 사회 전체가 활력을 크게 잃어 버리면서, 최소한의 의식주를 해결할 경제적 여력마저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급기야 198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는 소비에트 연방에 속한 여러 군소국가들을 지원하기는 커녕, 중앙 정부를 유지하기조차 어려운 참담한 실정에까지 이르렀으며, 바로 이것이 구소련의 경제적인 위기를 어떻게든 타개하려던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를 낳은 시대적 배경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와중에 나온 영화가 인터걸이었는데요. 필자가 짐작하기엔 아마도 지금 한국의 10대와 20대는 이 영화를 잘 모를 겁니다. 그래서 잠시, 인터걸의 줄거리를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인터걸 개봉당시 고르바초프를 위시한 구소련의 개혁파 세력들은 이 영화를 보며 " 인터걸이야말로 페레스트로이카의 진정한 산물 " 이라고 찬탄하였다고 전해지는데, 당시 필자는 바로 여기에서 강렬한 의문을 가졌었습니다. 
 
  당시 미국과 자웅을 겨루던 세계 초강대국 소련의 최고 권력자와 개혁을 주장하고 그것을 실행하던 구소련의 최고 엘리트인 개혁파 세력들이, 당시 구소련의 경제가 아무리 어렵다기로서니, 고작 성매매 여성의 삶과 사랑을 다룬 영화 한편을 보고서, 그토록 극찬을 하고 구소련 내에서만 영화 관램객이 무려 4천만명에 육박하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울 수 있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 의문은 당시 어린 나이의 필자가 이해하기엔 너무 많은 경제적 지식과 역사적 배경을 가졌음을 훗날 깨달았는데요. 
필자가 끊임없는 학습과 성찰로써 훗날 깨달은 고르바쵸프를 위시한 구소련 개혁파 세력들의 생각은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구소련은 위에서 필자가 언급한 바와 같이, 공산주의 체제의 국가였습니다. 따라서, 일체의 개인적인 욕망이나 사익 추구를 금기시하다 보니 사회가 점차 극단적으로 보수화되는 것은 필연이었겠지요. 자연히 유교적 문화와 가치관이 잔재해서 성문제에 관한한 제대로 된 공론조차 나오지 못하는 지금의 한국 사회처럼
, 구소련도 성과 성담론을 극단적으로 터부시하였으며, 그로 인해 당시 구소련에서는 지금의 러시아에서와 같은 성매매 여성들의 거리는 존재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폐쇄적이고 경직된 체제가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더 이상 존속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그로 인해 소위 시장 개방의 물결이 구소련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자, 성적인 측면도 활짝 열리게 되면서 인터걸이라는 존재가 생겨났고, 이것이 영화로까지 만들어지게 되었으며 당시 소련인들의 시선을 단박에 사로잡았던 것인데요..

  ...문제는, 당시 고르바초프나 구소련의 개혁파 세력들은 그저 모든 것을 돈으로만 환산하려는 자본주의 체제보다는 인간적인 가치와 사회 공동체적 이상을 추구하려는 공산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100%로 확신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생각이 영화 인터걸의 주인공인 타냐가 경제적 안정을 원해서 스웨덴으로 가지만, 결국엔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다시 소련으로 돌아간다라는 기본 줄거리에 그토록 열광하게 만든 배경이었던 거지요. 

  하지만, 여러분들도 이미 알다시피, 고르바초프와 구소련의 개혁파 세력들이 확신에 차서 추진하던 이른바 페레스트로이카로 대변되던 시장 개방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항한 공산주의 체제의 우월성 증명이 결코 아니었으며구소련 체제내에 시장 개방의 물결이 가속화될수록 급격하게 사회 전반의 통제력을 상실하면서 결국 속절없이 무너졌고, 이제는 역사 교과서의 한 페이지로써만 남게 되었습니다.     

  당시, 구소련의 붕괴와 몰락을 외신을 통해 바라보면서 소위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점과 함께, 그로 인한 필연적인 역사적 종말을 갈망하였던 필자나 그 밖의 많은 운동권 선후배들은 커다란 충격과 방향 상실을 경험해야만 했습니다. 당시 필자도 그랬었지만, 한국 사회내의 수 많은 사회주의 혁명의 이상가들은 소위 물질 만능주의를 끝없이 부추기는 자본주의 체제를 극도로 경멸하였으며, 자본주의가 민주주의적 가치와 인간의 천부적 기본권을 보장받는 데에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겼었기 때문에, 더더욱 구소련 붕괴 당시의 정신적 충격은 상당했더랬습니다.

  하지만, 선뜻 이해하고 받아 들일 수 없었던 현실에 대한 인정과 자기 반성, 그리고 성찰과 학습의 깊이가 점차 심화되고,  대학 졸업후 사회에 진출하여 정말로 돈 많고 능력이 있으며 똑똑한 이들을 많이 알고 사귀게 되면서, 그리고 사회와 회사를 통해서 이론이 아닌 실무적인 경험들이 하나 둘씩 쌓여 가면서, 또한 간간히 외국 출장등을 통해 현지 실정을 하나하나 알게 되면서... 

  20대 초반 무렵의 필자가 거의 신앙처럼 믿고 간직하였었던 무슨 가치와 사실의 구분같은 이분법적인 생각이나 민주주의적 가치 추구만이, 이
세상의 전부라거나 혹은 그것을 추동하고 바꾸는 근본적인 힘이 아니었음을 분명하게 깨달았던 것인데, 이제 그 성찰의 일부를 여러분들에게 소개하면서 오늘의 글을 마치겠습니다. 

에필로그
  구소련의 고르바초프와 개혁파 세력들은 공산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경제적 위기를 극복하려고 자본주의와 시장의 논리를 일부 받아 들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비록 자본주의와 시장의 논리가 공산주의 체제에 들어와도 사회 구성원들의 투철한 공동체적 의식과 가치, 그리고 공산주의 체제하에서 수십년간 다듬어진 사회 공동체의 기본적인 질서와 통제력을 믿어 의심치 않았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까지도 상품화시키는 자본주의와 시장의 논리는 그들의 예상을 훌쩍 뛰어 넘어서 사회 전반에 엄청난 혼란과 충격을 주기 시작하였으며, 외려 사회 구성원들로 하여금 그 동안의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극도의 불신 회의와 함께, 중앙 정부에 대한 주변 복속 국가들의 반발까지 겹쳐지면서, 당시 구소련 사회 전체에 위기감을 크게 증폭시켰으며, 

  이런 급격한 사회 혼란과 예상치 못한 상황에 대해 공산주의
체제 붕괴를 우려하고 극도의 두려움을 느낀 강경파 공산주의자들의 반동적인 쿠데타를 부르게 되면서, 그리고 그것이 더더욱 구소련 사회 전반의 통제력을 급격하게 상실시킴으로써, 결국엔 구소련 공산주의 체제는 이 세상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구소련의괴와 몰락으로써 마르크스 엥겔스의 공산주의 이념은 그저 소설이나 상상에 불과한 것으로만 치부되고 마는 상황이 온 것이지요.

  그 반면에 자본주의 체제는 어떨까요...자본주의 체제도 인간이 만든 것이니 분명 불완전하고 한계가 있었는데요. 과거 역사를 자세히 살펴보면, 자본주의 체제를 뒤흔든 심각한 위기가 있었는데, 바로 여러분들도 잘 알고 있 대공황이라는 사태였죠.

  당시 자본주의는 정말로
생존 자체가 의심될만큼 커다란 위기에 봉착하였습니다. 아담 스미스의 소위 이지 않는 손으로 대변되었던 시장의 원리와 합리적 인간의 경제동이나 선택이라는 고전 경제학의 패러다임이 철저한 허구였음이 만천하에 증명된 역사적 사건이 바로 대공황이었는데요.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대공황 당시 자본주의 체제도 구소련의 고르바초프가 그랬듯이, 자신과 반대되는 성격과 이념을 가진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개념을 일부 받아들여, 지금 이 시각 여러분들이 말하고 생각하는 복지와 공공재의 성격을 크게 강화하는 수정 자본주의의 형태로 일대 변신을 꾀함으로써 중대한 역사적 위기를 넘겼다는 사실입니. 한마디로 말해서, 공산주의 체제는 자본주의를 받아들이자 그 모습이 크게 변형되거나 무너졌었는데, 자본주의는 공산주의 이념을 받아들여 오히려 더욱 강고한 체제로 거듭났다는 말입니다.

  구소련
의 공산주의 체제는 전제 군주에 맞서 일어선 농민과 노동자들의 볼셰비키 혁명에 의해서 세상에 그 모습을 처음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그 체제의 근간을 이루었던 사상과 이론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에서 비롯되습니다. 그들은 지금 이 시각 여러분들이 그토록 강조하는 사회의 익성과 공공재, 그리고 인간의 천부적 기본권과 만인의 평등을 열렬하게 추구하고 꿈꾸었었던 희대의 천재들이자 철두철미한 상가이며 행동가들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원리와 이상, 천재들 나름의 투철한 개인적 실천, 그리고 세뇌 수준에 가까운 사상 이념 교육들은 정작 현실에서 대다수 평범한 인간들의 기본적인 성향과 본능과는 그리 맞지 않았었던 겁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이기심과 탐욕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들에게 공공재와 공익성, 인간적인 가치를 아무리 강조하고 주장해도 거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으며, 바로 구소련처럼 종국에는 사회 전체의 활력을 상실하고 무너지게 되었던 겁니다.

  따라서, 이런 파국을 막으려면 적절하게
사람들의 기본 욕구도 채워 주어야만 하는데,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와 시장의 논리가 도사리는 강력한 배경이라는 얘기입니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끊임없이 자극하고 충족시켜 주고, 개인만의생활과 사익 추구를 터부시하기는 커녕 적극적으로 권장하며, 또한 그것을 통해서 자본의 논리를 또다시 강화시키고 그 범위를 거의 무한대로 확장하는 완벽에 가까운 피드백 시스템을 갖춘 체제가 바로 자본주의가 아닐까라는 생각과 함께, 그런 자본과 시장의 논리가 특정 사회 내에 반영되기 시작하면, 사람들의 반응과 행태는 세계 어디든지 비슷하게 변하고 마는데, 그런 모습의 일환이 바로 러시아 성매매 여성들의 거리가 아닌가라는 말입니다.

  필자가 러시아 성매매 여성들을 다룬 자료 몇 가지를 세세히 살펴보니, 지금의 러시아 젊은이들은 구소련의 기억들이 거의 없으나 바로 위에 부모 세대들은 그런 기억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으며, 이것이 급격한 시장 개방과 경제적 발전으로 인해 또 하나의 세대 갈등과 혼란을 부추기는 사회적 요인이 되고 있다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과거 구소련의
공산주의 체제로 돌아가자라는 생각은 하지 않고 있으며, 개인의 행복과 물질적 이익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체제가 한결 희망적이라고 생각한다니, 이거 한번 깊이 생각할만한 문제가 아닐까 싶네요...


  그리고 바로 이측면에서 이제 필자는 여러분들에게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겠습니다.  
  구소련의 공산주의 체제만큼은 아니겠지만, 일정한 영역에서 사회의 공익성과 공공재의 개념을 추구하고 지키려는 민주주의의 이상과 가치는 과연 자본주의와 시장의 논리를 통제하거나 제압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과연 이것이 인간의 기본 본성이나 욕구에 정확하게 부합하는 것일까요?...

  산업 혁명이 발발하고 시민이라는 새로운 이름의 사회 집단이 역사에 출현하며 자본주의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과거부터 지금 현재까지, 세계 유수의 모든 경제학자들과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를 구상하는 정치가와 시민 사회 모두가 고민하고 논란이 분분한 그 근저에 도사린 본질적인 난제가 바로 이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지금 이 시각 한국사회 내에서 그토록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소위 미디어 법 문제도 결국 이것과 동일한 영역에 속한 문제가 아닐까요?...


  그러니까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인간의 본능이라는 영역까지도 침투하고 자극하는 자본주의의 논리를 단지 민주주의적 가치와 공공재라는 막연한 구호와 이념만으로써, 아무런 현실적인 대안이나 절충 혹은 타협 없이도 완벽하게 통제하거나 취사선택할 수 있는 그런 차원의 문제냐는 말입니다.


  필자는 구소련의 영화 인터걸과 그것의 실제 연장판격인 러시아 성매매 여성들의 실상을 알게 되면서, 그리고 그 동안의 끊임없는 학습과 사회 경험등을 모두 종합해 볼 때, 자꾸만 회의적인 결론이 도출되며, 이런 거대한 시대적 흐름을 일개인이나 어떤 한 국가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막거나 거스를 수 없다라 일종의 무기력과 절망감, 그리고 또다른 한편으로는 진실로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심각한 우려와 두려움이 끝없이 밀려 오는데, 여러분들은 어떤 의견과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까?...

※좀더 생각해 볼 문제
  대공황 당시의 자본주의는 소위 자유주의 이념에 기초하여 시장의 원리를 맹신하였고 합리적 인간의 선택과 경제적 행위만을 극단적으로 추구하다가 결정적인 위기를 맞았었습니다. 그 결과, 사회 공산주의 이념을 일부 채택하여, 지금 여러분들이 듣고 말하는 복지 국가와 사회 공공재의 개념이 탄생한 것인데요.

  문제는, 인간이란 존재가 태생적으로 이기심과 탐욕을 가져서인지 이런 역사적 교훈을 철저하게 망각하고, 또다시 신자유주의라는 이념으로 시장의 질서만을 강조하고 공공재와 공익성을 철저히 무시한 결과가, 미국발 금융위기로 촉발된 세계 경제의 불황을 낳았다는 것은 경제를 조금이라도 아는 이들은 모두 동감하는 사실이지요.

  그렇다면, 시간이 조금 더 흘러 과거 대공황을 극복한 것과 마찬가지 방식을 취하게 될까요? 그러니까 이게 무슨 말이냐면, 또다시 복지라든가 공공재의 개념을 크게 강화하는 방향으로 자본주의 체제나 역사가 수렴된다는 희망을 가져도 되는 것일까라는 말입니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현재의 경제 불황은 과거 대공황 때만큼의 위기는 아니기에, 모든 것을 상품화시킴으로써 결국 인간까지도 하나의 자원이나 물질로 환산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과 심화를 좀더 지켜 보아야만 모종의 결론이 나는 것일까요?...
 
  그리고 과연 그런 결말이 필자나 여러분들 생전에 현실이 될 수 있을까요?...


Posted by 네 오 NEO
  여러분은 투명인간이 되는 상상이나 투명인간을 소재로 하는 영화를 보신 적이 있나요? 만약 투명인간이 주인공인 영화를 보았다면, 그 영화의 제목이나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은 무엇입니까? 필자가 이렇게 질문을 던지면, 이번에도 답은 여러가지로 나오겠지요... 여러분들은 어떤 답을 하실지 모르겠지만, 필자는 개인적으로 투명인간 소재의 영화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폴 베호벤 감독의 할로우 맨입니다.

  필자는 이 영화를 보면서 많은 영감과 생각을 얻었었는데요. 필자가 최근에 작성한 노무현 미화에 대한 비판 포스팅과 미디어 법 반대자들의 행태에 대한 비판 글이 몹시 거슬렸었는지, 상당수의 악플러들이 마치 스토커마냥 필자를 따라 다니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필자가 그들의 행태를 가만히 살펴보니, 영화 할로우 맨이 문득 떠오르더군요.


  오늘은 그래서, 영화 할로우 맨을 통해 악플러들의 행태를 한번 정의해 보고자 합니다.  우선 본격적인 얘기에 앞서, 영화 할로우 맨의 줄거리를 대충 요약하자면... 

 
  ...그럼 이제부터 악플러들의 행태를 하나하나 짚어 본 뒤, 결론 부분에서 영화 할로우 맨의 줄거리로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필자가 수 많은 악플러들을 상대해 보니까, 이들에게는 공통적인 특징이 몇 가지 있었는데, 대표적인 습성이 극단적인 이분법과 선악 구도에 대단히 민감하다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가령 예를 들어서 필자가 노무현 전 대통령을 미화하는 일단의 극렬 노무현 지지자들을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이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들은 필자의 의도가 소위 대책없는 조중동식 노무현 죽이기가 아니라, 근거없는 사실들과 감정 이미지 조작등을 통해서, 노무현을 미화하려는 것을 비판하는 것임을 분명히 알 것입니다.

  그러나, 노무현 미화를 하려는 사람들에게는 필자의 비판은 곧 노무현 죽이기이고, 그것은 바로 조중동 혹은 한나라당과 동급이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런 그들에게 필자가 아무리 노무현 비판의 진정한 의도를 자세히 설명해도 결과는 항상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이 원하는 해답은 오직 하나, 노무현이 다 잘했고 한나라당과 조중동은 항상 나쁘다라는 대답 이외에는 결코 바라지 않기 때문에, 필자가 쓰는 포스팅은 모두 쓰레기 내지는 다른 이가 읽어서는 안되는 진짜 요주의 글이 되고 마는 셈입니다.

  그리고, 이런 극단적인 생각을 가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여러 무리수를 두게 되는데요.

논점의 왜곡
  대표적인 무리수를 거론하자면, 필자가 이런 극단적 이분법에 사로잡힌 악플러들의 댓글을 삭제하고 아이피를 차단해서 필자의 포스팅 댓글란을 자기들 마음대로 어지럽히기가 힘드니까, 포스팅 속의 한 부분만을 유난히 강조하거나, 문구 하나만을 트집 잡아서 전체를 부정하는 방식의 반박 포스팅을 쓰기 시작했다는 것인데, 이건 이른바 악플러의 진화라고나 할까요...^^

  예를 들자면, 노무현 참여정부 시절, 부동산 폭등은 크나큰 과오이며 최대 실책이라는 기본 사실을 부정하고 노무현이 굉장히 선방(?!)을 했다고 미화하려는 노무현 지지자가 있었습니다. 필자가 해당 노무현 지지자에게, 참여정부 시절 부동산 실정을 보여주는 다양한 데이터를 제시하면서, 노무현 참여정부의 부동산 실정은 분명한 과거 사실이었다라고 강력하게 비판을 가니다.

  그러면, 이성을 가진 사람답게 겸
허하게 과거 사실들을 인정해야 기본 원칙이겠지만, 극단적인 이분법에 사로잡힌 이 노무현 지지자에게는 그게 안됩니다.


  그는 필자의 포스팅을 한사코 부정하기 위해서, 필자가 제시했었던 자료가 모두 엉터리이고 짜집기라는 식의 근거없는 트집을 잡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필자와 나누었던 방명록의 비밀 댓글이나 댓글상 공방에서 보여지던 필자의 비아냥 섞인 댓글(노무현 참여정부 시절, 부동산이 폭등해서 빈부격차를 더욱 늘렸다는 엄연한 사실 관계마저 왜곡하려는 모습에 너무 기가 막힌 나머지, 그럼 당신이 제시한 자료의 출처인 일본의 모 연구소는 위치가 어디냐는 식의 비웃음을 말함!)의 일부 구절만을 편집하고 짜집기해서 계속 퍼뜨리며, 필자의 논리 자체를 무력화시키려고 했습다.

  그리고, 이런 경우는 위의 사례만이 아니었습니다. 최근에 미디어 법 반대자들의 행태를 필자가 강하게 비판하자, 어떤 미디어 법 반대론자가 필자에게 나름 반박을 시도했는데, 그 반박 내용이란 것이 필자는 자본주의의 예찬론자이며, 자본주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으니까 그냥 따라서 가자라고 필자가 동을 했다면서, 성토를 하고 거기에 대해서 상당한 이들이 공감을 표시했었데요.

  문제는, 필자는 자본주의가 대세이고 흐름이니까, 어쩔 수 없이 따라 가자고 말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거부하려면 보다 정교한 반대 논리가 필요한 것이 아닌가라는 취지의 비판을 가한 것인데, 해당 블로거는 계속해서 필자의 이런 논리와 포스팅 내용을 왜곡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리고, 급기야 해당 블로거는 필자의 논리를 친일파의 논리라고 단정하면서, 과거 친일파가 독립 운동을 하던 이에게 일본의 한국 점령은 대세이니까 그걸 따르라고 주장하던 모습과, 지금 필자가 자본주의 흐름은 피할 수 없는 대세니이까 미디어 법 반대를 하지 말라고 하는 것과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느냐고 어처구니없는 반박을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정말 재미있는 것은 필자의 논리대로만 가자면, 친일파 논리는 이렇게 되어야 얘기가 맞습니다... 

  친일파들이 일본의 한국 점령은 대세라고 말하면, 지금 미디어 법 반대를 부르짖는 사람들은 그냥 일본 침략 반대만 외치면서 독립 운동을 하겠다고 하는 것이고, 필자는 일본의 한국 침략은 피할 수 없는 대세이니 그들의 한국 점령을 일단은 지켜보되, 그들에게 맞설 무기라든가 치밀한 전술전략을 다시 수립해서 국가를 되찾아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인데,


  이게 해당 블로거에게는 미디어 법 반대자를 비판하면 미디어 법 찬성이 되고 자본주의 흐름에 무조건 굴복하자라고 하는 식의 이분법적 기가 된다는 것이죠...


자신은 주인이고 필자는 하인이라는 식의 자기중심적이고 과대망상적인 행태
  또한 악플러들의 특징은 자신들은 온갖 욕과 근거없는 비방이나 인신공격을 가하면서도 필자에게는 수시로 예의를 주문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정말로 웃기는 얘기이지요.

  필자가 포스팅을 작성했고 그 포스팅이 올라온 블로그는 필자의 방인데, 거기에 불쑥 찾아 온 방문객이 대뜸 반말이나 욕을 하면서 포스팅을 부정한다면, 이것은 결국 방문자는 왕이고 포스팅을 작성한 필자는 그저 자신들에게 굽신거리고 원하는 답을 해주는 하인이나 서비스 맨이라고 생각한다는 반증이 아닐까요... 


  그리고 바로 이런 측면에서, 이제 슬슬 영화 할로우 맨의 스토리로 악플러들의 행태에 대한 결론을 내 보려고 합니다.
  투명인간이 된 세바스찬 카인은 점점 독단적이고 이기적으로 변합니다. 그리고, 남들에게 보여지지 않는 자신의 특수한 능력에 심취해서, 마침내 자신이 절대선이고 자신에게 반대하는 자들은 모두 악이고 없어져야 할 존재쯤으로 규정을 하는데, 악플러들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오프 라인상의 투명인간 세바스찬이 그런 것처럼, 사이버 공간에서 익명성을 무기로 자유롭게 어디든지 돌아다니면서, 자신들이 가진 생각과 다른 사고나 가치관을 지닌 이들을 공격하거나 입을 막으려고 시도하지요...

  오프 라인상에서라면, 감히 자신과 생각이 다른 이들의 집에 방문하면서 대뜸 욕을 할 수는 없겠으나 사이버 공간이라는 특수성과 얼굴이나 신분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소위 투명 인간의 속성인 익명성 때문에, 어느 순간 자유가 지나쳐 방종이 되면서 자신들이 왕이고 주인이라는 과대망상적 생각으로 발전하였고, 그래서 자신들은 멋대로 지껄이면서도 전혀 자기 반성이나 죄의식이 없으며, 자신들의 마음에 안드는 포스팅을 작성한 필자에게만 예의를 강조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들의 강점인 익명성을 무기로 지껄이는 온갖 억측과 악플에 대해서 누군가가 비판하거나 성토를 하면, 그 사람에게 집단으로 몰려가서 어떻게든 공격을 해서 결국 입을 다물게 만들고, 그것을 즐기는 가학적이고 악마적인 모습을 아무 스스럼없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영화 할로우 맨에서, 카인의 독단과 전횡을 우려한 린다가 국방성 위원에게 보고를 하고 도움을 요청하듯이, 이런 악플러들의 모습이 너무 지나치고 위험하다고 판단하는 사람들이 시간이 갈수록 늘면서, 급기야는 인터넷 실명제를 요구하는 여론이 비등하게 되자,

  투명인간 세바스찬이 그랬듯이, 표현의 자유라는 구호 속에 자신을 철저하게 숨기고, 인터넷 실명제를 주장하는 이들을 마치 민주주의와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려는 수구꼴통쯤으로 규정하면서 또다시 공격을 가함으로써, 결국 영화에서처럼 익명성을 무기로 자유롭게 돌아다니던 자신의 존재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표현의 자유까지도 점차 제약하는 결과를 가져 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보시기에 어떻습니까?  악플러들과 영화 할로우 맨 사이에 공통점이 상당히 많지요? 

  필자는 영화 할로우 맨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더랬습니다. 결국 인간의 도덕이란 타인과의 사회적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고 말입니다. 따라서, 타인이 보지 않는 영역에서는 도덕이 설 공간은 점점 줄어들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측면 때문에, 남들이 보지 않는 장소에서 온갖 범죄가 생기는 것이며, 이는 어쩌면 인간의 기본적인 속성일지도 모르겠다라는 생각과 함께, 악플러들의 기본 속성과 익명성의 상관 관계야말로 인터넷 실명제를 찬성할 수 밖에 없는 강력한 근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사진 출처: Columbia Picture

   

Posted by 네 오 NEO